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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간의 구원 (골 01: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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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가 하나님의 조화로운 질서를 깨뜨렸습니다. 에덴 동산에서의 불화 이후에 피조계는 무질서하게 되고 구원을 고대하면서 ‘신음’하고 있습니다(롬8:19-22). 인류도 하나님과의 결별로 모든 것을 상실하였습니다. 인간들은 어둠과 허무의 늪으로 깊이 잡겨 버렸습니다. 인간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알 수 없는 이 세상에서 자기의 길을 잃었습니다. 인간과 그의 세계는 불가피한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상과 인류를 그들의 운명에 방치헤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처음으로 제 길로 떠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가가 세대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뜻을 알려 왔습니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9,10). 하나님은 성육신을 통하여, 더 정확하게는 십자가에서 만물을 새롭게 자신과 조화시키시는 구속의 대요(大要)를 설명해 주신 셈이었습니다. 이 세 창조의 으뜸이 그리스도입니다.그분은 생명의 시작이며, 근원이며 만유의 주(主)가 되십니다.
한편 바울이 여기서 매우 감동적으로 서술하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만 우러러 보고 만족한다면 우리에게는 별 유익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주의 무한성이나 인간적인 유추의 세계 속에서 방황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속이 인간의 실제적이고 즉각적이며 개인적인 필요에 어떤 구실을 하는지를 지적해 줍니다. 이 측면에서 바울은 우리들의 개인적인 문제들을 다루어 주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현대 세계의 문제들과 각 시대의 인간들의 필요를 충족시켜 준다는 사실을 역설합니다.

쇠외된 과거
‘전에…멀리떠나’(1:21).
바울의 이 말은 우리 세대에서 널리 퍼진 무소속감이나 소외 의식과 일맥상통합니다.
젊은 세대는 구세대가 이루어 놓은 사회에서 소외감을 느끼고. 구세대는 젊은 이들에 대해서 역시 동일한 소원감(疏遠感)을 느낍니다. 근로자 들은 경영자에 대하여 그들은 그들이고 우리는 우리라는 식의 태도를 취하고, 고용주들은 피고용주들과 거리가 멉니다. 상호간의 이해가 결핍된 상태에서 제각기 자기의 세계 속에 묻혀 사는 것이 현대사회의 특징입니다.
인간은 갖고 싶은 것들을 다 소유하고서도 불만을 늘 가슴에 담고 삽니다. 이것 저것 다 해보고서도 인간은 계속 굶주린 상태에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혼자서 이 공허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과 무의미한 우주 공간에서 자기가 상실되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자신이 서서히 빨려 들어가는 이 사회라는 조직체의 희생자이며 저항할 수 없는 세력들의 포로가 되어 노리개 역활을 한다고 여깁니다.
젊은이들은 구세대보다 인간 사회의 소외감에 더 민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도전과 반항의 자세를 취하는 것은 능히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인생의 공허함과 용납될 수 없는 현실의 우상들에 얽매인 처지르 ㄹ대항하여 반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록 그러한 소외적 세력들이 항상 정확하게 판별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인간의 품위가 남아 있다는 건전한 반응입니다.
그런데 젊은 세대가 기성세대와 다같이 체험하는 이 소외가 단순히 어떤 파동적인 외적 요인을 지녔다고 생각하면 커다란 오판입니다. 바울은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1:21)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쇠외는 호전성과 악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누구나 하나님 안에서 인생의 의미를 세롭게 발견치 못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평강을 찾지 못한 자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자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과는 타인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이나 목적이나 섭리에 외인입니다. 그런 자는 사실상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싸움을 벌이고 있는 자는 타인과 자신을 붙잡고 전쟁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평안이 없습니다. 그는 이것을 세상 때문이라고 원망합니다. 그래서 부모를 탓하고, 젊은이들을 욕하며, 권위기관이나 고용주나 근로자 들이나, 아내가 남편이나 친구나 경쟁의 대상자나 사회나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자기 자신만 제외하고 누구든지 탓합니다. 이것이 곧 소외된 인간들의 문제입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들 속에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진단 결과 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치유책이 적용되는 곳은 우리 자신들입니다.

화목된 현재
‘이제는…화목케 하사’(1:22)
이제는 화평이 되찾아졌습니다. 우리 자신들에게도 화평이 왔고 다른 사람들과도 평안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반항하는 근본 원인은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죄의 원인을 의식하지 못하거나 혹은 인정치 않을지 몰라도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밀착된 유대를 가로막고 인생의 의미를 흐리게 하는 것은 다름아닌 죄입니다.
인생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의 터전과 중심과 목표가 아니라면 인생의 향방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완전히 상실된 삶으로 끝나고 맙니다. 인간이 자신과 이웃의 화홥으 ㄹ찾기 원한다면 먼저 하나님과의 연합과 화해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죄가 없어져야 합니다.
‘이제는 그가 너희를 화목케 하사’
이것은 하나님의 크신 사역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누가 죄를 없이하고 죄인을 용서해 줄 수 있겠습니까 죄인이 자기 자신을 그렇게 할 수 없음을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세월이 흐른다고 우리가 저지른 죄들이 씻겨지지도 않고 우리의 선행이 죄를 덮지도 못합니다. 한 번 죽임을 당한 자는 우리의 선의나 돈이나 눈물이나 그 어떤 희생으로도 되살릴 수 없으며, 낭비된 인생을 취소시킬 수도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들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희생된 분을 우리들이 살려낼 수 있는 방도는 전무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죄르 ㄹ위해 자기 자신이 무한한 값을 치루고 우리와 화해하셨습니다.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1:22).
주님은 우리의 육체오 동일한 살과 피가 있는 실제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들을 위해 죽어주셨습니다.
인간은 일단 하나님과 회해되면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과거에 그처럼 경원시되던 이 세상이 새로운 의미로 부각되고 주위의 사람들을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되며 이웃에 대한 적대감이 사라집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찾음으로써 타인과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자는 화해의 기쁨을 갖게 되고 드디어 마음의 평강을 누립니다!
그렇다고 모든 문제들이 사라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조화의 삶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사는 이 세상은 하나님과 대적의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그리스도인의 가슴을 향해 칼을 던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눈물로 얼룩지고 그의 화평은 고난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바울은 모든 성도들에게 기뻐해야 한다고 권명하였습니다(빌3;1). 하지만 바울 자신도 다른 형제들의 고난과 자신의 삶 속에 있는 모순들로 인해 번민하며 울었습니다.(롬9:2 ; 7:13-25).

완전한 미래
절대적인 종결적 승리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은 아니지만 장차 오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화해시켰기 때문에 우리들이 완전한 자들로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날이 옵니다.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말 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1:22)
화평의 사역을 시작하신 주님은 그이 약속대로 그 일을 완성시킬 것입니다.(빌1:6) 주님은 약속하신 일을 미완성으로 남겨두시지 않습니다. 현재로서는 십자가의 사역이 비록 종결되기는 했어도 그 결과는 아직 미정이며 상대적입니다(고전15:27,28,54 ; 고후4:16-5:7).
그러나 언젠가는 모든 것이 완전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흘리는 눈물로 인해 자주 얼룩지는 십자가의 평강은 그 때에 모든 성도의 얼굴과 가슴 속에서, 그리고 화해된 이 세상에서 빛나게 될 것입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아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바오디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8:19-24)
이 소망은 확실한 것입니다.(히6:18,19 ; 벧전1:3-5). 언젠가 우리들은 ‘거룩하고 흠없고 책말할 것이 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나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엄격하시고 공정하시며 면밀하신 재판장이시지만 그리스도에 의해 소개되는 우리들로부터는 아무런 허물을 찾지 못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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