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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초기 3교회의 모습들 (행 02:4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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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매우 급변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3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여기 금호중앙교회도 좋든 싫든 변화하는 시대와 함께 지내왔고 변화를 해야하고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져 있다.

30년은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다. 세월이 이렇게 흘러가듯 교회도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고 또 나갔다. 목회자도 바뀌고 교인들도 바뀌었다. 사람은 바뀌었지만, 교회가 가지고 있는 본질은 결코 바뀔 수 없다. 여기에는 교단이나 교회의 건물모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교회는 교회이어야 한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우리 주변의 몇몇 교회는 교회랄 수 없는 곳이 더러 있다. 단순한 친목단체처럼 흘러가는 모습을 볼 때 안타깝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교회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증언과 함께 서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고전 10:17,27) 그 안에서 우리는 세례와 성찬을 통하여 그 몸과 하나됨을 우리는 믿는다. 교회를 가리켜 에클레시아라고 하는데 이는 τξυ εξυ 라는 단어와 함께 사용됨으로 교회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속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물론 에클레시아는 이방인과 헬라인에게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적인 백성의 회집이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에클레시아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구성된 백성들의 모임인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불러내시고 모으신 곳이다.

이 교회는 하나의 힘을 가지고 있다.
이 힘은 무엇인가 소위 힘있는 교회라고 할 때 사람들은 평가 기준을 재정이 넉넉하다거나 목회자의 사회적인 지위에 두거나 교인들의 지식 수준에다 맞추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교회의 힘은 그런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신자들 안에 내주하시며 신자들을 통제함으로 그들로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살도록 인도하시는 성령께 있다. 우리는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 (고전 12:13) 교회가 한 몸이라고 하는 것은 중요한 내용이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 시작된 제일 처음 교회는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 쓴' 역사를 가지고 있다.(행 1:14) 이들이 기도하게 된 동기는 주님의 분부하심에 따른 것이었다. 승천하시기 직전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고 하셨다. 주님이 말씀하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니라 성령의 세례였다.

그 당시 한 곳에 모인 사람은 모두 120명쯤 되었다. 모인 이들은 가롯유다가 빠진 11 제자들과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 그리고 예수님 생존시에는 잘 따르지 않았던 아우들이 자리를 함께 하였다. 이들은 한가지로 모여서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를 올렸다.

이들이 기도를 드린 후에 행한 일이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1. 가룟 유다를 대신할 일꾼을 뽑았다.
행 1:25를 보면 봉사와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보여 달라고 간구한 후에 제비를 뽑았다. 두 사람 중 한사람인 맛디아가 선출되었다. 우리가 교회의 일꾼을 선출할 때에 두 종류의 사람은 언제나 있게 마련이다.
① 웃기는 사람:의무는 외면하면서 권리만 찾는 사람.
② 울리는 사람:의무를 잘 하면서도 권리를 포기하는 사람.

2. 그들은 자주 한 곳에 모였다.
그들이 모인 시기는 오순절이었다. 유대인들에게는 지켜야 할 절기가 셋이 있다. 유월절, 오순절, 칠칠절인데 오순절은 유월절 이후 50일이 되는 날이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다가 모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들이 모인 곳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령이 임재하신 것이다.

성령의 임재란 언제나 '모이는 곳'에 있다.
히브리서 10:25의 말씀에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있다. 이 말은 평안할 때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려운 때의 이야기이다. 핍박을 받는 시대에 들려주신 권고의 말씀이다. 오늘 우리들의 시대에 핍박은 없다. 그러나 사단은 핍박대신에 우리를 바쁘게 하는 방법으로 모이지 못하게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처음 교회는 모이기를 힘쓸 뿐 아니라 모인 그들이 행한 일이 있다. 행2:42 이하에 나타난 내용을 보자.1)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다. / 주님의 죽으심,부활,승천에 대한 말씀.
2) 서로 교제하였다. / 교제는 서로간에 구별을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3) 떡을 떼었다. / 주님의 성찬으로 하나됨을 확인하였다.
4)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 / 성령의 충만함, 복음의 증거를 위하여

처음 교회는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라는 말씀(행 2:46)으로 대변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렇게 모이기를 힘쓰는 그들에게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을 더하게 하셨다.'

초기 교회의 또 다른 모습은 안디옥교회에서 발견하게 된다. 안디옥교회는 핍박으로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이 세운 교회였다. 행 11:19 에 나타난 기록을 보면 스데반 박해 이후에 환란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 구브로, 안디옥으로 이어져 내려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다. 이 안디옥교회의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교회는 바나바를 보냈다. 의사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기록하기를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은 모두 다 바나바 못지 않게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시기를 바란다. 바나바가 착한 사람이어서 성령충만한 것인가 아니다. 성령에 충만하면 모두 착한 사람이 된다. 바나바가 1년 동안 가르친 안디옥교회에는 많은 믿음의 열매들이 있었다.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많이 있었다.

바나바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 구레네 사람 루기오, 분봉왕 헤롯의 젓동생 마나엔 그리고 바나바가 데려온 사울이다. 니게르라는 단어는 피부색이 검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 이 사람이 주님의 십자가를 진 사람일 것이라는 설도 있으나 확인할 수가 없다. 구레네는 현재의 리비아를 말한다. 헤롯의 젖동생까지 있는 것을 보면 당시 권력의 심층부까지도 복음이 들어간 것을 짐작하게 된다. 복음은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 깊이 자리잡아 나간다. 여러 사람들 곧 지위의 고하나 특히 피부색갈이 서로 다른 인종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집에서 선지자와 교사의 직분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단순히 안디옥교회 만을 위하여 존재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이들은 금식하며 기도한 후에 성령의 지시하심을 따라 바나바와 사울에게 안수하였다. 말하자면 바나바, 사울은 이방에 있는 안디옥교회가 처음으로 세워 파송한 선교사였다. 초기교회가 이렇게 타 지역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관심을 나타낸 것이 곧 선교사파송인 것이다.

교회가 교회일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전파에 관하여 어떠한 열정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복음전파에 대한 열정을 가진 교회는 부흥한다. 고전 4:2에서 바울은 자기들을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묘사하였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는 말도 이 때에 나온 말이다.

교회의 궁극적인 존재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하나님의 일군들은 복음의 증거를 가장 큰 목표로 삼는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의 직무를 가장 중요한 직분으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2세들에게 복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복음의 증거를 위하여 사람들이 모이고, 복음을 나타내 증거하기 위하여 흩어져 나간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행 20:20-21)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가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회개하는 것은 매우 귀중한 사건이다. 선교의 귀중한 책임을 맡은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할 일은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죄인인가 하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안디옥교회는 바나바에게서 이러한 가르침을 받았고 바나바와 함께 온 사울도 그들에게는 가장 좋은 교사였다. 사울은 바나바가 눈여겨 두었다가 데려 온 동역자였다. 이렇게 좋은 선교사, 헌신하는 일꾼 아래에서 자라난 안디옥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하며 그들의 수고를 담당하는 교회로 본 받을 만한 교회인 것이다.

우리가 본받을만한 또 하나의 교회는 데살로니가 교회이다. 바울선생은 이 교회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하는 교회'로 고백하고 있다. 그러면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기억하게 하는 것일까 살전 1:3에 소개된 말씀을 보면 그 해답이 나타난다. 곧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가지고 있기 떠문이다. 이러한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문은 마게도니아와 아가야를 비롯해 각처에 널리 퍼졌다는 것이다.

믿음의 역사는 무슨 일이든지 믿음으로 행하는 것을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것은'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을 보라!' 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 까닭에 이루어진 현실이다. 히브리백성들은 믿음으로 홍해를 건넜다. 그러나 애굽의 군대는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수장되어 버렸다. 임마누엘의 하나님,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 여호와닛시의 하나님, 에벤에셀의 하나님,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준비하시고, 이기게 하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는가

어느 누구든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을 하고야 만다. 격언 가운데 하나로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이 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바울은 이러한 믿음으로 가득한 사람이었다. 적어도 금호중앙교회 제직이라면 믿음으로 역사하는 제직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데살로니가교회는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사랑의 수고가 무엇인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서 강도를 만난 한 사람이 있었다. 그를 구해 준 사마리아 사람, 우리는 그를 가리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라 한다. 이웃 사랑이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은 행동이 따라가야 한다. 사랑은 손해를 손해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위험을 위험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자기의 것을 다 주고도 더 주려하는 생각이다. 사랑이란 마리아처럼 300 데나리온의 향유를 허비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사랑의 수고란 무엇인가 '무엇 무엇 때문에'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이라야 한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망의 인내는 눈물겨운 것이었다. 복음을 믿는 소수의 사람들이 굽히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말씀을 사모하고 살아 간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었다. 불신자들이 야손의 집에 쳐들어와 신자들을 핍박한 사건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바울로서는 자신이 데살로니가를 떠난 후에도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굳게 간직하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크게 기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에 소문을 의식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소문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소문은 곧 여론이 아닌가 여론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소수의 부정적인 시각이 일을 그르치게도 하지만 소수의 긍정적인 사람이 큰 가능성을 만들어 갈 수 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좋은 소문을 만들어 내는 교회였다.

오늘 우리 주변의 교회가 모범으로 삼아야 할 교회는 어디인가 우리가 모범으로 삼는 교회는 초대교회이다. 지금이라도 우리는 초대교회의 순수함으로 돌아가야 한다.
1) 주님의 약속을 가지고 기다릴 줄 아는 교회여야 한다./예루살렘교회
2) 복음에 대한 열정을 가진 교회여야 한다./안디옥교회
3) 좋은 소문을 가진 교회가 되어야 한다. /데살로니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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