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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려워하지 말라 (눅 1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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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는 악한 세대 사람들의 죄악을 책망하시고 특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위선을 책망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악한 세상에서 많은 환난과 핍박을 당할 제자들에게 주시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으로 “두려워 말라”입니다.
성경에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딤후3;12) 오늘 말씀을 통하여 환난과 핍박을 이기는 믿음을 배우고,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Ⅰ.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1-3)

본문의 사건은 앞선 11:37-54절에 이어지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바리새인의 집에 점심 식사를 초대받으시고 식사를 하시게 되는데 손을 씻지 않고 잡수시자 손을 씻지 않고 잡수시는 예수님을 바리새인이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이렇게 이상하게 여기는 바리새인을 상대해서 그들의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부분을 3가지로 책망을 하셨습니다. 또, 율법사에게도 3가지로 심하게 책망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들은 예수님의 책망을 받아들이고 회개하면 될텐데 회개는 하지 않고 화를 내면서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예수님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맹렬히 달라붙어 여러 가지 말로 힐문하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망되는 것을 잡고자 하여 목을 지켰습니다.
아마 본문이 주어지기까지의 내용을 면밀하게 보면 예수님께 달라붙어 따라나오며 소리치고 앙심을 품고, 뭘 책잡을까 하며 목을 지키다 보니까 사람들이 모이고 시끌시끌하게 되었음을 짐작합니다.
그러므로 1절을 보십시오. “그 동안에 무리 수 만 명이 모여 밟힐 만큼”되었습니다. 아마 부산하게 떠드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모이고 모이다 보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밟힐 만큼 된 것입니다.
십여 년 전에 우리 교회 한 분이 교통사고로 화원 교도소에 수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심방을 가는데 우리가 탄 택시가 굴러서 차가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히고 택시가 납작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친 곳 없이 무사하게 그 차에서 나와 보니 삽시간에 어디서 사람들이 몰려왔는지 사람들이 꽉 둘러 서 있었습니다. 다친 곳은 없었지만 창피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에게 당하시고 계시는데 갑자기 수많은 사람들이 밟힐 만큼 모인 것인 것입니다. 이 모여든 무리 가운데는 예수님을 대적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있었고, 불신에 사로잡혀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무리들이 모였을 때,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절 하반 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의 외식을 누룩(leaven)에 비유하셨습니다.
본래 누룩(헬, 쥬메)이란, 반죽을 발효시키기 위해 넣는 물질을 가리키는데, 일반적으로 전에 사용하던 반죽으로 부터 남겨 놓은 약간의 발효된 반죽을 가리킵니다. 누룩이란 금방 온 떡덩어리를 썩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특히, 날씨가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중동 지방의 날씨를 감안한다면 누룩의 영향력은 대단한 것입니다. 금방 온 떡덩어리를 변질시키고 변화시킵니다.
이처럼 누룩에 비유하신 바리새인들의 외식은 금방 온 지역 사회를 변질시키고 좁게는 교회를 변질시킵니다.
외식은 헬라어 <휘포 크레세이>인데 본래 헬라<그리이스> 연극에서 사용되었던 말입니다. 단순히 역(役)을 맡은 것을 뜻합니다. 이 역을 맡은 사람을 일반적으로 배우라고 부르는데, 자신의 인격과 성품과는 관계없이 주어진 대본에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외식이란 실제가 아닌 가장하는 행위, 자신의 참모습을 숨기고, 다른 모습으로 나타내는 이중적인 기질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바리새인들의 외식은 무엇입니까
속은 씻지 않으면서 겉만 씻고, 꾸미고 겉만 깨끗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사람들에게 인정 받고자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서 기도하는 척하고, 실제로 구제하지 않으면서 조그마한 구제를 할 때는 나팔을 붑니다. 금식할 때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합니다.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 또 칭찬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상좌에 앉기를 좋아하고, 율법을 가르치나 자기들은 행치 않는 것, 이것들이 위선입니다. 당시의 제자들이 조금씩 조금씩 바리새인의 누룩에 떠가는 것을 보시고 영적 위험을 느끼시어 경계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위선을 부리는 자들의 결국은 어떠합니까
2절을 보십시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대개 형식적인 신자들은 이중적인 생활을 하면서도 사람들이 모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속마음을 감추고 이중생활을 감춘다 하여도 때가 되면 다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어두운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 한데서 들리고, 골방에서 귓속말로 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됩니다. 신앙생활은 눈가림으로서는 안됩니다. 일시적으로 사람들의 눈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히브리서 4:13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리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겉모양을 꾸미는 신앙생활보다 내면을 깨끗이 하기 위해서 더욱 힘쓰는 성도님
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Ⅱ.두려워하지 말라(4-7)

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으로 부터 책망을 받고 맹렬히 달라붙어 힐문을 하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목을 지키고 있는 관경을 보자 예수님의 제자들이 심한 두려움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문에 여러 차례 “두려워하지 말라” “염려치 말라” 하셨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했습니다.1) 예수님은 제자들을 “내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진실한 친구는 어려울 때 도와줍니다. 예수님은 악한 세상에서 많은 환난과 핍박을 당할 제자들에게 가장 진실한 친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친구라 하시면서 두려워 말 것을 말씀합니다.

2) 또,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핍박하는 자들이 아무리 심하게 핍박을 해도 그 몸을 죽이는 그 이상은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 신자들이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출교를 당했습니다. 또, 로마 시대에는 짐승의 가죽을 사람에게 씌워서 사자 굴에 던져 넣기도 했습니다. 또,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산사람의 몸에 기름을 발라 천을 두르고 연회장의 관솔불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또, 십자가에 묶어 불태워 죽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기도원에서 잠이 오질 않아 새벽 2시경쯤 대 성전에 나갔습니다. 밖에는 안개가 자욱히 끼어 있었고,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성전 안은 캄캄하고 가끔씩 바람이 불어 문이 삐걱삐걱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기도원에는 정신병자들이 많으니까 꼭 무엇을 들고 달려들 것 같이 머리털이 서고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오래 있지를 못하고 나오는데 이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초대 교회 성도들은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며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요사이 우리들이 받는 핍박은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일전에 어느 청년 둘이 찾아와서 결혼을 주일날 하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려느냐고 물으니까 부모님들의 핍박 때문에 주일날 한다는 것입니다. 주일날 안하면 뒤도 돌봐 주지 않고 살림을 차려 주지 않겠다는 것 때문이랍니다.
사단은 이런 여러 가지 두려움을 심어 주며 꼭 계명을 범하게 하고 실패하게 하므로 주님은 ①두려워 말라 하시고 ② “내 친구 너희에게”하시며 꼭 지켜 주실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결단하고 모든 것을 신앙으로 하면 하나님이 지켜 주시고 축복하실 줄 믿습니다. ③그리고 5절을 보십시오. “마땅히 두려워 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하셨습니다. 몸만 죽이고 그 후에 더 못하는 사단을 두려워하지 말고 죽인 후에 영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라고 예수님은 일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권세 있는 예수님을 의지하며 환난과 핍박이 있어도 믿음 생활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뿐만 아닙니다. 6절을 보십시오. 환난과 핍박 가운데 성도들을 어떻게 하신다고 합니까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라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했습니다.
당시에 성지에는 참새가 너무 많고 흔해서 한 앗사리온(동전의 명칭)을 주면 참새 2마리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두 앗사리온을 주면 참새 다섯 마리를 주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너무너무 흔해서 하찮게 여겨 우수로 즉 덤으로 딸려가는 참새 한마리까지도 기억하신 바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는 미물도 하나님께서 기억하신 바 되는데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입니다.

4) 그러면서 오히려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 말라 하셨습니다.
금발의 머리털은 약 14만 5천 개, 검은 흑발의 머리털은 약 12만개, 붉은 머리털은 약 9만개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루에 머리털이 약 200개가 빠지고 다시 난다고 합니다. 그 빠지고 다시 나는 것까지 다 하나님이 세신 바 되시고 기억하신 바 되시므로 두려워 말라는 것입니다.
죤 녹스에 대하여 알려진 바대로는 그의 시체가 무덤 속에 내려질 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결코 인간의 얼굴을 두려워한 일이 없는 자가 여기 잠드노라” 했다고 합니다.
고 주 기철 목사님은 일제하에서 신사 참배 강요를 거부해서 1938년 이후 4차례 검속에 전후 7년간의 옥고를 겪다가 1944년 4월 21일 평양 감옥에서 순교하셨습니다. 한 때, 일본 경찰이 그를 회유하려고 가출옥 시킬 때, 자기가 시무 하시던 산정현 교회에서 최후의 유언의 설교를 하셨는데 그 일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80 넘어 늙으신 내 어머님을 자비하신 주님께 부탁합니다. 나의 병든 아내를 주님께 부탁하고, 내 어린 자식들과 나의 사랑하는 양 떼를 자비하신 주님께 부탁합니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으로 이 산정현의 이 강단을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따라 주님의 피 자취를 따라 가려 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나는 내 어머니, 내 아내, 내 자식을 여러분에게 짐이 되게 할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전능하신 하나님께 부탁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제 몸의 고통은 견딜 수 있으나 부모와 처자를 생각하며 철석같은 마음이 변질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의 얽기고 얽힌 인정의 줄이여! 나를 얽매지 말라. 주님 따라가던 나를 얽매지 말라, 부모나 처자를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께 합당치 아니합니다” 하고 이 고난의 길, 순교의 길을 가셨습니다.
몸만을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인 후에 영원한 지옥에 던져 넣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며 신앙을 지켰습니다.

Ⅲ.예수님을 시인하는 자(8-12)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힐문을 당하시고, 맹렬히 달라붙어 애를 먹이는 것을 보고 제자들이 두려워서 예수님을 쉽게 부인하고 예수님을 저버릴까 봐 8,9절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이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사람들 앞에서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시인하는 생활을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0:9-10절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는 사람들 앞에서는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는 것은 쉽게 하면서, 불신자들 앞에서나 예수님을 핍박하고 멸시하는 자들 앞에서는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며 예수님이 주님이시다 라고 시인하는 일은 어려워하고 힘들어합니다.
불신자들 앞에서 내가 크리스챤이요 하고 시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심지어 교회 성경책을 들고 오는 것이 부끄러워 성경책을 신문지에 똘똘 말아 오는 분들도 있습니다.
또, 적극적으로 주님을 전하며 시인해야 할 성도들이나, 집사님들이 야외 놀러 나가서는 ‘우리 여기서부터는 집사님이라 부르지 말고, 사장님, 선생님, 사모님이라고 부르자’라고 하며 모두들 예수님 믿는 것을 부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나, 환난과 핍박이 오더라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시인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장차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때, 저를 시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 당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막8;38) 하셨습니다.
결국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부끄러워 하는 자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이 없는 분들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예수님의 증거를 듣고 거역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을 수 있지만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고 모욕하는 자들은 사하심을 받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귀신들린 자를 고쳐 주었을 때,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역사를 보고 바알세불의 역사로 즉 사단의 역사로 고집하던 자들에게 주시던 말씀으로 이들은 예수님을 사단의 졸개로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 드릴 수 없으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 훼방 죄를 지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난동을 보시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핍박이 없을 것이라는 것은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두려워 말라 하시고,
11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저를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가서 심문을 당할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할까 염려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요
성령이 그때 그때마다 할 말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셨습니다.
성려님께서는 핍박받는 제자들과 항상 함께 하십니다. 할 말을 생각나게 하시고, 할 말을 가르치십니다. 지혜를 주십니다. 거기에 합당한 말씀을 주십니다. 그때그때 새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 할 것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나 친구가 되시는 예수님을 의지하고 덤으로 팔려 가는 참새까지 기억하시며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시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성령님이 어느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므로 담대하여 이 마지막 시대에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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