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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를 위한 투쟁 (골 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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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교회라면 다 그렇듯이 골로새 교회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를 사랑하는 모든 목회자들이 그러하듯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 고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교회는 병드는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종들이 고통을 받습니다. 이 두 측면은 이 세상에서는 피할 수도 없고 떼어 놓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들은 지난시간에서 교회 전체에 대한 바울의 고난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싸워야 했던 한 특정된 투쟁을 읽게 됩니다.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힘쓰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2;1)

골로새 교인들과 라오디게아에 있는그들의 형제들은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에게서 복음이 존숭되고 열매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건전한 믿음을 가졌었고 서로간의 사랑도 진실했으며 실제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무엇인가 색다른 것을 희구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들은 변화없는 일상사에서 권태를 느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거짓 교사들이 쉽게 약속해 주는 ‘보다 심오한 것들’을 알고 싶은 유혹을 받고 그런 체험의 스릴과 교리를 갈구했을지 모릅니다.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공교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2:4)

각 시대마다 교회에 불만을 가진 자들을 유혹하기 위해서 영적 생활의 심화나 더 발전된 가르침을 제공한다고 선전하는 여러 형태의 운동들과 종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서적들을 읽고 교리 강죄를 들으면 누구나 우월하고 심도 깊은 지식을 얻을 수 있으며 개인과 세계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다고 당당히 주장해 왔습니다. 교회는 아직도 분명히 불완전하기 때문에 이러한 그릇된 주장들에 귀를 기울이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항상 지니고 있습니다.

골로새 교회는 보다 색다르고 원색적이며 신비적인 사물들에게 관심이 쏠리면서 차츰 교회 분위기가 달라지는 듯하였습니다. 바울은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골로새 교인들에게 미치는 이같은 영향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한편으로는 기도에 진력하고 또 한편으로는 고롤새 교인들을 편지로 경고하였습니다.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우선 교회 내의 분위기와 회중들의 성격에 영향을 주려고 시도하고 그 다음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절대 충분성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이 후자의 주제는 그의 메시지의 중심 사상입니다.

골로새 교회의 분위기

바울은 먼저 간접적인 접근을 하여 골로새 교회 내부의 분위기를 다룹니다. 세균에 의한 질병을 가름하는 요인들은 박테리아의 존재와 환자의 전체적인 건강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런 질병의 치료는 세균과 싸울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건강증진에도 힘써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질병은 더 심해지기 쉽습니다. 영적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이나 교회의 전반적인 건강이 좋지 못하면 이단들이 서식할 수 있는 사육장이 쉽게 마련됩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색다른 경험을 원하는 원인의 하나는 불만감이라고 진단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이 ‘마음에 위안을’(2:2) 받도록 간곡히 기도하였습니다.

섭섭함, 근심, 슬픔이 없으면 불만감이 생기기 쉽고 흔히 특수한 체험이나 기적적인 치유를 갈구하게 됩니다. 예컨대 죽은 사람에 대한 염려 때문에 어떤이들은 무당들을 통해 초혼제(招魂祭)를 올리고 죽은 영들과 접촉하려고 합니다. 사울 왕도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을 얻으려고 강신술사를 찾았습니다.(삼상28:5-25). 오늘날도 기독교가 자기들의 필요를 충족시켜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이런 저런 종파나 그릇된 집회들을 찾아 다닙니다. 또한 병자들은 그들의 하늘 아버지의 임재에서 평강이나 위안을 받을 수 없어서 보다 적극적인 해결책으로 신유 전문가들에게로 걸음을 옮깁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만으로 부족합니다. 그래서 어떤이들은 육신의 치유를 주장하고 또 어떤이들은 물질의 축복이나 ‘영적’ 유익의 타산성을 따지기도 합니다.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92:2)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하나님의 평강으로 위로와 보호를 받기 원하였습니다(빌4:7). 염려와 두려움은 나쁜 상담자들입니다. 이것들은 위험한 오류로 빠져들게 하는 거짓된 위안자들과 헛된 위로거리에 시선을 끌게 합니다.
분열도 교회에 오류가 침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줍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사랑 안에서 연합’(2:2)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오류를 막는 가장 좋은 처방의 하나는 사랑 안에서 굳게 연합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에서도 비슷한 권면을 하였습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빌2:2-3).
우리가 배타적인 그룹을 형성하면 잘못되기 시작합니다. ‘초 영적인’(교인들은 그들의 수준에서 볼 때 다른 형제들이 비영적이고 거룩하지 못하기 때문에 언제든지 교회를 갈라놓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만일 회중의 다수파에 속했다면 ‘형편 없는’자들을 백안시해 버리고, 만일 그들이 소수파에 속했다면 그들의 형제들을 서슴없이 떠나서 ‘휠씬 더 영적인’ 무리들과 합세해 버립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3-5)
이것이 곧 연합의 비결이며 오류에 막는 강력한 보루입니다.
영적 식별력의 결핍도 교인들이 오류에 빠지는 원인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2;2) 가도록 힘써 기도하였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누구도 거슬리지 않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이 생각하는 연합은 대가에 상관없이 성취되는 맹목적인 연합이 아닙니다. 이 연합은 진리에 근거해서 바르게 보고 정확하게 판단하는 영적 식별력에 의한 일치를 말합니다.
영적 영역에서 볼 때 오늘날보다 영적 분별력이 더 필요한 때는 없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요일4:1).
소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교회가 오류를 분간치 못하고, 이를단호히 정죄치 않으며, 그것으로부터 과감히 떠나지 못할 때마다 기독교는 그 만큼 약화됩니다.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2:7) 감사와 찬송도 오류를 방지하는 데 매우 유익한 수단이 됩니다. 감사할 줄을 모르고 항상 더 요구함 하는 것은 근본적인 오류의 일부입니다. 그런 자세는 은혜와 구원과 진리의 선물이 얼마나 비싼 대가를 치룬 것인지를 잘 모른다는 중거입니다. 그래서 감사와 찬송이 없는 마음이 오류의 한 원인이 됩니다. 한편 이러한 하나님의 선물들을 귀히 여기고, 그 뜻을 잘 개달아 알며, 진실된 마음으로 늘 감사하면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 머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불평 대신에 ‘감사함을 넘치게’하는 생활을 하십시오!
교회가 그릇된 교리의 침입을 막으려면 바울이 위에서 언급한 대로 격려와 연합과 영적 식별력과 감사가 넘치는 분위가 조성되어야 합니다.

골로새 교회에 주는 메시지

위에서 우리들이 살펴보았듯이 교회가 건전한 교리를 유지하려면 역시 건전한 내적 분위기가 마련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올바른 분위기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정확하고 균형잡힌 건실한 가르침이 있어야 합니다. 이 가르침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비밀에 대한 계시, 곧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2:3)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것입니다.

바울은 곧 이 말씀의 뜻을 우리들에게 설명해 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모든 믿음의 내용이 그리스도 안에 집약되었다고 이미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들의 모든 정서적 필요가 충족됩니다. 신비주의에 기룽어지는 교인도, 실제적인 믿음의 측면에만 관심이 있는 교인도, 지적인 교인도, 비지적인 교인도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만족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 보다 더 풍성한 체험이나 더 높은 짓기이나 더 깊은 신비의 영역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는 지식이나 깨달음의 내용처럼 우리들에게 요긴하고 더 유용한 대치물은 세상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자는, 더 정확하게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소유된 자는,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자신의 짓기이나 행복이나 체험을 늘리려는 희망에서 시선을 딴 데로 돌리는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아는 자기 아닐런지 모릅니다. 그런 교인은 아직 그리스도를 바르게 아는 자가 아닐런지 모릅니다. 그런 교인은 아직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만났지만 아직 주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혹은 더 이상 주님을 참되게 대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어떤 책의 목차를 대강 훑어 보았다고 해서 그 책을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사람을 한두 번 만났다고 해서 그 사람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사람을 알려면 그 당사자와 함께 시간을 보내어야 하고 같이 살아 보고 동역해 보아야만 그 사람의 감정이나 사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행2:6)
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당신이 출발햇던 그 길을 계속 걸어 가십시오!
바울은 학식이 매우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만년에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짓기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빌3:8)
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성경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자기 생애 속에서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빌3:10)
하였습니다. 이런 생활은 주님과 호흡을 같이 하며 주님과 함께 승리하면서 주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입니다!
‘그 안에서 행하라’(2:6) 는 말은 그리스도와 ‘함께’ 만이 아니고 ‘그분 안에서’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곳 저곳으로 다니며 새로운 스릴을 찾아 방황치 말고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 굳게 서서’(2:7) 이미 받은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사상이나 별다른 가르침을 찾지 말고 ‘교훈을 받은대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에는 보완 작업이 필요치 않습니다. 사실상 복음에는 첨언(添言)의 여지가 없습니다. 사사로운 계시나 별난 체험들이 끼여들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성경 공부나 영적 성장은 복음에 뿌리를 둔 깊은 차원이어야 합니다. 복음은 오래된 진리이지만 항상 새로운 것이며 모든 지혜와 짓기의 보고입니다. 성경 공부와 영적 성장은 또한 실제적인 차원이어야 합니다. 참된 지식은 우리들이 아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순수하게 순종으로 옮길 때에 불어납니다.

골로새 교인들은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새로운 철학이나 새로운 신비주의나 혹은 새로운 율법주의에서 더 나은 것들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영원한 복음만이 우리 인생의 깊은 염원을 충족시켜 줄 수 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 양심과 이성과 온갖 필요를 채워 줄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을 충만케 하실 분은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구원이시며 충만한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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