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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사 (삼하 06: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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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표준, 인간 다움을 결정하는 표준, 행복을 결정하는 기본적인 요건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幸福이라고 할수 있고, 다른 말로 하면 福이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복을 받는다는 것, 복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제일 처음 창조하시고, 인간과 가장 먼저 관계를 맺으실 때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지신 문제는 바로 복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나님은 인간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찾아 오셨고, 인간은 하나님 앞에 복을 받기 위해서 섰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최초의 만남입니다. 그런의미에서 구약 성경에는 이 복이라는 단어가 대단히 나옵니다. 400번 이상 나옵니다. 福 福 福!!! 계속 나옵니다. 이 복의 개념이 신약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자로 등장합니다. 인간은 복은 받는 자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또한 복을 받지 못하면 그 받지 못하는 책임도 인간 스스로가 져야 한다는 것도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신명기 30장 15절을 우리가 참고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 길을 놓아 두셨다] 고 선언했습니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한길입니다. 사망과 화-다른 한길입니다. 이 두길을 네 앞에 두었나니 복을 받는 길을 두셨는가 하면 화를 받을 수 있는 길을 두셔서 사람으로 하여금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하셨습니다.

누구나 다 복을 원하는 자는 복 받기를 추구할 수 있다는 이야깁니다. 미국헌법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모든 시민은 살 권리가 있고, 모든 시민은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이 헌법 정신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런 성경의 흐름과는 對照的인 것이 우리 동양의 사고방식입니다. 팔자타령을 많이 합니다. 탓의 文化에 우리가 익숙해 있어서, 누구탓,누구탓을 합니다. 그래서 책임 전가를 잘 시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복을 받는 것도, 내 책임이요, 복을 받지 못하는 것도 내 책임입니다. 내가 추구할 권리가 있는 반면에 내가 선택할 자유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을 받고 행복을 누리고 싶어 하는 마음은 절대로 잘못이 아닙니다. 잘 살아 보려는 마음을 가지는 것, 절대로 죄가 아닙니다. 저도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좀 행복하기를 원하고 잘살아 보기를 원하지 지지리 고생이나 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복이라고 말할 때에는 영적인 복이냐, 육적인 복이냐를 너무 지나치게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 안에는 영적인 축복이 가득히 있는가 하면, 육적이 축복도 가득히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계의 하나님입니다. 그렇다고 물질계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영계의 하나님인 동시에, 물질계의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 축복하실수 있는 능력을 가지심과 동시에 육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육신이 살아 갈 때에 필요한 모든 축복도 주실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단지 신약시대의 차이점이 있다면, 영적인 축복을 육적인 축복보다 앞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축복을 앞세웠다고 해서,육적인 축복을 무시해도 된다는 것은 성경의 정신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둘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왕 예수 믿을 바에는,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성경에 약속하신 것은 일단 받고 싶어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성경을 보면 얼마나 복에 대한 말씀이 많아요. 그것들을 모두 받아야 겠다고 간절한 마음을 갖는 것이 오히려 무관심한 사람보다 훨씬 낫다고 봅니다. 스스로 배가 불러 가지고 하나님이 뭐 대단한 것이 있느냐 하나님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고 말하는 사람 보다도,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면 나는 어떻게 하든지 받아 보겠다. 하는 갈망을 가지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이 기뻐 하시는 태도라고 봅니다.
이와같은 태도를 가진 사람을 우리는 본문에서 보게 됩니다. 다윗이라는 사람입니다.

오벳에돔의 집에서 법궤를 모시고 3개월을 살았는데, 그 법궤를 모신 오벳에돔이 큰 축복을 받았다는 말을 다윗왕이 듣자말자 못 견뎠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일이라면 둘째 가라면 싫어하는 성격을 가진 다윗이었기 때문에 아니, 오벳에돔이 받은 축복이라면 내가 왜 못 받겠느냐 고 생각하고는 지체하지 아니하고 가서 법궤를 모셔오는 다윗을 보게 됩니다.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예수 믿고 누가 복을 받았다고 하면 나도 좀 받을 수 있는데.... 그 사람이 어떻게 해서 복을 받았나. 나도 좀 그렇게 해보자. 이렇게 좀 마음을 갖는 것이 자기를 위해서 좋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는 세상 사람들 한테도 좋은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모두 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 두 사람을 앞에 놓고 배우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오벳에돔이라는 사람을 본 받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오벳에돔이라는 이름이 3번 정도 나오는데 그 때마다 복 받는 것과 관계되어서 나옵니다. 삼하 6:11, 역대상 13:14, 역대상 26:5-이 곳에 오벳에돔이라는 이름이 나오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복을 주셨는니라.고 나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 세상에서 신분이 대단하고 호화찬란한 생을 살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사람은 제사장 가문에 소속된 평범한 집안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여호와의 법궤를 위해서 성소를 만들었을 때, 그 성소를 지키는 수위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집안의 68명 전체가 성전을 지키는 수위가 되었습니다. 뭐 수위라고 하면 대단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무든 말이 따라 나온지 아세요.-하나님께서 오벳에돔의 집에 복을 주셨느니라. 하고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복이라는 것이 사람이 보기에 화려한 것이 복이라고 성경은 말하지 않고요. 인간이 보기에 부러운 무엇을 가지고 복이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보실 때에, [너 복 받았어!] 하면 그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축복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오벳에돔 가정이 그래요.

그런데 그가 이 축복을 받은 것이 얼마나 두드러진 일이냐 하는 것을 우리가 알기 위해서는 아비나답이라는 사람하고 비교하면 잘 나타납니다.
아비나답은 삼상&:1-2절을 보면 20년 동안을 집안에 법궤를 모시고 산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성경에는 20년이라고 말 했지만, 성경의 기록 이후의 기간까지 합하면 40년 동안 아비나답의 집에 법궤가 있었다고 성서학자들은 말합니다. 그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비나답에 대해서는 복을 받았다는 말을 성경이 전혀 하지를 않습니다. 모르겠어요. 복을 받았는데 성경이 기록을 안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것을 그대로 믿을 진대는 아비나답은 40년 동안 법궤를 모시고도 복을 받지 못했는데, 오벳에돔은 3개월 만에 그와 그의 권속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셨습니다.

어느정도로 오벳에돔의 가정이 복을 받았느냐 하면 이스라엘의 사학자 요세프스는 법궤가 오벳에돔의 집에 들어 갈 때에는 그가 제일 가난한 집이 었는데, 법궤가 3개월 후 그 집에서 나올 때는 가장 부잣집이었다.고 그랬습니다.
아비나답과 오벳에돔을 비교해 보면 이것은 대단히 충격적입니다.
심지어 아비나답의 집에서 오벳에돔의 집으로 법궤를 모시고 올 때에 아비나답의 아들이 법궤를 잘 못 다루다가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40년 동안 섬긴다고 하고, 하나님의 법궤를 모셨던 집안에서 오죽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을 모시는 법을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았으면 그 아들이 길에서 죽는 참사가 일어 나겠어요. 그러니 아비나담이라는 집을 대충 짐작을 할 수가 있어요! [그저 하나님의 법궤를 집안 모시라니까 마지 못해 모셔 놓은 것이지, 집안에 법궤가 있어도 별 관심도 없었고, 자녀들에게 그 법궤가 무엇이며 어떻게 모셔야 된다고 철저히 가르치지도 않았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40년을 모셔도 어떤 증거가 안 보이지요.

여러분! 법궤가 무엇입니다.
출 25:22절을 참고하면-법궤는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존잽니다. 하나님은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보기를 좋아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여기 계신다] 하는 증거물로 주신 것이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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