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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함께 하는 사역의 원리 (느 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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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회사 가운데 크리이슬러라는 회사가 있습니다. 이 회사는 한때 도산 직전까지 몰려 있던 회사인데 탁월한 인재한사람을 차용하면서 경제의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이때 바로 영입되었던 사람이 바로 리 아이아코카(Lee Iacocca)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경영의 귀재, 경영의 진이어스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어는 신문기자가 찾아와 그의 경영의 철학을 물었습니다. 경영의 철학의 비밀을 물었습니다. 그때 그는 그가 가지고 있던 철학 영어로 P자로 시작하는 영어 단어 3개를 써서 표현을 했다고 합니다. 다 세 단어가 P 자로 시작하는데 첫째가 1)principle(원리 혹은 원칙) 2)practice(실천) 3)persistence(일관성 혹은 집중). 원칙을 세우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되 일관성있게 집중적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나라의 국가 경영에도 자주 원칙이 뭐냐 그리고 일관성 있게 그렇게 하느냐 여론에 혹은 미디아에 우리주변에서 늘 회자되는 것을 우리는 듣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기자가 리 아이아코카(Lee Iacocca)에게 이 원칙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물론 순서대로겠지요. 원칙을 세우는 것이 제일 중요하고, 리더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원리를 분명하게 세우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건강한 리더십의 이상을 말할때도 소위 '원리 중심의 리더십'(Principle-centered Leadership)이라고 말하는 그런 단어를 우리가 자주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래전 느헤미야라는 지도자는 이미 예루살렘성을 재건하면서 바로 이런 원리 중심의 리더십을 잘 발휘하여서, 그 성을 재건하는 프로젝트를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느헤미야가 중시했던 리더십의 원리들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 대답을 느헤미야 3장을 통해서 함께 찾아 보고자 합니다. 이것은 비단 개인 역사의 삶의 장뿐만 아니라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의 장. 가정, 직장, 사업의 장. 또 우리의 사역의 현장인 목장이라던지. 또한 이번 여름에 단기 선교를 떠나는 선교팀의 선교현장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동일한 원리. Principle. 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자 그러면 느헤미야에게 배우는 사역의 원리들은 무엇일까요 느헤미야에게 배우는 사역의 원리들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협동의 원리입니다.
느헤미야는 성벽을 재건할 때 자기 홀로 이 프로젝트를 실현할수 있다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문자 그대로 협동의 스피릿을 갖고 이 프로젝트를 실현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는 협동의 원리를 중시한 리더였습니다. 자 느헤미야 3장을 읽어보시면 참 힘드시죠 느헤미야 3장은 마태복음 1장보다 훨씬 인내를 요하는 장입니다. 이 3장을 글자 토시하나 빠지지 않고 다 읽으 보신분 손들어 보라는 충동이 있습니다만은 하지 않겠습니다. 여기 3장을 보면 무려 75명이상의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열거되고 있습니다. 왜 느헤미야는 이런 여러 사람들의 이름을 여기서 열거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예루살렘의 성벽은 저 혼자 한 것이 아닙니다. 이들과 더불어 함께 일을 한 것 입니다! 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보내고 싶었던 것이지요. 자 본문 1절을 읽어보시겠습니다. 시작.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여기 제일 먼저 강조된 단어가 무슨 단어입니까 함께 일어나 건축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홀로 이 사역을 수행 한 것이 아니라 더불어 더불어 이 사역을 추진할 수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함께라는 단어와 계속 3장을 읽어보시면 거의 각 구절마다 혹은 한 구절씩 띄어가면서 거듭거듭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무슨 단어가 등장하지요 실력 없어도 시력만 있으면 보입니다. 무슨 단어가 보입니까 “그 다음은”. 이런 단어가 보입니다. 그 다음은. 4절 보십시오. 그 다음은. 5절 어떻게 시작을 합니까 그 다음은. 6절 그다음은. 7절 그다음은. 8절 그다음은. 계속해서 그다음은. 그다음은. 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이 말은 그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에 서서 그 다음에는 함께 연합해서 서서 그 성을 재건하는 그 성을 이룩할수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이 협동의 원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인들의 리더십에서 결격사항 제 1호가 바로 이런 협동성의 부족이라고 스스로 지적해 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죠. 우리 자신도 잘 아는 그런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은 다를까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얼마나 하나님의 뜻대로 협동의 원리대로 하며 수종들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성경이 주님의 교회를 소개하면서 교회의 본질을 설명하면서 여러 가지 상징적인 단어를 썼습니다. 그중에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된 단어가 교회는 교회는 주님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몸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이 몸이라는 것은 얼마나 다양한 지체들이 함께 모여 몸을 이루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지체들은 끊임없이 서로 협동하고 있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서로 네트워킹해요. 서로 연락하면서 몸의 기능을 활달하게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왜 성경은 교회를 몸에다 비교했을까요 우리는 주님의 일을 감당할 때 그 일은 어떤 사람 혼자 감당할 수 없는, 또한 해서도 안되는 이런 팀 스피릿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사역은 가능하다는 것을 가리키기 위해서 주님이 교회를 몸으로 설명한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오늘날 주님의 사역이 진행되지 못하는 현장들을 돌아보면 여전히 거기에 그리스도인의 이기심. 혹은 개인주의적인 그리고 비협동적인 삶의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아직도 세상의 가치관이나 세상의 영향을 극복하지 못한 부끄러운 초상화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많이 쓰는 이규태씨의 글을 보면 는 특히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이 협동하지 못하는 원인이 본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고 산업화의 과정에서 변질되었다. 특별히 경쟁 구조속에 살기 시작하면서 한국 사람들이 많이 변했다고 지적을 합니다. 그는 이런 변질된 오늘의 한국인들을 '독속의 게'와 같다. '독속의 게'. 개가 아니라 게입니다. 우리가 게 한 마리씩 독속에 넣어두면 밖으로 나올 수 있는 능력을 다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마리도 기어나오지 못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게 하나가 기어 나오려하면 다른 게가 뒷다리를 물고 늘어집니다. 그래서 게들의 생존방식인, 게들의 인생철학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너 죽고 나 죽고 둘 다 죽자인 것입니다. 이게 오늘 우리 사회에 얼마나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까 오늘 위기 앞에 처한 한국이 이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서 필요한 대답을 우리는 모르는 게 아니예요. 알고 있어요. 그래서 날마다 신문에 나오잖아요. 우리가 상생의 정치를 해야 한다. 서로 사는 정치. 서로 세우는 정치를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죽이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신학을 쓰면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무엇인 줄 아세요 서로서로 라는 단어입니다. 바울은 얼마나 서로서로 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까 서로서로 용납 하십시요. 서로서로 용서하십시오. 서로서로 세우십시오. 서로서로 붙들어 주십시오. 서로서로 참으십시오. 서로서로 권면하십시오. 바울은 계속해서 서로서로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 지원해야 하는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렇게 될 때 그리스도의 몸이된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머리가 되는 지상명령을 온전히 성취하게 되고 실현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 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어 가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보다 더 한평생 붙들고 사역할 중요한 첫 번째 원리. 그것은 협동의 원리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다. 너무 개인적인 히어로가 되려고 하지 마세요. 협동을 우리는 다시 배워야 합니다.

두 번째로 배워야할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둘째. 은사의 원리입니다. 은사의 원리.
본문 느헤미야 3장에는 적어도 15가지 이상의 다양한 직종들이 등장합니다. 여러 가지 직업들이 등장하고 있어요. 네 이들이 모두 성의 재건사역에 동참하고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모두 자기들이 앞으로 일하게 될, 혹은 자기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낼 그 성의 건축의 부분을 맡아서 서로서로 분담하여 사역하고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1절을 보세요. 3장 1절을 함께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네. 감사합니다. 끝까지 읽어주시는 인내심을 발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 제사장과 제사장들이 성을 건축할 때 어느 부분을 건축했다고요 그들은 양문을 건축했다고 합니다. 양문. 양문이라는 것은 제사장이라는 사람들은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잖아요. 제사를 지내려면 제물이 필요해요. 그래서 양이 가장 많이 사용되는 제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양을 제사로 지내기위해 통과하는 문이 양문이예요. 문이 양쪽에 있어서 양문이 아니고. sheep gate. 그 양을 가지고 통과하는 문이예요. 그러니까 이문을 가장 많이 통과할 사람. 또 이 문의 용도를 제일 잘 알 수 있는 사람. 누구일까요 제사장들이죠 그러니까 자기들이 쓸 문. 자기들이 가장 많이 출입할 문. 그 문만은 제사장들이 스스로 담당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3절을 보면 어문이 나와요. 어문. 이것은 ‘고기 어’자예요. 고기들이 통과하는 문. fish gate. 네 지금 여러분들이 성지순례를 가면 오스만 트루크 시절에 건축이 된 성이 있습니다. 그 성이 지금도 있는데 그 성에 동서남북으로 각 두개씩 문이 있습니다. 아마도 고대에는 어문이 현재 북쪽에 가면 문이 두개 있는데 하나는 헤롯 게이트. 다마스커스라는 문이 있어요. 다메섹이라는 문이 있어요. 아마 그곳에 구약시대에 이 느헤미야 시대에 그 비슷한 문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을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디서 고기를 가장 많이 건져 올리냐면 지중해 연안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곳에 시돈과 두로라는 해안 도시가 있습니다. 거기에 많은 고기들이 잡혀요. 그러면 잡힌 고기를 가지고 팔기위해 예루살렘 시내를 들어올 때 북쪽에 있는 바로 이 문을 통과한 것입니다. 이 어문을 통과했어요. 이 문을 통과하자마자 지금도 그 앞에는 거기에 fish 마켓이 있어요. 시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3절을 보시면 어문은 하스나아의 자손들이 건축했다. 성경학자들은 아직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가를 확정적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추정컨대 이 사람들은 이 생선을 운반하는데 대거 이용했던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자기들이 가장 많이 이용했던 문. 그것은 자기가 감당해서 건축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보편적인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담당했던 문은 어디 부분이냐하면 자기가 살고 있는 집 앞부분의 성 건축은 서로 각 사람이 나누어서 담당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23절 한번 읽어보세요. 23절. 자 본문의 23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 다음은 베냐민과 핫숨이 자기 집 맞은 편 부분을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아나냐의 손자 마아세야의 아들 아사랴가 자기 집에서 가까운 부분을 중수하였고 이 표현은 여기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나옵니다. 자기 집 앞부분은 자기가 감당했다. 성을 둘러가면서 성을 쌓을 것 아닙니까 내가 사는 집 앞부분은 내가 담당해서 건축한다. 얼마나 합리적이예요. 상식적이고. 또 이렇게 함으로서 그들은 긴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고 매우 짧은 시간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해 내는데에 성공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각자가 나누어서 자기가 필요한 부분을 자기가 용도를 잘 아는 사람들이 건축하는 이 지혜를 발휘했던 것. 이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다시 말해서 은사를 사용해서 이 성을 건축하는, 완성한 표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교회에서 말하는 은사배치원리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공부 가운데 은사배치 세미나가 있어요. 이번에도 광고에도 나왔습니다만은 내가 내 은사를 알고 내 은사에 합당한 봉사가 뭘까 찾아서 그 일을 하면은 우리는 그 일을 아주 효과적으로 봉사를 하면서 아주 많은 열매를 거둘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봉사의 원리를 강조할 때마다 이 은사를 봉사와 결부시키고 있습니다. 자기의 달란트. 자기가 할 수 있는 일. 예를 들어서 우리가 베드로 전서 4:10을 읽어보십시오.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말합니다. 네 봉사의 원리를 강조하면서 제일 처음 강조한 것이 뭐예요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라고 했어요. 은사를 받은대로. 은사를 따라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사를 따라서 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두 가지. 하나는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내가 좋아 할 수 있는 일. 이 두 가지가 다 있어야 해요. 내가 좋아하는 일. 그리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 그러면 이것은 은사에 합당한 일. 은사에 합당한 봉사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두가지중에 어느 한 가지가 빠져도 안되요. 내가 좋아하는 일.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 예를 들어서 내가 좋아하는데 잘 할 수 없다면 안됩니다. 저는 음악을 아주 종아 합니다. 왜 비웃으세요 제가 음악을 아주 굉장히 좋아해요. 그래서 좋은음악. CD들을 내가 상당히 갖고 있어요. 그러나 내가 음악을 좋아한다는 것과 잘 할 수 있다라는 것은 아주 별개의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음악을 좋아한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어느날 갑자기 내가 성가대에 와서 지휘자에게 집사님! 잠깐 비키세요. 오늘 제가 지휘하죠. 그러면 어떤 결과가 나오겠습니까 결과에 대해서는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저도 예측할 수 있는 일입니다. 안되죠 내가 좋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잘 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일. 내가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검증될 수만 있다면 재밌어요. 즐겁게 할 수가 있어요. 일의 효율성을 높이고 좋은 결과를 맺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은사의 원리요. 은사에 따라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목장교회 운동을 하면서 목장안에 각 부서를 두는데 각 부장을 두는데 그냥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찬양을 잘 하니까 찬양부장. 나는 기도를 열성있게 하니까 기도부장을 맡고. 하나님을 빼 놓고는 자기 자신을 제일 잘 아는게 자신이니까 스스로 볼륜티하는게 중요합니다. 자원하는 게 중요해요. 그래서 우리 모두가 자기가 좋아 하는 일. 잘 할수 있는 일이 모아진다면 어떤 공동체가 얼마나 사역에 놀라운 시너지 효과를 창출할 수가 있겠습니까 유명한 심리학자인 아브라함 마슬로우(Abraham Maslow)는 그 분이 인간의 심리를 연구하면서 필요의 위계질서를 이야기 했습니다. 사람은 한 단계의 욕구를 충족해야 다음 단계의 욕구를 향해서 나아간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가장 기본적인 욕구. 우리가 먹어야 살잖아요. 네 먹어야 삽니다. 그러면 그 욕구가 충족되고 나면 내가 안전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안전에 대한 리드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올라가는데 인간안에 존재하는 가장 고급한 욕구. 가장 고도의 욕구. 그 욕구는 뭐냐 그것은 자아실현의 욕구다. 자아실현의 욕구다. 이것을 다시 성경적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모두 주신 은사가 있어요. 우리 모두 실현하고 싶어하는 어떤 꿈이 있습니다. 네 그것을 실현하지 못하면 인간은 한평생 그렇게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야 되요. 우리 자녀교육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야! 이거하면 돈 많이 번다더라! 요새 돈 없어봐라. 어떻게 사나. 이것은 크리스챤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네가 하나님이 주신, 좋아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봐. 네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가르키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은사라는 것을 희랍어로 카리스마라고 합니다. 세상적으로 권위.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마는 원래 성경의 은사라는 단어가 카리스마예요. 카리스마. 그런데 이 단어의 어원은 카라라는 것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기쁨. 여러분. 은사에 맞는 일을 하면 기뻐요. 신바람이 나와요. 너무 즐겁게 할 수가 있어요. 내가 좋아하는 일이니까. 사랑하시는 여러분! 그렇게 되면 우리가 얼마나 아름다운 일들을 우리가 정말 창출해 낼 수 있겠습니까 느헤미야는 원래 이렇게 사람들의 은사를 잘 개발할 수 있도록 그리고 적재적소에서 그들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움으로서 예루살렘을 건축이라는 놀라운 프로젝트를 아주 짧은 시간에 완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은사의 원리예요. 한평생. 우리도 우리의 한 평생속에 반드시 귀하게 쓰임을 받기 위해서는 이 놀라운 것을 붙잡아야 합니다. 한번 따라해 봅시다. 은사의 원리를 잘 활용합시다. 한번 옆에 있는 사람에게 해 봅시다. 은사의 원리를 잘 활용해 봅시다.

세 번째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세 번째는 격려의 원리입니다.
자, 본문인 느헤미야 3장에서 느헤미야가 이렇게 세심하도록 여러 지도자들의 이름과 그들이 행한 사역의 내용을 상세하게 기술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로 하여금 읽기 곤란하도록 이렇게 열심히 세밀하게 상세하게 기록했을까요 우리는 힘들지만, 기록된 사람들은 비록 성의 한 작은 부분을 감당했지만 얼마나 격려를 받았을까요 얼마나 격려가 되었을까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사람은 격려를 받지 않으면 어떤 일이라도 얼마나 오랫동안에 헌신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격려의 반대는 낙심입니다. 낙심하기 마련이지요. 격려라는 말을 우리는 영어로는 encouragement라고 합니다. 두 가지 단어가 합쳐져 있지요. in 이라는 단어와 courage라는 단어. 우리가 격려를 받으면 막 용기가 생겨요. 반대로 낙심이라는 단어는 discouragement라고 합니다. discouragement. 똑같은 courage인데. 그 앞에 dis가 붙어 있어요. 용기가 없어져요. 그것이 낙심이에요. 낙심하면 용기를 잃어버립니다. 의욕이 없어집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격려가 중요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0:24절에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합시다. 라고 말을 합니다. 이렇게 말을 합니다. 우리는 사랑과 선행을 서로 격려해야 한다고. 사실 한국인들의 의식의 깊은 곳에는 유교문화의 전통이 생각보다 뿌리가 깊습니다. 저는 유교 문화가 우리 문화에 긍정적은 영향을 준거도 많다고 생각을 해요. 그러나 역기능적인, 부정적인 영향도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강하게 경계하는 삶의 태도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주의예요. 율법주의. 혹은 율법주의적인 삶. 이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성경의 갈라디아서 같은 경우 율법주의에 대해 반대하고 경계하기 위해서 책 전체가 쓰여진 책입니다. 그런데 율법주의문화가 유교문화와 비슷해요. 우리가 율법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정해놓고 지키지 않을 때 정죄하는 문화. 비난과 정죄의 문화. 한국 사람들이 참 못하는 것 중에 하나가 칭찬 잘 못해요. 칭찬 잘 못하고. 격려 잘 못하고. 저부터 그래요 오죽 우리가 칭찬을 못하면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칭찬합시다.” 라는 프로그램이 등장했겠어요. 그만큼 우리가 칭찬을 못한다는 얘기지요. 크리스챤 휴머리스트인 마크 트웨인은 칭찬보다 공동체를 건강하고 견고하게 세워갈 수 있는 더 나은 방법은 없다 칭찬하면 공동체가 아주 밝아지고 건강해 집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칭찬을 모르는 가정을 들여다 보십시오. 칭찬과 격려를 모르는 가정을 들여다 보십시오. 감옥 같을 것입니다. 칭찬을 모르는 부부관계. 평생 살아가면서 칭찬하지 못하고 격려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부부들을 보세요. 이 부부는 틀림없이 원앙의 부부일 것입니다. 원앙. 원앙이란 원한과 앙심으로 맺어진 부부를 이야기 합니다. 틀림없이 그런 부부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칭찬을 모르는 목장이나 교회를 들여다보십시오. 칭찬을 모르는 교회. 찬바람이 불고 있지 않습니까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20절의 말씀을 한번 주목하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20절.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 다음은 삽배의 아들 바룩이 한 부분을 힘써 중수하여. 거기까지만. 바룩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느헤미야가 기록하면서 다른 사람하고는 다른. 다른 사람에게는 사용하지 않은 특별한 단어 하나를 써서 이 사람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어떤 단어입니까 힘써 중수하였다. 힘써서 중수하였다. 이 사람은 특별히 수고한 사람이예요. 이 특별한 수고를 알아주고 그 수고를 특별히 격려해 주는 우리가 여기서 볼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잘못한거 덮어두고 우리가 평가하지도 말자. 반성하지도 말자. 절대 그런 얘기가 아니예요. 여기 느헤미야 3장을 읽어보면 부정적인 평가도 있습니다. 꼭 한 사람의 케이스의 부정적인 평가가 등장합니다. 어디에 나오는 줄 아세요 5절 읽어보세요.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중수하였으나 그 귀족들은 그 주의 역사에 담부치 아니하였으며”. 드고아 사람들도 일했는데 드고아 사람들의 귀족들만은 담부하지 않았다. 담부하지 않았다라는 말은 어깨를 빌려 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힘든 일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드고아의 귀족들만은 이 어려운 일을. 그 주님의 어려운 일을 하려 하지 않았다. 이 귀족들이 문제예요. 귀족들이. 그들은 아마도 그들의 신분 때문에. 그들의 신분을 의식한 나머지 내가 어떻게 저런 일을 해. 그래서 이 귀족들은 하나님의 일들을 귀찮아 한 족속들. 귀족은 그래서 아마 귀족인 것 같아요. 네. 옆에 사람 한번 쳐다보세요. 혹시 귀족이 아니십니까 한 성경한자는 여기서 재밌는 코멘트를 했습니다. 왜 이런 내용을 여기다 끼워 넣었을까 이 성경학자는 이런 말을 했어요. 어떤 하나님의 사역의 현장에도 한 두 사람의 미꾸라지는 존재한다는 것을 후대에 경계하기 위해서 알려 주는게 좋겠다. 도망가는 미꾸라지 말이예요. 다시 한번 옆에 사람을 쳐다보면서 질문 한번 해 보시지요. 혹시 미꾸라지가 아니십니까 한번 해봐요. 여러분! 우리가 한평생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고 일을 한다고 했는데 마지막, 마지막에 가서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의 삶을 결산할 때 아무개는 너무나 자기 체면과 편안함을 생각한 나머지 주의 역사에 아무 일도 하지 아니하였으며 여러분의 이름이 그렇게 기록되는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도 광고했지만 그냥 가만히 앉아있는 일도 있는데 미소만 지으면 되는데 그것도 요즘에는 안해요. 요새는. 예 예. 이런 평가도 있었어요. 그런데 3장 전체를 보면 전체의 톤이 아주 긍정적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모두 팔을 걷어 부치고 자기 은사에 따라 자기 집 앞에서부터 모두가 마침내 예루살렘 성 재건의 위대한 프로젝트를 완수할 수 있었다. 그런 내용이지요. 그 제임스 보이스라는 성경학자는 3장의 성경을 연구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3장에서 가장 감동적인 것은 느헤미야가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제일 수고 많이 한 것은 느헤미야일텐데 느헤미야 자신은 자랑하지도 기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느헤미야가 남들을 격력하기 위해서 자신의 격려를 잊었다 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런 태도야 말로 격려자의 전형적인 모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어 보면은 이런 격려자가 한 사람 등장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이름이 심지어 격려자예요. 누구죠 바나바. 바나바. 격려의 아들. 이 사람은 사울이라는 청년이 회심했을 때 예수를 죽이던. 예수를 믿는 사람을 죽이던. 그런 청년이 어느 날 바뀌었다니까 아무도 믿어주질 않아요. 그때 회의석상에 나타나서 제가 이 사람의 변화를 보증합니다. 이 사람은 진짜 변했습니다. 그래서 젊은 청년, 변화된 청년. 그래서 사울을 격려해서 세운 사람. 그가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그가 안디옥 교회목사였을 때 교회가 부흥하기 시작하니까 할일이 많았단 말이죠. 그때 바나바는 다시 사울을 생각합니다. 이 사울이라는 청년이 가능성이 많은데 나를 도와주었으면 좋겠는데. 사울의 고향에 가서 삼고초려해서 그를 데려다가 동력을 합니다. 함께 읽을 합니다. 그리고 세계 선교 명령을 받았을 때, 다시 바나바 목사님은 사울이라는 청년을 데리고 세계 선교여행에 떠나갑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어 보면은 첫머리에는 이런 말이 많이 나옵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바나바와 사울이. 바나바와 사울이. 어느 정도 순서가 진행되어 가면 그 순서가 역전이 되어가요. 사울과 바나바가, 바울과 바나바가. 다시 말하면 바울의 리더십이 놀랍게 드러나자 사람들은 서서히 바울을 따르기 시작했고 서서히 바나바는 지워지기 시작을 합니다. 그런데 저를 감동시키는 것은 바나바는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세우고 격려했던 후배 바울이 놀라운 모습으로 부상하는 모습을 보고 기뻐하며 감사하면서 변화하는 역사의 무대로 퇴장할줄 알았던 이 사람. 너무 아름다웠던 이 사람. 바나바. 이쪽으로 읽어도 바나바. 저쪽으로 읽어도 바나바. 이런 바나바가 그리워지잖아요. 그쵸 우리 사회에, 우리 교회에 이런 바나바가 그리워 집니다. 이런 지도자 느헤미야가 그리워지지 않습니까 1849년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1849년 미국 뉴 잉글래든 지역에 세관 공무원으로, 감정관으로 일하던 사람이 너무 고지식하다는 이유로 어느날 직장에서 해고를 당했습니다. 실직했어요. 실직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축 늘어져가지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부인이 이런 말을 합니다. 여보. 걱정 마세요.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당신은 너무나 글을 쓰고 싶어했어요. 이제 당신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 저도 도와 드릴께요. 세상에..요즘 한국부인들 가운데에도 이런 아내가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 이런 격려를 했어요. 그리고 이 부인의 부탁으로 교회의 몇 사람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역시 똑같은 격려를 했습니다. 당신은 글 재주가 있는데 그것을 한번 펴보라고. 그렇게 격려를 해 줬어요. 그래서 그는 아주 좌절과 절망속에 돌아왔다가 그는 새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침에 일어나 붓을 잡고 소설을 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불과 반 년만에 태어난 소설은 세계를 놀라게 합니다. 이 소설이 뭐냐면 바로 주홍글씨라는 소설입니다. 이 작가가 바로 청교도 작가인 나타니엘 호돈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나타니엘 호돈. 만약 그 아내의 격려가 없었더라면 그리고 친구들이 없었더라면. 그리고 자기의 진정한 은사와 재능을 발휘하는 삶을 살지 못했었더라면 인류의 역사는 위대한 문학사의 중요한 한 보배로운 부분을 우리는 잃어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격려는 얼마나 중요합니까 우리가 은사를 따라 산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요.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 우리가 예수 믿고 천당만 가려고 예수 믿은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의 일을 수종 들라고. 그리고 가치 있는 삶의 발자치를 남기라고.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은 바로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삶을 향해서 드려지고 바쳐지고 사용되고 있습니까 주의 발자취에 여러분은 어떤 발자취를 남기고 있습니까 오늘 다시 이 말씀을 통해 다가오는 도전 앞에 가슴을 열고 내 은사를 발견하고 그리고 나를 격려하는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한번 주의 일에 쓰임을 받아 우리가 세상을 떠나가는 그날. 주의 역사의 날에 헌신하여 아름다운 발자취를 남길 수 있는 이 시대의 느헤미야. 그리고 그의 동역자들이 우리 가운데 일어나기를. 우리 가운데 있어 주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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