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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락방에서 받은 은혜 (행 01: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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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요한,야고보, 안드레와 빌립,도마와 바돌로매,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셀롯인 시몬,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토록 많은 인파가 따른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에게서 은혜를 받고자 한 것입니다. 병들고, 배고프고, 사회적으로 소외당하고, 버림받은 많은 사람들 이 예수님께 은혜를 받고자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은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병든 사람이 다 나은 것은 아닙니다. 소수의 사람이 은혜를 입었고, 예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은혜받을 사람을 찾아 다니십니다. 은혜를 받 아야 영광을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대땅을 거니실때 은혜받을 사람을 찾아서 사마리아와 여리고로 그리고 갈릴리 바다로 다니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베풀기를 원하셔서 은혜받을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서 최고의 은혜의 자리는 어디였습니까 유대땅에서는 예수님의 은혜의 자리가 많습니다. 오천명의 무리가 둘러앉 아서 떡을 먹던 자리가 있습니다. 포도주를 변화시킨 가나의 흔인잔치 집도 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린 베다니 마을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가장 큰 은혜를 받은 자라는 마가의 다락방이었습니다. 다락방에서 예수님은 최고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가의 다락방을 준비하도록 해서 거기서 유월절 만찬을 나누십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과 조용히 앉은 자리에서 떡을 주시면서 '받아 먹으라, 이는 내 몸이다.'하셨으며, 잔을 들고 축사하시고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홀리는 바 나의 언약 의 피다.'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마가의 다락방에서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이 자리는 보통 은혜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보통 때는 떡 주고, 병 고치고, 표적을 보이는 것이었으나 이 자리는 자기 생명을 주는 자리였 습니다.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3년 동안 택하시고 데리고 다니며 가르친 제자들에게 이 은혜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모습에서 우리는 은혜를 받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각각 은혜를 받습니다. 우리의 소원대로 성취되면 은혜를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소원의 성취는 다 잠깐입니다. 예수님께서 주기를 원했던 그 은혜는 바로 십자가의 구속의 사건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배웠습니다. 주님의 기적도 보고, 가르치는 것도 배우고, 그의 인격도 배우고, 도덕 양심도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안 되었습니다. 3년 동안 배웠으나 다 허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들에게 겸손하라 했지만 높은 자리를 탐했습니다. 섬기는 자로 왔다고 가르쳤으나 저들은 주님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고 따라다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이 배움으로 되는 것이 아니요, 은혜를 받아야 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은혜를 많이 받을수록 하나님에게 영광이 됩니다. 다락방의 사건은 중대한 교훈을 줍니다. 다락방에서 예수님은 십자 가의 사건을 계시하시면서 성찬을 나누셨고, 또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두려워 떨 때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하시고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 하셨습니다. 옆구리가 창에 찔리고 손에 못자국 난 것을 제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너회가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았거니와 몇날이 봇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은 다락방에 모여서 열홀 동안 금식하며 눈물로 기도할 때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 러므로 다락방은 제자들에게 은혜를 주기를 가장 원했던 곳입너다. 은혜 받으러 어디로 갈 것입니까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에게 주시고자 했던 큰 은혜를 결국 다락꽝에서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구속 과 부활 성령의 능력은 최고의 은혜요, 이 좋은 은혜를 다락방에서 받 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다락방에 모여서 은혜 받기를 바랍니다. 다락방을 영어 성경은 'upper room'이라고 했습니다. 위에 있는 방 입니다. 유대의 집 구조는 위에 다락방을 만듭니다. 그곳은 기도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방이었습니다. 살림하는 방 위에 있는 방이 다락방 입니다, 여기서 저들은 위에 계신 하나님의 복을 받고 하나님과 닌제하 고 기도했습니다. 이 방은 곧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락방에서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다락방은 교회입니다. 교회에서 은혜 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가장 은혜 주기를 원했던 곳은 어딥니까 다락방 입니다. 다락방은 은혜를 받는 곳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올 때 예버드 리러 온다고 생각하면 힘듭니다. 또 바치러 간다는 것은 부담스럽습니 다. 그러나 은혜받으러 간다고 생각하면 힘이 납니다. 여러분이 직장에 갈 때 일하러 간다고 생각하면 힘겨워집니다. 그러나 돈벌러 간다고 생각하면 편합니다. 교회에 갈 때 여기와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찬양하고, 기도하고, 힌금하는 것이 은혜받는 일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많이 받을수록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최대의 영광은 은혜를 많이 받는 사람이 되는 데 있습니다. 지난 주간부터 피택 장로님들을 위한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교육이라고 하면 힘듭니다. 은혜받기를 시작했습니다. 모여서 공부한다, 교육 한다 하지 않고 은혜받는다 하니까 아주 편안한 자리가 되었니다. 그리고 끝날 때 인사말을 '은혜받았습니다.' 하니 더욱 즐거운 시간이 되었습니다 첫시간은 장로 되는 목적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다. 장로로서 가장 큰 일은 은혜받는 것이라고 배웁니다. 장로는 목사님을 받들어 섬긴다는 화려하고 사치스런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 다.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를 위해서도 못사는 처시에 남을 위해 산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우리는 누구를 받들어 주고 살라고 태어난 사람들 이 아닙니다. 우리는 은혜받으려고 태어난 것입니다. '장로로서 가장 큰 일은 은혜받는 일이요.' 그랬더니 너무 좋아서 이런 말은 처음 듣 습니다.' 합니다. '처음 들어야 은혜지.'그래서 한신교회 오면 처음 듣는 소리가 많아 신기한 것입니다. 처음 듣는 소리가 많은 것은 위로 부터 계시를 받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지식으로 아는 것은 신기할 것 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라고 세우는데 못받으면 집사로 있 는 것이 낫습니다. 집사 때는 은혜를 받았는데 장로가 되어서 은혜 못 받는다고 하면 장로 안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의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은혜받으려 고 하는 것입니다. 일생동안 예수 믿는 것은 은혜받으려고 믿는 것입니다. 친회에서 직분 받는 것도 은혜받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하는 일 전체가 다 은혜를 받는 일입니다. 교회에 와서 은혜받지 못하면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신학생들이 많이 옵니다. 그리고 나에게 봉사하고 싶다며 부탁합니다. .여기서 봉사할 자리는 하나도 없네. 은혜받는 사람만 있을 뿐이네. 자네도 은혜받을 수 있으면 있고, 은혜 못 받으면 여기 있을 필요 없네. 예수님은 은혜받을 사람을 찾고 있다네.' 목사가 왜 여기에 서 있습니까 설교하라고 세웠습니까 설교는 무엇 때문에 하는 것입니까 은혜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은혜 받으라고 세운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직분이 목사직입니다. 그것은 은혜받는 데 좋은 자리입니다. 목사는 주일을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이 자리를 두고 어딜 가겠습니까 설교하고 성경 읽고 또 기도해야 합니다. 밤예배 빠질 수 있습니까, 새벽기도 해야지요. 헌금도 조금 해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하다보니 은혜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종은 은혜받는 일이 전부입니다. 은혜받는 일이 이 종의 목회입니다. 이 종이 수십년 목회하고서 깨달은 진리가 있습니다. 강단에서 수십년 사회와 민족을 말하고 이웃의 봉사와 행위를 강조하였으나 그것으로 안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너무 잘 아시기에 은혜반도록 한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은혜받는 일만 증거하고. 여러 분들이 은혜받도록 최선을 다하고 싶을 뿐입니다. 여기 올 때마다 은혜 받으러 오십시오. 은혜받고 가십시오. 그러므로 교회에서 하는 모든 일이 다 은혜받는 일입니다. 성가대의 찬양이 주일마다 너무 은혜가 되어 감사하고 눈물이 납니다 그런데 성 가데는 은혜받는 자리입니다.은혜받는 대로 고백하는 음성이 '찬양'입니다 은혜받은 것 없이 부르는 것은 '노래'일 뿐입니다.그러므로 성가 대원은 은혜를 많이 받아야 찬양을 잘 할 수 있습니다. 성가대는 가수 가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은혜를 많이 받아야 그 은혜 때문에 그 찬양으로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수고'라는 말을 해서는 안됩니나.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수고하는 벌이 생겼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 수고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하는 인류에게 은혜로 살도록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 러므로 교회에서는 수고라는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설교한 목사님에게 수고했다고 말하면 기분 나쁩니다. '은혜받았습니다'해야 됩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또 성가대 찬양에 수고했다는 인사 는 큰 실례가 껍니다. 우리 성도는 수고하는 인생이 되지 않고 은혜받 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며칠전 우리 교회에서 서울 남노회 사회부가 주관하는 세미나가 열 렸습니다. 강사님이 젊은 날에 빈민촌에서 한 헌신적인 목회는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은혜가 되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한 후배가 오더니 목사님,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하기에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하늘이 준 그토록 큰 은혜를 수고로 생각했으니 답답한 일이라 생각되었습니다. 제가 즉시 '오늘 은혜가 넘겼습니다.'하였습니다. 조금 있다가 목사님께서 '빈민촌에서 고생 많으셨습니다 '하기에 '은혜를 모르는 종이니 안되었구나.'하였습니다. 그 목사님은 빈민촌에서 고생한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가 고생했으면 수고로 끝날 것이지만 은혜를 받았기에 세계적인 목사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가난하게 살든 부하게 살든 지금 은혜받고 있다 할때만 하나님과 관계가 있고, 거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은혜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선한 행동을 하거나 가난 한 자를 구제하는 일이나 정의를 위해 고난을 당하는 일도 은혜받고 있 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일들이 은혜로 받는 일이 되지 않으 면 힘겨운 고생이 되어버럽니다. 그러므로 전삶이 은혜가 되어야 합니다. 은혜를 받지 못하는 일은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 교인 가운데 한 집사님께서 친구로부터 받은 큰 돈을 어제 예배 시간에 은혜가 되어 바친 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은혜를 받았다고 기뻐했습니다. 이 여종은 헌금을 바치며 은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도 은혜가 되었습니 다 우리는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은 좋은 것을 많이 보여주 셨습니다. 신적인 권능을 보여주셨습니다. 배고픈 자에 게 먹여주셨고 외로운 자를 위로해주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좋으신 하 나님을 많이 보이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로 올라갔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좋으심을 보이셨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보여주셨습니다. 여기에서 참 좋으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물론 전능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땅에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 주님은 좋으신 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떡을 얻어 먹으면서 예수님이 좋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다시 배가 고팠습니다 하루는 좋았는데 그 다음날은 아니었습니다. 병을 고침받은 사람들이 좋으신 예수님을 찬양했는데 다시 병이 들었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다 살아나서 주님의 좋으심을 찬양했으나 결국은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랑도 좋으신 주님을 오래 찬양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좋으신 예수님을 끝까지 찬양할 수 있는 자리는 십자가에서 만난 예수님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를 만난 사람만이 어느 때나 찬양할 수 있습니다. 좋으신 예수님이라고 고백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좋으신 예수님을 십자가 위에서 만나십시다. 예수님은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좋으신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보여준 예 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한 일이 뭡니까 자기를 죽이는 일이었습니 다. 좋으신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죽이려고 보냈습니다. 예수님은 좋으신 예수님이 되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러 왔다고 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좋으신 예수님이 되었고, 좋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날 때 십자가 위의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여기에서 좋으신 예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나에게 좋으신 예수님은 날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어. 아 주님, 그 은혜 고마워라.' 눈물을 홀립니다. 이 가운데 눈물 한 방울도 못홀린 사람도 있올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주님께서 나에게 베푼 은혜가 너무 커서 눈물을 흘리면서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십년을 믿고, 이십년을 믿어도 자기 예수로 만나지 못한 분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땅에서 죽 었는데 '나를 위해 죽었다'고 그떻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를 위해 죽었으니까 지금 이대로 살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죽었는데 이대로 살게 되니 무슨 재미가 있습니까 우리의 믿음은 아무 재미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종에게 교인들을 잘못 가르친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죽은 것이 아니라 나를 죽이러 왔습니다. 이 은혜를 받아야만 자신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세 전에 나를 택한 것은 나를 죽이려고 택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은 나를 죽이려고 거기서 죽은 것입니다. 이것이 성서가 준 계시적 은혜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 흔자 죽는 것은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나 십자가 위에서 예수와 함께 나를 죽이면 그 다음에 예수와 함께 부활하게 됩니다 오늘 이 시간 나를 위해 죽었다는 말은 틀립니다. 나를 죽이려고 왔고 나는 그때 죽어야 사건이 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장 큰 은혜가 뭡니까내가 '죽고 사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살리기 위해서 베푼 최고의 은혜가 십자가의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나도 죽고, 다시 살아야 최고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별세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이 몸은 이대로는 안됩니 다. 왜 안됩니까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죄인은 몸, 정 욕의 몸은 일백년 가르쳐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정욕은 죽여야 됩니다. 그러므로 만세 전에 택했다고 하는 말은 나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죽이려고 택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죽고, 함께 살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었고 부활했습니다. 이 사건을 체험했던 사람들이 누굽니까 다락방에 모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3년동안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서 배워도 안되었 는데 다락방에 모여서 성령의 능력을 받고는 되었습니다. 주의 성령의 능력이 임함으로 십자가에서 자기를 죽였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이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보라 이제 새 것이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 다락방에 모였던 성도들은 최고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 와서 예수님에게서 시시한 것만 얻어가지고 돌아가서는 안됩니다. 이런 신앙 상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외로우면 위로받고, 말씀 듣고 깨닫고, 문제 생기면 해결하려고 기도하고 이렇게 평생 살다가 끝나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다락방으로 가야 합니다. '너는 죽어야 한다. 그리고 네 속에서 예수가 살아야 한다.' 이 사건은 노력으로 안됩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부활도 보았습니다. 그 상처도 확인했습니다. 그럼에도 저들은 갈릴리로 갔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자기들과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고서야 예수 죽음이 내 죽음이 되고, 예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보 마가의 다락방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을 제자들에게 재확인시기는 참으로 놀라운 사 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길은 다락방에서 끝났습니다. 예수넘께서 떡과 잔 을 주면서 제자의 길은 이것이니 먹고 끝내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 서 3년동안 데리고 다니면서 가르쳤는데 결국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찬을 들고 졸업식을 했습니다. 제자들의 졸업식장은 다락방이었습니다. 그들은 졸업하고 나서 방황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시 입학하라' 하여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다시 모여서 입학식을 하는데 그 입학식이 바로 성령의 입학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3년동안 데리고 다니면서 가르치고, 훈련시키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끝냈습니다. 그리고 다시 다락방에 모여서 성령을 받고 증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한 것입니다. 졸업과 입학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입학입니까 이제는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예수님에게 는 배울 것이 없습니다 배워가지고는 안됩니다. 오직 죽는 길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돌감나무를 갖다가 심어놓고 물을 주고, 좋은 비료를 삭고 가지를 만져 '참감나무 되어라 참감나무 되어라' 해도 안됩니다. 그것을 사정 없이 잘라 버려서 죽이고, 참감나무를 접붙이니까 비료도 물도 없이 그 냥 그대로 참감나무가 되었고, 참감나무 열매가 맺히게 피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가장 증요한 사건은 뭡니까 그것은 마가 다락방의 사건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성령을 받아야 그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 사건이 없이 예수 믿는 것은 고역입니다. 그래서 3주일 나오 다가 2주일 빠지고. 이번 주일 나오다가 다음 주일은 놀러갑니다. 이렇게 믿으면 일생동안 수고롭게 예수를 믿는 것이 됩니다. '예수를 믿는 목적이 뭐요 은혜받는 것입니다. 은혜받아 둬할 것입니까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 예수 믿으면 행복해지는 것입니 다. 은혜를 받으십시오.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께는 영광, 나에게는 행 복이 됩니다. 그러면 행복은 어디에 있습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기도하다가 문제가 해결되면 은혜받았다고 해서 그 순간에는 기쁩니다. 그러나 또 문제가 있습니다. 배고픈 사람은 밥을 먹어야 행복합니다. 굶주리고서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날마다 행복한 사람은 자기를 죽인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로 사는 사람은 사도 바울처럼 감옥에서도 '예수가 내게 계시니 시험이 와도 좋네.'하며 행복을 누립니다 예수가 내게 계신 사람은 세상이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습니다. 자기 속에 계신 예수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자기가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을 순교자라고 합니다. 그들은 자기 죽음을 선언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은혜를 입으면 밥을 먹는게 성찬이 요, 입는 옷이 성의요, 밟는 땅이 성지요, 저들의 사는 집이 천국이 됩니다. 이떻게 살자고 은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은혜받으라는 것을 짐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행복하라고 은혜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은혜를 받아야 애수 믿는 사람으로서 사는 맛이 납니다. 예수를 믿어도 온도계처럼 날씨가 더우면 올라가고, 추우면 내려가서는 안됩니다. 이제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서는 안됩니다. 세상은 어떻게 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그것으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사도들과 같이 바울과 같이 스데반과 같이 살아야 합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은 그때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죽었 습니다. 그러니까 돌로 쳐죽인다고 하더라도 자기는 죽는다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대로 산다고 하면서 웃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예수 믿다 가 죽으려고 하면 이제 나는 죽는구나 하니 슬프고, 죽는 것을 불행으 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순교자가 아닙니다. 순교자가 2천년 교회사에서 수없이 많았습니다. 순교자는 십자가에서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고 예수가 살기 때문에 지금 저들이 나롤 죽이면 나는 영원한 예수와 함께 살게 되었구나 하며 죽음의 관문을 통과하는 은혜로 받기 때문에 웃으면서 가는 것입니다. 한번 지금 연습해 봅시다. 지금 위대한 스데반이 됩시다. 여러분들은 지금 돌로 맞는다고 생각하고 순교하는 심정 으로 한번 웃어보십시오. 믿지 않는 남편이 술을 먹고 자기를 폭행하고 욕할때 같은 심정으로 분노를 느끼고 있으면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순교한 사람은 자기는 죽고. 이 속에 예수가 살기 때문에 저쪽에서 육신의 악합으로 오면 이쪽에서는 큰 예수가 나갑니다. '오 주여' 그러면서 최대의 예수를 나타내는 자리가 바로 순교하는 자리입니다. 저쪽에서는 최대의 악이 오면 이쪽에서는 좋은 예수가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대의 영광의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다락방에 모이는 것은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많이 죽을수록 은혜가 니다. 적게 죽을수록 은혜가 적습니다. 이 종이 목회하면서 다락방의 은혜를 받은 때가 있었습니다. 그 날은 이 종의 생애를 바꾸는 놀라운 날이었숩니다. 주일 설교를 준비하고 있 던 토요일 오후였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로 본문을 정하고 설교 를 쓰려고 펜을 었으나 몇번이고 종이를 버린 채 성전에 가서 무릎을 었습니다. 이때 성령님께서 잠잠히 이 종의 심령을 울려 주었습니다. H너는 이 말씀으로 설교하지 못한다. 너는 이 말씀으로 설교하고는 죽 게 된다.W 이런 생각이 스쳐서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의 설교 내용은 언제나 저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심령 속에 확신없 는 것은 설교하지 못합니다.이때 성령님은 '너는 죽었구나.'라고 고백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 이후로는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있는 것을 확 신하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말씀이 사도 바울의 고백이 아니라 나의 고백이 되게 하셨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나는 죽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다(오직 예수뿐이다)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별세의식으로 산다)
이 말씀에서 이 종은 죽음을 선언하고 내 안에 부활한 예수로 사는 별세의 은혜를 맛보았습니다. 그 이후로 나 자신이 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동안 교인 가운데서 싫은 사람도 더러 있었습니다. 인색하고 불층한 교인들을 보면 책망하고 싶었습니다. 말씀으로 때려주고 싶었 습니다. 그러나 이제 교인들을 보면 사랑스럽기만 합니다. 저들의 부족한 신앙을 책망하고픈 마음이 없고, 안타깝게 여겨지고 은혜받도록 가 르쳐주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별세의 은혜갇 참으로 놀라운 것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별세의 은혜를 받은 이후로 나 자신이 새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누가 알아 주든지 않든지 문제될 것이 없고, 세속의 시시한 것에서 자유할 수 있는 큰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나 자신이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한 대로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것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입만 열면 예수가 나오고 하늘을 보나 세상을 보나 예수 그리스도가 증언되고 성서에 언제나 예수가 살아 움직이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놀랍도다. 하나님의 은혜여, 이 시간 임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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