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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몸된 교회에 관한 지혜 (고전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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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의 성숙도(成熟度)를 알아볼 수 있는 표(標)는 자신의 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분별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영적 생활의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해 간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보다 더 잘 알아 가게 될 것입니다. 최근,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된 생활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좋은 현상이라 하겠습니다. 이 같은 움직임은 지역 교회와 성도의 분리를 초래하는 ‘개별적 기독교’(individual Christianity)를 강조하는 풍조에 좋은 반작용(反作用)이 될 것입니다.
물론 “몸”이란 것이 바울이 교회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유일한 비유적 표현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표현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교회는 가족, 군대, 성전 및 신부 등의 비유적 표현으로도 묘사되었으며 그 각각의 이미지(image) 모두가 우리에게 교회의 중요한 속성을 알려 줍니다. 그러나 바울은 세 서신( 고린도전서, 에베소서, 로마서)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 경우마다 교회에 관한 세 가지 중요한 진리, 곧 교회의 단일성, 다양성, 성숙성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성령의 사역을 논하지 않고는 그리스도의 몸, 곧 교회를 말할 수 없습니다. 오순절날 교회라는 몸을 탄생시키시고, 그 몸 안과 그 몸을 통해서 역사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유감스럽게도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성령의 은사를 자기의 유익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성령을 슬프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인들이 사용하는 유용한 도구를 장난감으로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숙해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1. 통일성:성령의 은사(12:1-13)
고린도 교회에는 분쟁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교회의 하나 됨을 무엇보다도 강조함으로써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바울은 교회의 경이로운 영적 연합을 이루는 네 가지 사실을 지적합니다.

첫째, 교회는 동일한 주님을 고백합니다(12:1-3)
바울은 회심하기 이전 우상 숭배자들이었던 그들의 체험을 현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그들의 체험과 대조시킵니다. 과거에 그들은 죽은 우상을 섬겼었으나 이제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전에 섬겼던 우상은 그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으나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며, 또한 그들 중 예언의 은사를 받은 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아직 회개하기 전에 그들은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며(10:20), 길을 잃기에 이르렀었습니다(“끌려갔느니라”, 2절).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영(靈)이 그들 안에 거하시며 그들에게 방향을 지도하십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주님이시라’고 정직하게 고백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조롱하는 악한 자들도 입으로는 예수님을 주(主)라 말할 수 있지만, 그들은 결코 참된 고백을 하지는 못합니다(아마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회심하기 전 마귀의 사주를 받아 그처럼 예수님을 조롱했던 일을 언급하는지도 모릅니다). 성령께서 역사 하실 때 신자는 늘 자신을 절제하게 된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14:32). 왜냐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감찰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절제를 무시하는 소위 성령의 나타남(Sprit manifestation)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절제는 성령의 열매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5:22-23).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 우리의 삶을 주관하는 주님이시라면, 교회에는 반드시 일치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있는 분쟁과 불화는 구원받지 못한 세상을 향한 그들의 연합된 증거의 힘을 약화시킵니다(요17:20-21).

둘째, 교회는 같은 하나님께 의지합니다(12:4-6).
본문에서는 “같은 성령님”, “같은 주님”, “같은 하나님”과 같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우리들 각각이 받은 은사나, 하고 있는 사역이나 사역의 방법은 다 다를지도 모르지만,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빌2:13). 은사의 궁극적인 원천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은사를 관리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은사를 사용하도록 힘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왜 사람이 영광을 받으려 합니까 왜 성도가 서로 경쟁을 합니까

셋째, 교회는 같은 몸을 섬깁니다(12:7-11).
성령의 은사는 교회 전체의 유익을 위해 주어집니다. 성령의 은사들은 개인적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단합된 역사를 위한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교회 성장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이기적 욕구를 위해 사용했던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이와 같은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겸손함으로 성령의 은사를 받을 때 교회의 단합을 위해 그 은사들을 사용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전 교회가 유익을 얻을 것입니다.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은 12장 8-10, 28절, 에베소서 4장11절과 로마서 12장6-8절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모두를 종합해 보면, 열아홉가지의 서로 다른 은사와 직분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목록과 고린도전서의 목록이 같지 않은 것으로 보아, 바울은 어느 서신에서도 성령의 은사를 모두 다 밝히려고 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바울이 열거한 성령의 은사들은 교회의 사역을 위해 유용한 것들이긴 했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그 은사들에게만 제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라는 직분에 관해서는 이미 논의한 바 있습니다(9:1-6)

선지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메시지를 받은, 신약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대변자들입니다. 이들의 임무는 교회의 덕을 세우고 성도들을 격려하며 안위케 하는 것입니다(14:3). 그러나 그들의 메시지가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 지의 여부는 그 메시지를 듣는 자들이 분별합니다(14:29/ 살전5:19-21).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교회의 기초를 세우기 위해 함께 일한다는 것은 에베소서4장 11-12절 말씀이 분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로 말미암아 교회의 기초가 이미 세워졌기 때문에 더 이상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필요치 않다고 우리는 추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사(혹은 목사)는 회심한 자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 필요한 교리적 진리를 가르쳤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사도들의 교훈(전승)을 근거로 가르쳤습니다. 선지자들과는 달리, 이들은 성령으로부터 직접 메시지를 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이들의 가르치는 일을 도와 주셨습니다 야고보서3장1절은 이 직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복음 전도자는 죄인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주로 했습니다. 모든 사역 자들은 복음 전도자의 일을 해야 하며(딤후4:5). 잃어버린 영혼을 구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복음 전도자로서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기도 합니다.

능력은 초대 교회 당시 그 능력을 행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종이라는데 대한 하나의 보증이었습니다(히2:1-4). 사실 능력, 병고침, 방언 등은 모두 신학자들이 소위 표적의 은사(the sign gifts)라 칭하는 부류에 속하며, 이러한 은사들은 교회 내의 아직 연약한 성도들을 위해 특별한 방법으로 주어집니다. 사도행전이나 다른 교회사 책을 보면, 이러한 은사들이 상황에 따라 주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의 은사는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교회를 이끌어 가는 일과 관계가 있습니다. 영적인 지도자가 없으면 교회는 방향을 잃습니다. 섬김의 은사와(롬12:7) 치리(ruling)의 은사도 같은 범주에 속합니다.

말하는 것과 관련된 은사에는 방언과 통역(이 은사에 대해선 다음에 말씀드립니다)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하여 특정한 상황에 적용하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권위함(격려, 또는 필요에 따라 책망하는 일도 포함)의 은사가 있습니다.

구제와 긍휼과 베풂의 은사는 가난한 자에게 물질을 나누어주고, 하나님의 종들의 사역을 물질적으로 돕는 일을 말합니다.

믿음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교회 사역에서 이루시고자 하는 일로 인해 하나님을 철저하게 믿는 믿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즉, 그분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며 우리는 필요한 것들을 제공받으리라는 믿음을 말합니다.

영분별의 은사는 초대 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은사였습니다. 왜냐하면 사단이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말씀을 방해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적그리스도의 영을 분별할 수 있게 하십니다(요일 2:18-24/4:1-6), 물론 성령께서는 기록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적그리스도의 영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날의 교회에서는 선자자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거짓 선지자들을 염려할 필요는 없지만, 현재의 우리들은 거짓 교사들을 조심해야 합니다(벧후2:1)

(벧후2:1)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다양한 성령의 은사들을 말씀의 은사, 표적의 은사, 섬김의 은사의 세 가지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우리는 바울이 그러한 은사들을 열거한 이유, 즉 모든 은사는 우리의 사역을 한 몸에로 연합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각 개인의 은사 자체에 이끌려서는 안 됩니다. 성령께서는 이런 은사를 우리의 뜻대로가 아니라, “그(성령의)의 뜻대로”허락해 주십니다(11절). 어떤 그리스도인도 자신이 받은 은사에 대해 불평할 수 없으며 또한 자신의 은사를 자랑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한 몸 안에 있는 여러 지체들로 서로를 섬기기 때문입니다.

넷째, 교회는 같은 세례를 받는다(12:12-13).
유감스럽게도 성령 세례라는 말은 신약 성경에서의 원래 의미와 동떨어진 뜻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혼돈해서는 안 될, 성령의 가르치신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2:12-13). 성령 세례는 회심 때에 일어나는 일로서, 이 때 회개하는 죄인들에게 성령께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주시며, 그들을 하나님의 전(殿)으로 만드십니다. 모든 성도들은 이 성령 세례를 단 한번 체험합니다(12:13). 성령 세례는 이렇게 단회적(單回的)이고 다시 되풀이 도지 않기 때문에 성경 어느 곳에도 이 성령 세례를 구하라는 가르침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은 (엡5:18 이하) 우리의 삶을 성령께서 통제하시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성경에서, 어떤 것으로 “충만케 된다”는 것은 그것에 의해 “통제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충만케 되라”는 명을 받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께 모두 맡기고, 성령 충만케 될 것을 그분께 간구 한다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성령 충만은 성령 세례와 달리, 거듭되는 체험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충만한 능력이 끊임없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세례 받는 자가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성령으로 충만케 된다는 것은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에게 속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우리 속에 계신 성령님의 증거가 회심 시에 성령의 세례 받은 것을 확증합니다(롬8:14-16). 성령 세례의 증거는 “방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모두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그들 모두가 방언을 하지는 않았습니다(12:30), 성령으로 충만케 된 것은 증거할 수 있는 권능(행1:8), 기쁨과 순종(엡5:19 이하), 그리스도를 닮음(갈5:22-26), 말씀에 대한 지식이 자라 가는 것(요16:12-15) 등이 입증해 줍니다.

회심할 때 받은 성령의 은사로 인해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었습니다. 종족, 사회적 지위, 부(富), 또는 성적 구별 등은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또 서로 교제하는 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으며 유리한 조건도 되지 않습니다.

2. 다양성:성령의 은사들(12:14-31)

다양성이 없는 통일성은 획일적이기 쉽습니다. 획일성은 죽음을 낳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생은 다양성과 통일성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인간의 몸이 죽으면 몸의 모든 기관이 천천히 정지하며 모든 것이 똑같이 돼 버립니다. 즉, 신체 자체가 궁극적으로 흙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왜 일부 교회와 사역자들이 점점 약해져서 그 생명력을 잃는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교회가 약화되고 죽어 가는 이유는 통일성이 획일성으로 변해 가는 것을 방지해 줄 만한 다양성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밴스 헤브너(Vance Havner)박사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이더니 그 다음에는 운동(movement)이 됩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기계가 되고, 마지막에는 묘비가 되어 버립니다”
처음에는 죽은 교리에 저항하면서 사역을 시작한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그 자신조차 죽은 자가 되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순수와 건전한 교리를 지키는데 집착하다가 창의성과 새로운 아이디어를 질식시켜 버리기 때문입니다.

반면, 다양성 또한 통제되지 않으면 통일성을 해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무질서 상태가 되고 맙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는 성숙함이 다양함과 통일성을 조화시킨다는 사실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교회 내의 성도 개인과 전체 조직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은 오직 성숙된 신앙으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몸을 예로 들면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다양성에 대해서 세 가지 중요한 요소를 설명합니다. 왜 사람의 몸에는 각기 다른 기능을 가진 지체들이 있는가

첫째로, 몸이 살아서 성장하고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각기 다른 기능이 필요합니다(12:14-20).
어떤 지체도 다른 지체와 비교되거나 대조될 수 없습니다. 각 지체는 그 기능이 서로 다르며 어느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기능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손으로 걷는 법을 배울 수 있지만 발로 걷는 편을 택합니다. 마찬가지로 발을 사용해서 타자를 치거나 음식을 먹지는 않습니다. 귀는 볼 수 있고 눈은 들을 수 없습니다. 모든 기관은 각각 그 고유의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귀로 냄새를 맡으려고 해본 적이 있습니까
성령의 은사도 각각 고유한 기능이 있습니다. 은사의 다양성에는 우열의 차이가 내포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권 적으로 은사들을 부여하시는 데 과연 실수가 있었겠습니까

둘째로,지체는 서로에게 의존되어 있음을 앎으로써 통일성을 증진시킵니다(12:21-26).
한 몸 안에 있는 지체의 다양성은 하나님의 지혜가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각 지체는 다른 지체의 기능을 필요로 합니다. 어느 지체도 개별적으로 독립해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약 몸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과의 연계를 끊는다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여 곧 몸에 병이 생기거나 아니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의 몸에서는, 각 지체가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협력하며, 혹은 몸에 이상이 생기면 모든 기관이 협력해 원상태로 회복시킵니다. 한순간이라도 어느 지체가 다른 지체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그 지체는 그 즉시 기능이 약해지며 나아가서 몸 전체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킵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 서로에게 아주 중요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고전12: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고전12: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23-24절에서 바울은 몸의 덜 중요한 부분을 언급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에 “귀한 것들로 입힌다”는 것은 시선을 끌 만한 용도로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몸의 지체 중 다른 지체보다 더 아름다운 부분은 특별한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교회 내에 분쟁(분열)이 없길 원하십니다. 지체들끼리 서로 다투면 교회 내의 다양성은 분열의 원인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지체들이 서로를 돌볼 수 있을까 각 성도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에게 부여된 기능을 발휘하며 다른 성도의 일을 도와줌으로써 가능합니다. 한 성도가 받는 고통은 교회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강건한 한 성도는 다른 성도가 강건해지도록 도와줍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뜻은 지체들 간의 다양성을 통해 성취됩니다(12:27-31).
은사를 부여하시고 직분을 주시는 분으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 전체뿐 아니라 개 교회를 위해서도 완벽한 계획을 갖고 게십니다. 신약성경에 언급된 교회들이 모든 은사를 다 소유했다고 믿을 만한 근거는 없으나, 고린도 교회는 특별히 은사를 받은 편이었습니다(1:4-7/ 고후8: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각 교회마다 꼭 필요한 은사들을 부여하십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은사들 중에서도 다른 은사들보다 더욱 중요한 우선적인 것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은 우리가 앞서 살펴본바, 은사에는 우열의 차이가 없으며 그 각각의 은사를 받은 신자들이 다 중요하다는 내용과 모순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의 몸에는 없으면 다소 불편한 부분도 있지만, 없으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바울이 사도와 선지자를 제일 먼저 언급하는 것은, 이들의 사역이 교회의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엡2:20). 교사들은 성도들을 믿음 안에 세우는 데 필요합니다. 이 외의 은사들은 개개인의 신자들 돕고 교회를 세우는 데 필요할 때마다 주어집니다.
29-30절은 헬라어 문답 구조상 각 질문마다 “아니요”라는 대답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들을 모두 다 소유한 신자는 없습니다. 각 신자들은 주님께서 부여하시는 직분을 감당하는 데 필요한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31절에서 “제일 좋은”(the best)이라 번역된 말은 “보다 큰”(greater)이라는 단순한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은사들은 다른 은사들보다 중요성이 더욱 큰 것도 있습니다. 신자들이 이러한 은사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14:1). 바울은 예언의 은사를 소중히 여기고 있었으나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방언의 은사를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방언의 은사를 은사 목록의 맨 마지막에 둡니다.

다양성과 통일성은 성숙한 신앙에 의해서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이 성숙함은 사랑과 더불어 옵니다. 성령의 선물과 성령으로부터의 은사들을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서로 서로를 섬기는 데 그 은사를 사용할 때는 성령의 은혜 또한 필요합니다.

3.성숙성:성령의 은혜(13:1-13)

걸리버 여행기를 쓴 풍자 작가 조나단 스위프트(jonathan Swift)는 “우리의 종교는 우리를 증오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하지만 우리가 서로 사랑하도록 만들기에는 부족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무리 경이롭고 흥미진진한 은사로 할지라도 사랑 안에서 사용되지 않으면, 그것은 무익하며 파괴적인 것이 됩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한 바울의 세 서신(로마서, 고린도전서, 에베소서)에서 그 비유적 표현이 등장하는 구절의 강조 점은 모두 사랑입니다. 성숙한 성도의 삶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과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사랑이 점점 커져 간다는 것으로 잘 증거됩니다. “사랑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돌고 있는 혈액입니다”라는 말은 적절한 표현입니다.

성경에서 고린도전서 13장만큼 잘못 해석되고 잘못 적용되는 부분도 없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흔히 그 문맥과 상관없이 사랑에 대한 찬양이나 성도들의 형제애에 관한 감상적 설교로 사용되어집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쓰면서 바울은 여전히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취급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바울은 방언 은사의 남용, 교회 내의 분쟁, 다른 성도의 은사를 질투하는 일, 이기심, 공예배의 태도 및 주님을 욕되게 하는 행위 등을 의식하면서 13장을 쓰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상황에 관련 없이 고린도전서 13장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가 창조적으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오직 사랑이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성도간의 사랑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그 사랑의 세 가지 특성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첫째, 사랑은 풍요롭게 합니다(13:1-3)

본문에서 바울은 방언, 예언, 지식, 믿음 그리고 구제(또는 희생) 등의 다섯 가지 은사를 언급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랑이 없으면 그러한 은사의 발휘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사랑이 없는 방언은 한갓 소음에 불과합니다. 은사를 풍요롭게 하고 그 가치를 높이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는 사역은 그 사역자와 사역자가 접하는 사람들을 모두 값싸게 만듭니다. 그러나 사랑의 사역은 교회 전체를 풍요롭게 만듭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엡4:15).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받습니다.(살전4:9), 성부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가르쳐 주셨고(요일 4:19), 성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시고 또 우리에게 서로 사랑할 것을 명령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치셨습니다(요13:34-35).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심으로써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쳐 주십니다(롬5:5). 신앙의 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은 바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 사랑에 접히는 모든 것을 풍요롭게 만듭니다.

둘째,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13:4-7)

(고전8:1)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신령한 은사의 목적은 교회를 덕스럽게 세우는 것입니다(12:7/ 14:3,5, 12, 17, 26). 이 말은 우리가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생각하라는 의미이며, 그 일에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인내심이 부족했습니다(14:29-32 참조). 그러나 사랑은 오래 참게 만듭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은사를 시기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러한 시기심을 없애 줍니다. 그들은 자기를 자랑하고 교만했습니다(4:6, 18-19/5:2). 그러나 사랑은 자랑과 교만을 없애 주고 그 대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합니다.

(롬12: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 애찬과 성찬 때에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꼴사나운 태도로 행동했습니다. 만약 참 사랑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면, 그들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태도로 행동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심지어 서로를 비난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5절).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다는 말은 “잘못한 일에 대한 기록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사람들이 자기에게 잘못했다고 생각되는 일들을 목록에 기록해 두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불쌍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용서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적어 둔 모든 기록을 깨끗이 지워 버리고 다시는 그것에 대해 거론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엡4:26, 32 참조).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자기 교회 내에서 자행되고 있는 죄를 자랑하고 있었습니다(5장).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벧전 4:8). 노아의 두 아들 셈과 야벳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 주려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바로 서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창9:20-23).

4-7절을 주의 깊게 읽고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언급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와 비교해 보십시오. 그러면 사랑의 모든 속성들이 성령의 그 아홉 가지 열매에 다 포함되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성령의 능력이 우리들의 삶과 교회 안에서 역사 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덕을 세워 주는 까닭은 바로 그것입니다.

셋째, 사랑은 영원합니다.(13:8-13)

예언, 지식, 방언의 은사는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여기서 지식은 교육이 아니라 영적 진리를 직접 마음에 인식시켜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 은사는 병행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자에게 지식을 부여하시면, 그는 방언으로 그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그러면 통역자(때로는 예언자 자신이 통역자이기도 합니다)가 그 메시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이 세 가지 은사들을 자랑했으며, 그 중에서도 방언의 은사를 특히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은사들도 폐하여지지만, 사랑은 영원히 지속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요일4:8, 16).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언젠가는 사라져 버릴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답게 생각하고 이해하고 말합니다. 그건 당연합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성숙해져서 언젠가는 어른처럼 생각하고 말하게 됩니다. 즉, 어린아이의 일을 버려야 할 때가 이르는 것입니다(11절).

신약성경(그 당시까지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던)을 통해서 우리는 완전한 계시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계시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부분적입니다(만약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8:1-3을 다시 살펴보기 바랍니다). 교회 전체나 신자 개인에게는 나름대로의 성장의 과정이 필요합니다(엡4:11-16,/ 고전14:20/벧후3:18).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까지는 우리는 온전해지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성장해야 하고 성숙해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순간을 위해서 살지만 성인들은 영원을 위해서 삽니다. 사랑은 영원합니다. 그리고 사랑이 창출해 내는 것 역시 영원할 것입니다.

성도에게 부여된 은혜 세 가지가 모두 영원하다는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그리하여 마침내 믿음은 눈에 보이게 될 것이고, 소망은 이뤄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은혜 중에서 “제일”(the greatest)은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때 당신은 그를 믿게 될 것이고 항상 새로운 기쁨을 기대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늘 병행합니다. 그러나 믿음과 소망에 힘을 제공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불행스럽게도 신령한 것을 강조하는 오늘날 풍조에는 거룩하지도 못하고(성경을 무시하기 때문에), 영적이지도 못한(육체의 소욕에 적용되기 때문에) 부분이 있습니다. ‘당신이 소유해야 할 은사는 무엇이고 그 은사를 얻는 방법은 무엇이다’라는 말은 다른 사람에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 뜻에 속해 있는 일입니다.

또 성령의 은사를 축소시켜서도 안 되며, 성령의 은혜를 소홀히 여겨서도 안 됩니다. 여러 지역 교회 의 문제는 대부분이 성령의 은혜는 무시하고 성령의 은사만을 갈망하는 사람들에 의해 발생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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