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교회를 위한 수고 (골 01:24-29)

첨부 1


어떤 사람은 “여러가지 많은 것들에 조금씩 다 흥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묘사해주는 관심사는 많지만, 그 중 어느 한 가지도 자신을 전적으로 사로잡거나, 삶에 동기가 되는,혹은 삶 전체를 통일시켜 주는 목적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하는 일들을 왜 하는지 그 모든 것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은 무엇인지 통일되고 선명한 삶의 방향과 이유가 무엇인지 아무런 의식 없이 살곤 합니다. 다만 하루는 다음날로 이어지고 생의 한 가지 도전이 끝나면 또 다른 도전이 뒤따라 옵니다. 시간은 덧없이 흘러갑니다. 우리 가족이, 직업이, 또 친구들이, 교회가, 또한 여러 모양으로 얽힌 일들과, 책임져야 할 것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우리를 갖가지 다른 방향으로 끌고 다닙니다. 그 속에서 우리를 하나의 일관된 목적으로 이끄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는 목적도, 그것을 성취할 만한 정력도 우리에겐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목적도, 능력도, 모두 갖고 있었고, 놀라울 정도로 지혜와 창조성으로 넘쳐 흘렸던 그의 삶의 강 저변에은 그의 존재의 이유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의 본류(本流)가 흐르고 있었다.
우리는 한 사람의 내면으로 들어가 그 속에 있는 그의 목적과 능력을 발견하기까지는 그 사람을 정말로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바울이 교회를 위한 수고가 얼마나 큰가를 보여준 것입니다.

바울의 고통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은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내가 교회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1:24,25).
이 본문들은 좀 이상하게 들립니다. 마치 바울이 병적으로 고난을 추구하는 바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난을 찾아 다닌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다만 고난을 피하지 않고 자기 사역의 필연적인 일부로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바울은 앞에서 언급한 그리스도의 경이로운 화해의 사역과, 자신이 이 상실된 세상에 선포하게 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생각할 때 자기가 당하는 고난 중에서도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울의 말뜻은 다음과 같이 풀이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연약성과 나의 죄와 내가 교회를 핍박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속케 하시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케 하시며 심지어 그 고난의 남은 부분까지 다 채우게 하십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럼 그리스도의 고난들이란 어떤 것들일까요 이 고난들은 모두 동일한 성격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차이점을 가려내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두 가지로 대별될 수 있습니다.
첫째, 십자가의 고통입니다.
이 고난은 대속의 죽음을 초래하였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지상 사역과 관련된 고난입니다.
이 고난들은 신체적 정신적 고초들로서 진리를 웅호하거나 불의를 규탄하거나 혹은 이 세상의 여러 죄를 지적하는 자들이 받을 수 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굶주리셨고 목말라하셨으며 수면을 제대로 취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무엇보다도 예루살렘의 불신 때문에 우셔야 했으며, 자신의 제자들과 친구들의 오해로 인해서 마음에 상처를 받으셨고, 더구나 유다의 배신으로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첫 번째 고통인 속죄와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은 유일무이한 것입니다. 이 고난에 대해서는 타인이 조금도 관여할 것이 없습니다. 환언하면,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모든 것이 완결 되었습니다.(요19:30). 그리스도의 이 고난에는 조금도 보탤 것이 없습니다. 그의 희생은 완전한 제물이었습니다.
한편 두 번째 종류에 속하는 고난들, 즉 그리스도의 사역과 관련된 어려움들은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 고난들은 주님의 신실한 제자들이 함께 나눌 수 있으며 사실상 동참되어 왔습니다. 예컨대 야고보, 스데반 그리고 바울 자신이 많은 간고(艱苦)를 겪었고 결국 복음을 위하여 목숨들을 내놓았습니다. 교회를 위한 이같은 고난들은 그리스도가 받은 고난들의 연속이며 보충입니다.(고후11:13-39).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사랑하는 자들은 바울처럼 갖은 고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 고난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고난들입니다.
가장 큰 기쁨의 원천인 사랑은 가장 큰 고통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작게 사랑하는 자는 작게 잃습니다.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머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오점이나 죄들을 보고 마음 아파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주님의 몸되신 교회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역으로,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와 교회는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습니다. 주님은 완전하시고 영원히 순결하시며 거룩하십니다. 그러나 교회는 불완전하고 그 구성원들의 죄로 물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인 이 교회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티 없이 아름다운 완벽한 모습으로 나타난 때가 있을 것입니다.(엡5:27; 계21:2), 하지만 그 크고 영광스런 날이 이를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종들은 죄와 싸우며 고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4:19).
그런데 이 고난은 헛된 것이 아닙니다. 해산의 고통은 생명과 새로운 세계를 펼쳐 줍니다. 그러므로 그 고통 속에는 이미 보상과 기쁨이 배태(胚胎)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는 고통이란 결국 그리스도께로 가는 보람있는 산고(産苦)입니다.

바울의 메시지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고통들을 견디고 자기의 생명까지 기꺼이 던지겠다고 공언하였습니다. 그럼 그가 말하는 복음의 메시지는 어떤 것일까요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1:26,27).
여기서 복음은 ‘비밀’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골로새 교인들은 복음을 이방 신비(밀의)종교와 연관지어 생각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의 이교들은 신비 종교와 관련된 것들이 많았는데 아마 골로새의 종교 생활에 영향을 끼치던 종파들도 신비 종교의 일종이었을 것입니다. ‘신비들’이란 상징적인 의식들을 가리킵니다. 신비 종교가들은 이것들이 생명이나 죄의 기원을 밝혀주고 사후의 행, 불행을 설명해 준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바울은 아덴에서 고린도로 가는 길에 엘루시스(Eleusis)도시를 지나갔습니다. 이곳은 신비 의식들을 행하는 유명한 타운이었는데 ‘완전한 자들’ 이라고 불리워지는 특수 엘리트들이 비밀 교리를 받는 대신전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신비’니 ‘완전’이니 하는 어휘들을 의도적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한 말들은 신비 종교의 술어들이었습니다. 일부 골로새 교인들은 이방 신비 종교의 교리나 의식들을 차용하면 기독교를 더 보강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비밀’(신비)과 이교의 신비들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모릅니다! 복음에는 사실상 비밀이 없습니다. 복음은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받는 모든 자들에게 ‘이제는 드러났습니다. ’ 이 복음은 세상 끝까지 알려졌습니다. 복음은 신비종교와는 달리 소수에게만 해당되는 비밀스럽고 해득하기 어려운 가르침이 아니고 누구에게나 게시된 명백한 메시지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각 사람’이란 말을 세 번씩 반복하여 강조하였습니다. 이 복음의 ‘비밀’은 사랑과 은혜와 지혜의 하나님이 여러 세기에 걸쳐 보존하셨다가 이제 우리 모두에게 드러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은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 특별히 머리가 좋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돈이 많아야만 복음을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함만 있으면 복음은 쉽게 이해되고, 자신의 필요를 아는 마음만 있으면 복음을 그냥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조명에 의한 것입니다.
이 복음의 ‘비밀’은 유대 국가에만 행당되는 특권으로 제한되지 않고 이방인들에게도 선포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도 복음을 깨닫고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복음은 교뢰나 의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체를 가리킵니다. 이 큰 진리는 본문에 나온 ‘이 비밀의 영광’이라는 말에서 뚜렷이 드러나 있습니다. 구약적인 용어에서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킵니다. 이 영광은 하나님의 가시적인 시현인데 신약의 문맥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말합니다. 이 영광은 이스라엘만이 누리는 특권이었지만 이제는 모든 나라의 백성들에게 제시되었으며 그리스도를 믿는 열국의 성도들 가운데 지금도 임재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목적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1:27).
바울은 자신이 교회를 위하여 사역하는 목적을 설명하기 전에 ‘우리가 그를(그리스도) 전파’(28절)한다고 먼저 전제하였습니다.
‘각 사람을 권하고 … 가르침’
이 두 측면의 상호 보완적인 바울 사역은 그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준 비슷한 말씀과 비교해 보면 그 뜻이 더 명료해 집니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행20:21).
회개가 없으면 구원도 없습니다. 회개가 없으면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에도 발전이 없습니다. 처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만 회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그리스도인이 주 안에서 살아가는 일생 동안 늘 행해야 하는 의무이며 그에게 주어진 은혜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 ’(요일1:8,10).
그러므로 죄와 오류를 정죄하고 회개를 가르치는 일은 하나님의 종들이 지닌 사명의 일부입니다. 이 일은 어렵고 감사받지 못하는 사역이지만 절대로 필수적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전에 에스겔 선지자에게 다음과 같은 엄숙한 경고를 하셨습니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을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속에서 찾을 것이고’(겔3;18).
바울도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반향(反響)[①반사하여 들림, ②다른것이 미친영향]하고 있습니다.
‘내가 …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전9:16)
바울의 사역은 또한 회개로 청소된 삶의 터전 위에서 믿음의 집을 짓고 성도의 실천 생활을 하도록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지식에서 출발합니다. 이 신앙 생활의 질은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에 대한 끊임없는 갱신된 지식에 달려 있습니다(골1:9,10) 참 지식은 참 믿음을 일으키고 자라게 합니다. 행위로 나타나지 않는 비생산적인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약2:26)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1:28)
바울은 맹목적인 믿음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망상적이거나 미신적인 믿음을 원치 않으시며 제대로 잘 생각해 보지 않은 신앙도 바라지 않습니다. 뽁음은 그 자체가 ‘지혜’(고전2:6)입니다. 비록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에 기반된 것이지만 그렇다고 눈이 먼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일체의 성장 과정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같은 믿음은 우리들이 마음과 정신으로 하나님을 아는 일에서 나옵니다. 이처럼 계속해서 성장해 나가는 지식이라야 어린 그리스도인을 어른으로 자라게 합니다. 구원은 우리들이 거듭날 때에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편에서는 이미 완성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들 편에서는 하나의 연속적인 과정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사역 목적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28절)이었습니다.
‘완전한자’란 당시의 이교에서는 밀의(비밀)종교에 입교한 자들로서 다른 사람들 보다 월한 신도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는 미숙하지 않은 성숙한 어른이란 뜻입니다. 바울은 아마 이 후자의 뜻으로 본 어휘를 사용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시키려고 애쓴 듯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새 백성들은 누구나 ‘귀족’들입니다. 역설이지만 그들에게는 다른 사회 계급이 없습니다.! 교회를 형성하는 모든 구성원들은 비록 영적 성장의 단계가 각기 다르더라도 하나님께 왕들과 제사장들입니다(계1:6).
이 사실은 바울이 주장하는 집단적 측면의 완전의 개념과 일치합니다. 바울은 완전한 영적 성숙에 이르도록 ‘각 사람을 권하고’ ‘각 사람을’ 가르쳤습니다. 그의 목적은 교회 내에 엘리트를 기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소수의 재능 있는 교인들만 뽑아서 정상으로 데리고 가고 나머지 회중들은 방치해 버리는 일에는 무관한 사역자였습니다. 그는 교회의 모든 가족이 영적 성숙을 향해 전진하도록 보살피고 훈련시키는 것을 사역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성령께서는 이것을 사용하여 교회의 존속을 다져주고 교회가 이 세상에서 신실한 증인으로서 빛을 발하게 할 것이었습니다.
이같은 큰 여망은 바울로 하여금 영적 산고(産苦)의 아픔과 고난을 견디게 하는 원동력이었습니다(고후4:7-12 ; 12:14,15)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1:29).
우리들은 하나님의 지녀들로서 복음의 영광스런 풍성함을 얼마나 인식하고 있습니까 우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완전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까 우리들은 다른 형제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숙해 질 때까지 사랑으로 바로 잡아주고 지혜로 가르치고 있습니까 우리들은 교회가 하늘의 신랑 앞에 점도 없고 흠도 없이 나타나도록 고난을 기꺼이 견디면서 나의 지역 교회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 전체를 사랑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들도 그리스도의 고난과 기쁨이 무엇이며 영광의 소망인 복음의 풍성함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