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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응답받는 기도 (느 0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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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나은 아주 훌륭한 기독교 지도자 가운데 F.B.마이어라는 유명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분의 생애의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분이 한번은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마이어 목사님이 타신 것을 알아본 크리스찬 선객들이 목사님께 부탁해서 선상예배를 인도해 달라고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광고가 나가고 마이어 목사님이 예배를 인도하시고 예배를 드린다. 소식을 듣고 한 그리스도인이 무신론자 친구 한명을 권면해서 그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이어 목사님이 기도의 응답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시게 되었습니다. 예배가 끝난후 이 무신론자 친구를 예배의 자리로 인도했던 사람이 궁금하잖아요. 그래서 설교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난 절대로 기도의 응답이라는 것을 믿을수 없다 말도 안되는 소리다 이것이 무신론자의 반응이었습니다. 나는 기도의 응답을 절대로 믿을수 없다. 예배후에 갑판위를 두사람이 거닐다가 한 부인이 창백한 안색으로 안락의자에 앉아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갑자기 이 무신론자 친구가 부인곁으로 다가가더니 이 부인의 의자위로 펴져있는 그녀의 양손에 오렌지 두 개를 쥐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그리스도인 친구가 물었습니다. 당신 이 부인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아니 잘 모른다고 하면서 그냥 심심풀이 장난이라고 대답하더랍니다. 둘이서 한참 갑판 산책을 하고 이렇게 하다가 다시 이 부인곁을 지나게 되었는데 잠을 깼어요. 부인이 잠을 깨서 그 오렌지를 아주 맛있게 먹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무신론자 친구가 그에게 그 부인에게 접근해서 부인 오렌지 맛있게 드시네요 하니까 부인이 갑자기 손을 번쩍 들더니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렇게 대답했어요. 그러니까 이 무신론자 친구가 사실은 이 오렌지 두 개는 제가 부인에게 드린것입니다. 하니까 그 부인이 여전히 환한 미소로 아 그랬군요. 당신이 바로 하나님의 기도응답의 도구이셨군요. 이렇게 대답을 하면서 그다음에 사실 저는 배멀미가 너무 심해 갑판에 나와 기도했조. 기도하다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저도 평생 이상한 기도를 안하다가 그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오렌지 두 개만 먹고 싶습니다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기도응답의 도구이셨습니다.

그이야기를 전해들은 마이어 목사님이 이야기에 대한 사건에 대한 코멘트를 했어요. 이런 유명한 코멘트를 했어요. 그것은 기도를 비웃는 무신론자를 웃기시고자 무신론자를 사용하신 하나님의 유머다. 멋지조. 기도를 비웃는 무신론자를 웃기시고자 무신론자를 사용하신 하나님의 유머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도 유사한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신흥제국 페르샤의 아닥사스다 왕 1세는 느헤미야가 모시고 있던 왕이었던 이 아닥사스다 1세는 무엇보다 이스라엘 재건에 그리고 예루살렘 성 중건에 대해서 아주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왕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에스더 4장 에스더 4장을 읽어보시면 에스더가 아니라 에스라입니다. 에스라 4장 11절 이하 그래서 22절까지 보시면 특별히 22절에 예루살렘성을 중건하려는 시도가 느헤미야 전에도 있었어요. 그런데 그것을 반역의 의도로 해석한 나머지 그 성 중건 중지명령을 단호하게 내렸던 왕이 바로 아닥사스다 왕이었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느헤미야의 기도를 응답하시기 위해 예루살렘 성 재건에 가장 부정적인 왕을 기도응답의 도구로 쓰셨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유머라고 할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이 유머스런 사건을 통해 기도 응답의 비밀을 모든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아직도 최선의 기도응답을 기대할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응답받는 기도는 어떻게 드려지는 기도이어야 할까요. 응답받는 기도 그것은 어떻게 드려져야하는 기도여야 할까요.

첫째, 기도의 장애가 옮겨져야 합니다. 기도의 장애가 옮겨져야합니다.
기도응답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장애가 있을수 있습니다. 소위 장애요인들이 있을수가 있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장애는 기도하는 사람들 자신안에 존재하는 죄 문제라고 할수 있습니다. 혹은 기도 대상자의 삶속에 있는 죄문제가 기도응답을 방해하는 장애요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사야 59장 1-2절에 보면 자 이사야 59장 1-2절을 읽겠습니다. 다같이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하나님의 손이 짧아서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라 하나님의 귀가 둔하여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지 못하신 것이 아니라 기도의 장애가 있다. 너희 죄가 하나님과 너희의 사이를 내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이 감추어 지고 있다라고 이사야 선지자는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의 자리에 나아올때에 가장 중요한 것이 기도 응답의 장애를 옮기는 일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죄의 장애를 옮길수 있을까요. 그것을 성경은 자백이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자복이라고 말하고 신약적으로 말하면 자백입니다. 우리가 잘아는 요한일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르 깨끗케 하실것이요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진지한 죄의 자백 혹은 고백은 죄에서 우리를 깨끗케하며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힘없는 기도의 통로를 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는 기도를 시작하며 먼저 자신과 자기의 조상들의 범죄함을 하나님앞에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 6-7절입니다. 우리 같이 본문의 6-7절의 말씀을 우리 같이 읽겠습니다. 이제 종이 주의 종 이스라엘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이스라ㅇㄹ 자손의 주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나의 아비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여 주의종 모세에게 주께서 명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이게 죄의 자백이조. 그런데 그는 자기의 죄뿐만 아니라 조상의 죄를 자백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잘못해서 그런결과가 초래되었습니다. 그러나 또 이사람은 조상탓만 하지 않았어요. 거기에는 저의 책임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자신의 책임도 포함시켜서 그래서 나와 나의 아비집이 범죄하여, 그는 또한 자신의 좌와 악을 합리화시키거나 미화시키지 않습니다. 축소하지도 않습니다. 자 여기 7절에 보시면 심히 악을 행하였다고 그가 진지하게 죄를 대면하며 심각하게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모습을 볼수 가 있습니다. 그것이 진지한 자백의 모습이예요. 그것은 우리들의 자백과는 때때로 얼마나 다릅니까. 크리스찬 유머가운데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어떤 교인이 자기차를 주차할려고 주차장에 갔다가 차가 꽉찼으니까. 주차금지 된 곳에 차를 주차하며 양심에 꺼렸던지 한분의 아이디어로 창문에 메모를 남겼다고 합니다. 메모지에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15분간 이 근처를 돌았습니다. 주차안하면 직업을 잃을 것 같아 할수 없이 여기에 주차합니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크리스찬이니까. 그렇게 메모지를 써놨어요. 그래서 들어가서 자기의 일을 다 보고 나왔더니 자기 차위에 티켓이 순경이 발부하는 위반 티켓이 붙어 있었는데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 근처를 15년간 돌고 있습니다. 티켓을 드리지 않는다면 제 직업을 잃을 것 같아 할수 없이 위반 벌금을 드립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그 경찰도 아마 크리스찬이었던 모양이조. 이것을 우리는 관점의 차이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티켓을 띠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관점의 차이가 있어요. 우리가 죄를 볼 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래 자백이란 말은 희랍어에서 두가지 단어가 결합된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말한다. 하나님과 함께 말한다. 이것이 자백이라는 말의 본래의 희랍어의 뜻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죄를 보고 나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죄를 보고 어떤 것은 나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할수도 있어요. 그러므로 죄를 보시는 하나님의 관점에 동의하고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지하게 자백하는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적인 자백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진지한 기도는 우리의 죄를 자백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기도의 장애가 옮겨지기 때문입니다. 하나 기도의 장애가 옮겨질뿐만 아니라 동시에 기도의 통로가 열리는 것입니다. 기도의 통로가 열려요. 응답받는 기도를 원하십니까. 응답받는 기도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기도의 장애물을 옮기시기 바랍니다. 진지한 자백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자 어떻게 우리가 기도의 응답을 받을수가 있을까요.
두 번째로 기도의 근거를 주장해야 합니다. 기도의 근거를 주장해야 합니다.
응답받는 기도의 한가지 현저한 특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응답받는 기도에는 기도의 성경적 근거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 4:3) 야고보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한번,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정욕이라는 동기가 있을 때 그것은 기도의 응답을 받을수가 없다. 다시 말하면은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에는 잘못된 근거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기심이라는 욕심이라는 근거가 있을 때 응답을 받을수 없는 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의 성경적 근거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약속의 말씀은 결국 하나님 자신의 뜻이 펼쳐져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기도할수 있으나 그 기도가 응답받을수 없는 기복적인 기도인지 아니면 응답받기에 합당한 기도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기도의 근거인것입니다. 무엇을 근거로 기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가장 확실한 응답의 근거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기도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말씀을 알고 그 말씀을 믿고 붙들고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는 성경적인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바로 그렇게 기도한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8-9절 의 말씀 그것입니다. 다시한번 본문의 8-9절을 읽겠습니다. 8-9절 시작.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 흩을 것이요 만일 내게로 돌아와서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컨대 기억하옵소서 옛적에 주의 종 모세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여기서 느헤미야는 주님이 모세애게 약속하셨던 말씀을 주장하여 자기 민족의 회복을, 이스라엘의 회복, 예루살렘성의 회복을 하나님 앞에 도와달라고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적 기도의 가장 분명한 정의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방편 혹은 통로라고 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를 정의할수 있습니다. 자 우리가 중보기도 세미나할 때 자주 인용하는 말가운데 에스겔서 36장 36-37절의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이구절의 말씀에서 기도에 관한 가장 성경적인 정의를 얻을수 있다고 생각해요. 자 에스겔서 36장 36절 같이 읽습니다. 스크린에 나와있어요. 너희 사면에 남은 이방 사람이 나 여호와가 무너진 곳을 건축하며 황무한 자리에 심은 줄 알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이스라엘의 회복의 약속을 황무했던 그땅에 다시 심겨질 것이다. 그다음에 뭐라고 그랬어요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여기 주께서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시며 내가 이루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이루시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37절에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같이 내게 구하여야 할지니라. 여기 재미나는 말씀이 뭐예요. 그래도라는 말이예요. 주께서 약속하셨지만 그래도 주의 백성들이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이루겠다. 다시말하면 주님은 우리에게 약속해 놓고 우리가 기도하기를 기다렸다가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그 약속은 이루어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하는 방편인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통로다. 우리가 이렇게 정의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는 기도를 시작하면서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하며 기도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정말 응답받는 기도를 소원하신다면 하나님의 뜻을 알고 기도하는 백성들이 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을 가까이 하십시오. 성경을 자주 접하셔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기도는 성경적 기도가 되어갈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무엇을 기도하는가하는 기도의 내용입니다. 똑같이 자식들을 위한 기도라고 해도 그것이 기복적인 기도가 될 수 있고 성경적인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 자식들이라도 잘살아서 좀 떵떵 거리는 모습들을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기복적인 기도 그러나 성경을 아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내 자식이 이 부모의 자부심뿐만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식들 보고 싶습니다. 그들이 정의롭게 평화스럽게 이땅에 기여할수 있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들들로 자라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번 시험에 최선을 다할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단순히 자기의 부모의 욕심차리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기도한다면 그것은 성경적인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그 기도가 성경적인 내용이 되어가는 것이예요. 그래서 기도의 사실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기도의 내용이다. 기도의 내용이다라고 우리는 말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자주 사용하는 유머가운데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어떤 교인 한분이 앵무새를 샀는데 유일하게 한마디 하는 말이 키스해 주세요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놓고 황당한 경우들이 많아 이 앵무새에게 경건한 말을 가르칠 필요를 느꼈다고 합니다. 마침 어떤 목사님이 기르는 앵무새가 경건한 말을 잘한다고 해서 목사님께 훈련을 부탁했더니 목사님 댁에 그 앵무새를 보내라고 하시더랍니다. 그래서 교인 앵무새가 도착하자 목사님이 자기 앵무새장에 함께 집어넣었습니다. 목사님 앵무새가 먼저 인사를 하면서 다같이 기도하십시다. 하니까. 거룩하게 말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교인앵무새가 말을 합니다. 키스해주셔요. 그랬더니 목사님 앵무새가 그 말을 받아서 지금까지 한번도 안한 말을 했다고 합니다. 오 주께서 기도를 응답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뭘기도하고 있었어요. 우리가 기도의 한다는 사실이상으로 기도의 내용은 중요한 것 입니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약속의 말씀이 기도의 내용을 형성할 때 주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가. 그리고 얼마나 기쁨으로 응답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주님의 약속의 말씀으로 우리의 기도의 근거가 되게 하십시다. 그것이 바로 응답받는 기도의 비밀인 것을 믿습니다.

응답받는 기도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세 번재로 기도의 대상을 신뢰해야 합니다. 기도의 대상을 신뢰하셔야 합니다.
누가 기도의 대상입니까. 물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기도에서 당연히 하나님을 혹은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할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도 얼머나 자주 세상을 보고 사람의 눈치를 혹은 사람의 도움을 더 기대합니다. 기도는 하면서도 사실은 그사람이 나를 도와줘야하는데라는 사람의 도움을 기대하는 일들이 얼마나 더 많이 있어요. 이것은 하나님 바라보면서도 사람을 더 많이 바라보는 거조. 이것은 마치 하나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 메시지를 우리 자신안에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 아내가 저와 대화중에 제일 실허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제 아내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아내가 마찬가지일것입니다. 자기와 대화하면서 자꾸만 내가 다른사람 쳐다본데요. 제일 싫데요. 다른여자 쳐다볼 때. 제 아내는 전적인 관심을 전적인 주목을 받고 싶데요. 어느면에서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면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전적인 관심과 신뢰를 받고 싶어해요. 하나님의 가장 커다란 계명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주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것은 전적인 관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요구예요. 그렇습니다. 이것은 기도생활에서도 적용되어야 마땅할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러 나가면 하나님이 소망이시다. 하나님이 응답이시다. 하나님이 구원이시다. 이것을 믿는다면 정말 믿는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께만 전적인 소망을 걸어야 합니다.
지금 느헤미야의 경우 현실적으로 가장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이 있었어요. 그것은 아닥사스다왕입니다. 자기가 모시고 있는 아닥사스다 왕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가 모시고 있었던 그의 직업이 술관원이라고 그러조. 이 마지막 11절에 드디어 우리는 느헤미야의 직업을 말하는 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11절 맨 마지막에 그때에 내가 왕의 술관원이 되었었느니라 우리 한국경제가 한참 부흥할 때 회사마다 바이어를 대접하는 술상무가 있었어요. 그런데 이사람은 술장관이예요. 그렇다고 우습게 보시면 안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사람은 술을 관리하고 있었을뿐만 아니라 왕이 정말 신임하는 사람이예요. 그 술에 독약하나 넣으면 왕은 끝나잖아요. 신뢰하는 사람, 그왕의 식사를 시중드는 사람이었을뿐만 아니라 식탁을 놓고 왕과 대화하는 사람, 비서실장이예요. 일종의 비서실장이예요. 그러니까. 날마다 왕을 만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왕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으면 결재가 떨어지지 않으면 그는 자기의 자리도 이탈할수도 없고 이스라엘 땅에 돌아갈수도 없고 예루살렘성을 건축하는 그일에 자기 자신을 드릴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왕을 날마다 만나니까 왕한테 가서 얘기하면 될 것 아니예요. 그러나 그는 왕을 만나기전에 왕을 만나서 자기의 문제를 말하기 앞서서 먼저 지금 뭘하고 있는 것입니까. 먼저 지금 기도하고 있어요. 먼저 누구의 도움을 구하고 있어요. 먼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거조. 그는 왕의 결재를 받기에 앞서서 하나님의 결재를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는 기도 응답의 싸인을 받고 싶어한것입니다. 사람이 허락하더라도 하나님이 그 사람을 움직이셔서 허락하시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가 많이 듣는 말 가운데 인사가 만사다. 이런 말을 많이 듣습니다. 인사가 만사다. 인사가 만사다 이런말을 많이 하는데 그런데 저는 인사가 만사일뿐만 아니라 인사가 천사라고 생각해요. 사람의 일은 궁극적으로 하늘의 일인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는 거조.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을 움직이지 않으면 안되요. 여러분이 남편을 아내를 좀 바꾸고 싶으면 남편을 직접 바꿀려고 하지 마세요. 아내를 직접바꿀려고 하지마시고 저 위에 계신분에게 먼저 이야기 하세요. 그래서 하나님이 아내에게 말하도록 하나님이 남편에게 말하도록, 내가 기대했던 말이 남편과 아내를 통해서 나올 때 얼마나 기쁜일이예요. 그때 아 하나님이 응답하셨구나. 그것 알수가 있잖아요. 먼저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을 움직이시는 것은 궁극적으로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아닥사스다 왕을 통해 이 허락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11절의 기도를 읽어 보십시오. 다같이 11절 읽겠습니다. 11절 시작,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날 종으로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었느니라 여기서 그는 먼저 하나님 앞에 나가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사람을 움직여 이사람의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아닥사스다 왕을 움직이셔서 그의 신임과 허락을 얻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쉽게 이 문제를 왕에게 말하지 않고 기도만 계속했다는 것은 그가 궁극적으로 하나님만을 신뢰한 것을 보여 주고 있는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는 오늘날 기도생활을 하는 우리의 모습과 얼마나 다른 모습인지요.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하면서 우리는 자주 아니 더 많이 이세상이나 사람들의 도움을 구하는 것은 아닌지요. 제가 좋아하는 크리스찬 유머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언젠가 이야기 했을지도 몰라요. 어떤 청년이 산을 타다가 미끄러져 벼랑 끝 나무 위에 걸렸습니다. 결사적으로 나무 가지를 잡고 있는데 점점 힘이 빠져 갑니다. 할수없이 그는 하나님 앞에 도움을 구하기를 작정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하나님. 하나님 도와주세요.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와요. 안심하고 네손을 놓아라 내가 받아주겠다. 안심하고 네손을 놓아라 내가 받아주겠다. 그러자 그 청년이 소리를 치기 시작합니다. 누구 다른분 없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사람의 도움을 더 많이 기대하는 그런 모습들을 우리가 볼수가 있습니다. 시편기자에게 배우고 싶습니다. 저는 시편기자처럼 고백할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시편 62편 1-2절에 보시면 시편기자는 어느날 이런 놀라운 고백을 했습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 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그랬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분을 신뢰하십시오.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십시오. 그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아버지이십니다. 그의 자녀들을 자상한 사랑으로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전능하시고 전지하십니다. 우리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이유 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보여주시고자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이땅의 사역을 하시면서 이 하나님을 가르쳐 보여주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떠나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끊임없이 그는 아버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땅에 계신동안에 자신의 전부를 드렸습니다. 그예수님은 마침내 우리의 죄와 허물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어 이땅에 오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보배로운 피를 흘려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가는 길이 되게 하여주셨습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누구에게로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그예수그리스도를 나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사람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성경은 약속합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인 것을 확실히 믿는다면 또 아바지께서 우리의 기도를 분명히 듣는다고 믿는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그의 능력을 신뢰하시고 우리가 정말 기도의 삶을 살수가 있다면 왜 염려하십니까. 왜 걱정하십니까. 무엇을 두려워 하십니까. 그러므로 사랑하시는 여러분 이제 우리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십시오. 그분을 슬프게 했던 당신의 모든 죄를 자백하며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엎드리십시오. 그리고 이제 오직 그분만을 하나님만을 신뢰하겠다고 고백하여 보십시오. 하나님이 나의 소망이십니다. 사람이 내게는 필요하지만 인간관계는 중요하지만 나의 궁극적인 소망은 하나님 뿐이라고 고백해보십시오. 그때 여러분과 저의 황폐한 삶의 마당에 견고한 은혜의 성곽이 은혜의 벽이 쌓아 올려질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은혜의 성곽안에서 날마다 하나님의 응답하시고 신기한 놀라운 기도응답의 체험속에 한평생을 살아가게 될줄로 믿습니다. 그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의 도움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응답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그분을 찬양하십시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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