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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사역에 관한 지혜 (고전 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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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3장에서 바울은 지역 교회의 세 가지 특성을 설명하였습니다. 이제 바울은 본 장에서 사역자의 세 가지 특성을 설명합니다. 사역자들은 청지기(1-6절), 구경거리(7-13절), 및 영적 아버지(14-21절)로서의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봉사(사역)를 판단하시고 평가하십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어떻게 판단하시고 평가 하시는지를 고린도 교인들에게 설명합니다. 6절 말씀은 바울의 그러한 의도를 뚜럿히 드러내 줍니다.
(고전4:6)“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하려 함이라 ”
우리는 사역자들과 그들의 사역을 판단함에 있어 극단에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너무나 무관심한 나머지 어떤 사람이고 다 인정하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되고, 다른 한편으로 너무나 비판적이어서 심지어 바울 같은 사람까지도 그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됩니다. 영(靈)을 시험해 보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요일 4:1-6/요이 1장). 그러나 자칫 잘못해서 성령을 근심케 하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유의해야 합니다.
본 장에서 바울은 사역자의 세 가지 특성을 설명하면서 참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사역자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1.청지기의 모습-충성함(4:1-6)
바울은 자신과 베드로와 아볼로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소개함으로써 응수합니다 일꾼(Minister)으로 번역된 용어의 문자적 의미는 “배 밑창에서 노를 젓는 사람”(under-rower)입니다. 이는 로마의 거대한 전함 밑창에서 노 젓는 일을 하던 노예를 일컫는 용어입니다. 이러한 용어로 자신들을 소개함으로써 바울은 자기 자신과 아볼로와 베드로는 배의 선장이 아니라 선장의 명령을 받는 노잡이에 불과하다는 것과 또 이처럼 비천한 노예 중에서 누가 누구보다 더 훌륭하다고 비교할 수 있겠는냐고 말합니다.

이어서 바울은 자신들을 “맡은 자”, 곧 청지기의 모습으로 설명합니다. 청지기의 주인의 모든 소유를 관리하되, 그 자신의 소유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 예를 애굽에 팔려간 요셉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 청지기의 우두머리였습니다(창39장). 교회는 “믿음의 가정”입니다(갈6:10). 따라서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풍부한 소유물들을 그 가족되는 성도들과 함께 나누는 청지기에 해당합니다(마13:52 참조) 바울은 이 놀라운 영적 부요를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비밀”이란 용어의 중요한 의미를 이미 살펴보았으므로 그것을 다시 한번 상기해 보면 됩니다.

청지기의 임무는 주인에게 충성하는 것입니다.
청지기의 가정의 다른 식구들은 기쁘게 해주지 않을 수도 있고 다른 종들을 기쁘게 해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주인만 기쁘게 해 준다면, 그 청지기는 훌륭한 청지기입니다. 이와 똑같은 개념이 로마서 14장 4절에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논해야 할 중요한 문제는 “바울이 더 인기가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아볼로가 바울보다 더 훌륭하게 설교하지 않는가” 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쟁점은 “바울, 아볼로,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에 충성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였습니다. 예수께서 누가복음 12장 41-48절에서 비유로 말씀하실 때, 염두에 두셨던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충성의 여부였습니다. 하나님의 종이 개인 생활이나 가정 생활 그리고 말씀 증거하는 일에 충성된다면 그는 훌륭한 청지기일 것이며 또 그에 합당한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한편, 종은 끊임없이 판단을 받고 있습니다. 청지기의 하는 일에 대해 평가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항상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청지기가 세 가지 면에서 판단받는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첫째, 사람의 판단입니다.(4:3상반절)
바울은 사람들이 자신을 판단한다고 해서 절대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주인되신 하나님의 판단이 사람들의 판단보다 휠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한 “사람의 판단”이란 “사람의 날”(man's day)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의 심판의 날과 대조됩니다(1:8/3:13)

둘째, 청지기 자신의 판단입니다(4:3하반절-4상반절)
바울은 자신의 삶과 사역에 어떤 잘못된 것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변명거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의 실상을 모를 때가 때때로 있습니다. 청결한 양심과 스스로 의롭다 하는 태도 사이에는 분명한 구분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구분점을 늘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세째, 하나님의 판단입니다(4:4하반절)
이는 가장 중요한 판단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를 판단하십니다(히4:12).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때로 하나님깨서는 우리로 하여금 자기 죄를 깨닫게 하고 그것을 고백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와 절친한 형제들을 사용하십니다(마18:15-17) 그러나 본 절에서 언급된 판단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이루어질 각 성도에 대한 심판을 의미합니다(롬14:10/ 고후5:10) 그때에 모든 진실이 드러날 것이며. 그에 따라 충성된 종에게는 합당한 상급이 주어질 것입니다.
이 구절 말씀은 사람들의 독선적인 독립성을 야기시키는 데 이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역 교회는 한 가족이며, 각 지체들은 서로 돕는 가운데서 장성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솔직하고 또 사랑에 입각한 비판이 허용됩니다. 그러나 그 비판이 옳지 못한 비판이라면 그때에는 오히려 교회가 그 비판자를 도와 주어야 합니다. 어느 경우가 되었든 강건해지는 편은 진리편입니다.

“그러므로”(5절)라는 말은 바울이 방금까지 논의해 온 진리들을 이제 우리 각자의 삶에 적용시키려 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바울은 세 가지의 잘못을 꾸짖으면서 본 단락의 논의를 마무리짓습니다.

첫째로, 판단의 시기가 잘못되었습니다(4:5)
주님께서 사역자들의 삶과 그들의 사역을 판단하시는 때는 그분께서 재림하시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고 그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사실 인간은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없습니다. 또 어떤 행위에 대한 동기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삼상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바울을 판단함으로써 하나님 행세를 하고 있었고 하나님만이 가질 수 있는 권한을 스스로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나 자신도 사역을 하면서 이러한 잘못을 얼마나 많이 저질러 왔는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 처한 상황을 잘못 판단하고 또 그로 인해 그 사람을 잘못 판단하기란 얼마나 쉬운 일입니까!

둘째로, 판단의 기준이 잘못되었습니다(4:6상반절)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각각의 취향과 편견에 따라 여러 사역자들을 판단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판단에 따라 사역자들을 비교 평가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일하고도 참된 판단 기준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일꾼들의 삶과 사역에 대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기준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 인간이 만들어 낸 새로운 기준을 덧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세째로, 판단의 동기가 잘못되었습니다(4:6하반절)
고린도 교회 내의 각 파당들은 자신들이 선호하는 사역자를 세우기 위해 다른 사역자들을 깍아 내렸습니다. 그러한 행동의 동기는 전혀 신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한 사람에 반대하는 또 다른 사람의 파당에 속함으로써 교회 분열을 조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고 교회 분열의 원인이 되고 있던 교만심을 제거해야 했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관리하고 있는 청지기들입니다. 이 청지기들을 판다하는 열쇠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데 충성했는가의 여부입니다. 가르치는 데만 충실해서는 안 되고 그것을 실해하는 데도 충실해야 합니다. 사무엘 선지자와 바울 사도의 변증이 위와 같은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삼상12:1-5/행20:17이하참조)
(삼상12:1) 사무엘이 온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가 내게 한 말을 내가 다 듣고 너희 위에 왕을 세웠더니 (삼상12:2) 이제 왕이 너희 앞에 출입하느니라 보라 나는 늙어 머리가 희었고 내 아들들도 너희와 함께 있느니라 내가 어려서부터 오늘날까지 너희 앞에 출입하였거니와 (삼상12:3) 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내게 대하여 증거하라 내가 뉘 소를 취하였느냐 뉘 나귀를 취하였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뉘 손에서 취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 (삼상12:4) 그들이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속이지 아니하였고 압제하지 아니하였고 뉘 손에서 아무 것도 취한 것이 없나이다 (삼상12:5)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 손에서 아무 것도 찾아낸 것이 없음을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거하시며 그 기름 부음을 받은 자도 오늘날 증거하느니라 그들이 가로되 그가 증거하시나이다
(행20:17)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행20:18)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바니 (행20: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행20: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행20: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행20: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행20: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행20: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행20:22)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2.비천한 구경거리-낮아짐(4:7-13)
바울은 자신과 다른 사도들을 세계의 구경거리라고 말했는데(9절), 이는 당시 로마 제국 사람들에게는 친숙한 비유였습니다. 로마의 통치자들은 백성들을 회유(懷柔)하기 위해 제국 도처에서 여러 가지 오락 행사를 벌였습니다. 서로 결투를 벌이는 무사(武士)들이나 혹은 맹수들과 싸우는 죄수들을 구경하러 모인 시민들로 각 도시의 원형 경기장은 초만원을 이루곤 했었습니다. [“구경거리”(spectacle)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영어의 “극장”(theater)과 그 의미가 같다]. 로마의 콜로세움은 이러한 구경거리가 벌어지던 중심 장소였습니다.
원형 경기장의 주된 구경거리가 다 끝나면, 가장 힘없고 나약한 죄수들이 끌려나와 맹수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런 죄수를 동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또 죄수들이 짐승을 물리치는 것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사악한 구경꾼들은 그저 잔혹한 죽음 그 자체를 즐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죽음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배경 하에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겸손케 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련의 대조적인 설명을 시작합니다.

왕노릇과 구경거리(4:7-9)
7절에 언급된 질문들은 우리 모두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내용입니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라는 구절에 대해, 다른 영어 성경에는 “누가 너를 존중히 여기느뇨”라고 번역했습니다.
7절에 대한 가장 훌륭한 해석은 세례 요한의 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3:27)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요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바울은 8절에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왕으로 묘사하는 풍자 법을 사용합니다. “물론 나도 너희들과 함께 왕노릇하면서 중요 인물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경기장에 들어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아야 했다. 너희들은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는 최고이지만 우리 사도들의 눈으로 볼 때는 가장 낮은 자들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하는 말의 의도이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사도들은 가장 낮은 자였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사도들이야말로 최고에 해당했다(12:28).
사역을 함에 있어서는 자랑의 여지가 없다. 바울 같은 위대한 사도도 자신을 미말(微末)<매우작음> 에 처한 구경거리로 간주하는데 하물며 우리 같은 범인(凡人)들이랴! 교회의 지체들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준 이외의 것으로 사역자들을 판단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또 자신들이 좋아하는 사역자들을 자랑하는 것도 옳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충성스러운 청지기들을 전혀 인정해 주거나 존중해서는 안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어떠한 경우에서든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을 자랑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살전5:12-13).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4:10상반절)
인간의 기준으로 볼 때 바울은 미련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가 계속 유대인들의 랍비로 남았더라면 그는 유대교회 고위 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갈1:14). 또는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 율법주의자들과 한편이 되어, 이방인의 전도자가 되지 않았더라면, 엄청난 핍박을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행15장/21:17이하). 그러나 그는 “내게 무슨 일을 시키시려나이까”(행9:6)라고 물었었고, 그것은 그의 진정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그들 자신의 눈으로 볼 때에는 지혜롭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사실 그들이야말로 어리석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지혜와 세상의 기준에 의존함으로써 미련한 자처럼 행동했습니다. 영적으로 지혜 있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미련한 자가 되어야 했습니다(3:18).

강한 자와 약한 자(4:10중반절)
바울에게도 자신이 강함을 자랑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자신이 귀중하다고 여기던 것이 사실은 아무런 쓸모도 없는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빌3장). 바울은 자신이 겪은 개인적 고통을 통해서, 자신의 영적 강함을 개인적인 약함의 결과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고후 12:7-10). 스스로 강한 줄 아는 것이야말로 약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약함을 아는 것이야말로 강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의 영적 업적들을 자랑했습니다. 교회 내의 분파들도 각각 자신의 지도자나 좋아하는 설교자들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다 그들의 약함을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만 우리는 강해집니다.
(고후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 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존귀한 자와 비천한 자(4:10하반절-13)
이 말은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에게서가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저명한 사람들과 관련을 맺음으로써 그 사람들의 명예를 자기 것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하길 “너희가 우리와 교제하기 원한다면 고난받을 준비를 해야 한다 우리 사도들은 사람들로부터 존 귀히 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멸을 받는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자신이 당해야 했던 경멸과 고난을 설명합니다. 바울이 손수 천막 만드는 자로 일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비천한 자로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헬라인들은 육체 노동을 경멸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울은 사람들의 경멸에 어떻게 대처해 나갔는가도 설명합니다. 그러한 자세 그 자체가 그를 위대한 인물로 만드는 데 일익을 담당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는가는 그들이 우리에게서 어떠한 자세를 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후욕을 당했을 때 그들을 축복하였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하라신 대로 순종한 것이었습니다(마5:44). 또 핍박을 당했을 때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것을 견디었으며 결코 앙갚음을 하지 않았습니다. 비방을 당했을 때는 오히려 친절히 권면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모든 일에 있어 바울은 사랑으로 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사람들은 오히려 그를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취급했습니다(4:13). 바울의 대적 자들은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하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행22:22). 바울과 다른 사도들은 그들의 주님과 똑같이 비천한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변호하셨으며 당신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충성스러운 섬김과 겸손한 마음, 이 두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청지기들이 갖추어야 할 중요 성품입니다. 청지기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꺼이 일하며 기꺼이 고난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충성한다는 것과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는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의 경우 충성보다는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해 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충성스럽다는 것은 마음에서 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결정은 곧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마음으로부터 나온 정성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바울을 없이하자 살려 둘수 없다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쓰셨던 것처럼 비록 사람들에게 비천한 구경거리가될지라도 하나님께 쓰임받는 겸손을 구비하시기 바랍니다.

3.아버지-자애로움(4:14-21)
(스승이기 보다 아비)
앞서 바울은 지역 교회를 하나의 가족에 비유하였습니다(3:1-4). 그러나 이제 바울은 “영적 아버지”로서의 사역자를 강조합니다. 본문 외의 어떤 서신에서도 바울은 자신을 “아버지”라 칭한 적이 없습니다. 바울은 마태복음 23장8-12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 서신에서 스스로를 “영적 아버지”에 비유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고린도 교회를 위해 행했던 중요 사역들을 상기시킵니다.

첫째로, 바울은 그 가족의 터를 닦았습니다(4:14-15).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바울이 믿음 안에서 사랑하는 자녀들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에로 인도하는 기쁨을 누린다면 우리도 사람의 영적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 부모가 된다 해서 그 사람의 신앙에 대해 어떤 특별한 권위가 주어진다는 것은 아닙니다.(고후1:24)“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다만 하나님께서 그 어린 성도를 장성시킬 때 이용하실 수 있는 특별한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뿐입니다. 지역 교회 역시 하나님의 가족으로 새로 태어난 성도들을 양육할 책임이 있는 하나님의 가정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인들을 회심시킨 공로를 자신에게 돌리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린도인들의 영적 출생은 오직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사역을 통해 거듭납니다(벧전 1:23-25/요3:6) 바울은 곁에서 그 출생을 도운 “아버지”일 뿐이었습니다.

한 아이에게는 많은 지도자와 선생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한 사람입니다. 부모와 저녀의 관계에는 다른 어떤 관계도 앗아갈 수 없는 특별한 무엇이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시에 오기 전에 그곳에는 교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교회의 제 2세기의 성도들 역시 바울의 헌신적인 사역의 열매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터를 닦았습니다. 아볼로는 그 뒤를 이어 그들을 가르쳤습니다. 또 성경이 분명히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베드로도 고린도에서 사역하였을 것입니다(베드로 자신이 직접 고린도 교회에서 활동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에선 파송된 교사들이 베드로의 대사로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가르쳤을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서로 다른 여러 명의 교사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자녀들은 자신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 “영적 아버지”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둘째로, 바울은 그 가족의 모범이었습니다(4:16-17).
자녀들은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간에 그들의 부모를 닮습니다. 한 연구 보고서에 의하면, 십대의 청소년들은 친구들로부터가 아니라 가정에서 음주를 배운다고 합니다.
본받는 자(followers)라는 말의 문자적 의미는 “흉내내는 자”(minics)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7절에서도 동일한 훈계를 주고 있지만, 우리는 바울이 그 자신을 높이고 있다.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어린 아이들은 처음에는 본보기를 통해서 배우고, 그 다음에 설명을 통해서 배웁니다. 고린도 교히에서 사역할 때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사랑, 그리스도께의 헌신, 충성된 봉사 등의 모범을 보여 주었습니다
(고전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본을 따르는 바울은 그 자신이 하나의 훌륭한 본보기였습니다.
또한 바울은 훌륭한 교사이기도 했습니다. 어린아이를 성숙시키는 데는 모범을 보이는 것과 동시에 훈계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바울은 역시 자신의 영적 자녀 중의 하나인 디모데를 고린도 교회로 파송하였습니다. 디모데가 고린도 교회에서 해야 할 일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바울이 항상 가르치고 실행하던 가르침을 상기시키는 일이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편지를 가지고 가지는 않았지만(16:10). 그 편지를 보낼 길을 예비하기 위해 먼저 고린도로 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엔 이러한 기준을, 저 교회에서는 저러한 기준을 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방법은 서로 다를지 모르지만 (빌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 근본적인 원리와 교훈은 항상 동일합니다. 오늘날의 교회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떠나 그것을 인간의 지혜로 대체했기 때문에, 가르침에 있어 각 교회마다 심각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인간은 “기록된 말씀”(4:6) 밖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이는 교회의 분열을 낳았습니다.

셋째, 바울은 그 가족을 신실하게 징계했습니다(4:18-21)
어린아이의 잘못된 생각은 꺾여져야 합니다. 그러나 어린 아니의 의지 자체를 꺾어서는 안됩니다. 길이 들여지지 않은 망아지는 위험하며 별 쓸모도 없습니다. 그러나 일단 길들여지면 온순하고 유용한 동물이 됩니다. 교만은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교회에 아주 무서운 해독 요소입니다. 죄라는 누룩은 고린도 교회에 퍼져(5:6-8),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방자하게 만들었으며 그들은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고 말하기까지에 이르렀습니다
(고후10:8)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파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고후10:9) 이는 내가 편지들로 너희를 놀라게 하려는 것 같이 생각지 않게 함이니 (고후10:10) 저희 말이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하니 (고후10:11) 이런 사람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들로 말하는 자가 어떠한 자이면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자도 그와 같은 자인줄 알라
바울은 그들의 방자함과 불순종을 잘 참아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을 견책할 시간이 되었음을 경고합니다. 아량있는 현대의 어미니들은 자식들이 잘못할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다음 번에 용서 못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신실한 부모들은 자녀들을 징계합니다. 자녀들을 가르치고 모범을 보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부모에게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자녀들은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잘못을 온유하고 부드러운 방법으로 처리하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태도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방자해 있었고 자신들의 불순종을 자랑삼아 떠벌이기까지 했습니다(5:1-2)
본문에는 말과 능력, 말과 행함이 대조되어 있습니다. 교만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어린아이들이 흔히 그러는 과장된 말을 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행함으로 뒷받침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말뿐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말을 능력과 행함으로 뒷받침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능력과 그의 행함은 고린도 사람들의 죄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본문은 지역 교회의 잘못에 대한 징계 문제를 다루고 있는 그 다음 두장(章)과 연결되는 전제 부분입니다. 고린도 교회 내에서는 많은 죄악들이 자행되고 있었고, 바울은 그 죄들을 징계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문제에 관해 이미 편지를 쓴 일이 있었습니다(5:9).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그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영적을고 좀더 각성되어 있었던 몇몇 사람들이 바울과 접촉을 갖고 이 문제를 의논했습니다(1:11/16:17). 또 고린도 교회의 몇몇 지도자들은 편지로 바울에게 조언을 구하였습니다(7:1). 바울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편지를 썼고,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그 편지의 내용에 순복하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스,스로를 통재하지 않으려 하는 자들은 타인의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인생의 한 원리입니다. 보험회사와 교통 문제 전문가들은 차를 탈 때에는 반드시 안전 벨트를 착용하라고 권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안전 벨트를 착용하지 않습니다. 결국 정부가 안전 벨트 착용을 법으로 규정했습니다. 그 결과 안전 벨트를 착용하지 않는 운전자들은 법에 의해서 처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교회의 질서를ㄹ 유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다음 장에서 바울은 지역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제되어야 하는가를 설명합니다. 그런데 불행스럽게도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권고에 즉각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그로 인해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급히 방문해야 했습니다. 그 방문은 바울에게 참으로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고후2:1/ 12:14/ 13:1). 그러자 바울은 그들에게 매우 강경한 어조의 편지를 써보냈습니다

(고전7:8)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고전7:9)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고전7:10)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고전7:11)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고전7:12)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며

그 편지는 디도 편으로 전달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바울의 편지로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은 대부분 해결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물론 여전히 처리되어야 할 문제들이 남아 있었지만(고후12:20-13:5).

(고후12:20) 내가 갈 때에 너희를 나의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너희의 원치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하며 또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중상함과 수군수군하는 것과 거만함과 어지러운 것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고후12:21)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치 아니함을 인하여 근심할까 두려워하노라 (고후13:1) 내가 이제 세번째 너희에게 갈터이니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고후13:2)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 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고후13:3)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저가 너희를 향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고후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고후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이제 고린도 교회의 위기는 사라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자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하든지, 사역자들은 청지기로서 그 주인에게 충성해야 합니다. 사역자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또 영적 자녀들이 마음을 상하게 하여, 그들을 징책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충성된 종들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그들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로 뒷밭침해 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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