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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김, 그 둘째 (삿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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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1장은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영토를 이미 분배해서 나누어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땅의 거민들을 다 내어쫓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지난 주에 이스라엘이 남겨 둔 우리와 신앙이 그들에게 ‘가시가 되고 올무가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이 울어 버렸다는 말씀을 배웠다. 사사기를 처음 읽을 때 서론으로 나오는 1,2장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지 않으면 전체적인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에훗, 기드온 같은 인물만을 영웅시하게 된다.
여호수아 24장에서 여호수아는 자신의 죽음을 앞에 두고 이스라엘의 신앙을 살펴보니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치떨리는 심정으로 ‘너희가 오늘날 섬길 자를 택하라.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했을 때 이스라엘은 너무나 쉽게 ‘우리도 그렇게 하겠습니다’말한다. 너무나 심각한 문제 앞에서 너무 쉽게 말해 버리는 그들을 보며 여호수아는 ‘너희는 결코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선언한다. 결국 여호수아는 몇번에 걸쳐 그들에게 다짐을 받고 돌을 세우며 굳은 맹세하도록 한다.
사사기 1장에서 이스라엘은 가나안 일부 거민이 철병거를 가졌기 때문에 그들을 물리칠 수 없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그러나 우리는 이 말에 속으면 안된다. 그들은 쫓아내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출애굽 사건을 음미하면서 가나안이 갖는 상징적인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예수를 믿자마자 우리가 들어가 있는 곳은 그리스도 안에 사는 생활, 그래서 거기는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몸이기 때문에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서 원래 그 곳에 텃세를 부리고 살던 육체와 정욕을 몰아내는 싸움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두가지의 상징이 있다. 가나안은 이미 들어와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전쟁이 있는 곳이다. 그들과 타협하지 말고 언제나 ‘다 몰아내라’ 하나님은 요구하셨고 또 그것이 ‘가능하다’고 약속하셨고 그것을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보여 주셨다. 여리고성은 손 한번 대보지 않고 무너뜨렸다.
이스라엘은 처음 가나안 입국을 시도할 때 ‘그곳 백성을 보니 그들 앞에 우리는 메뚜기와 같았습니다’말하며 못들어 간다고 버티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철병거가 있어서 쫓아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정확하게는 쫓아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 말씀은 다른 말로 해서 이방인들의 생활풍속과 그들이 섬기는 이방신들과 그들의 죄악된 삶의 태도가 좋았다는 것이다. 사사기 2장에서 하나님은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다’고 하셨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빛보다 어두움을 더 좋아하여 빛을 배척하였다’고 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좇지 않았다. 하나님이 사자를 보내어 그들을 다시 쫓아내지 않고 그들로 하여금 ‘너희에게 올무가 되고 가시가 되게 하겠다’하셨을 때 이스라엘이 울었다. 그들의 태도는 잘못에 대한 회개가 아니라 ‘우리는 할만큼 했는데 하나님 우리가 무엇을 잘못해서 화를 내십니까’ 하는 식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너무 울어 그 땅 이름이 ‘보김(우는 자들)’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제사도 드렸다. 그러나 이 제사는 결코 회개의 제사는 아니었다.
성경에는 아주 대조적인 선지자 둘이 나온다. 아모스와 호세아가 그렇다. 호세아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이다. 그런데 아모스는 언제나 ‘심판’을 선포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모스를 싫어했고 호세아를 좋아했다. 우리가 분명히 확인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나를 만족시켜 주는 것이 최선이 아니다. 내가 고쳐야 할 것은 고치고 내가 전진해야 할 곳을 전진하도록 성경은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야말로 여기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백성이다.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의 최고의 약점은 자기가 ‘설정한 일’을 해놓고 ‘할만큼 했다’고 우기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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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 생각에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고 정당하게 산다고 믿고 하나님 쪽에서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백성이기 때문에 이 백성을 깨우쳐야 하는 일, 곧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서게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회초리를 들 수 밖에 없었고 그들은 맞으면서도 왜 맞는지 모르고 억울하다고 밖에는 대답할 줄 모른다. 하나님과 이 답답한 인생들 간에 벌어지는 비극이 사사기이다.
사사기의 한 장면을 통해 살펴보자.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의 목전에 악을 행하므로 여호와께서 모압 왕 에글론을 강성케 하사 그들을
대적하게 하시매 에글론이 암몬과 아말렉 자손들을 모아 가지고 와서 이스라
엘을 쳐서 종려나무 성읍을 점령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왕 에글론
을 십팔년을 섬기니라(삿 3:12-14)”
후에 에훗이라는 사사가 모압 왕 에글론을 죽인다. 재미있는 부분은 모압 왕 에글론이 암몬과 아말렉을 데리고 와서 이 싸움을 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모든 적군이 이 사실의 조명기구로 등장한다. 모압과 암몬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딸들이 아비와 동침하여 낳은 자식들의 후손이다. 여기에 나온 아말렉은 에서가 첩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다. 이 모든 사건을 종합해 볼 때 가나안 전쟁, 사사기에 나타난 전쟁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것은 그 싸움은 외부의 적과의 싸움이 아니라 내부의 적과의 싸움이라는 것이다. 같은 혈통, 집안 싸움이기 때문이다.
가나안 땅, 이미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어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기도 전에 열 두 지파가 지도를 놓고 나누어 가진 사건을 아는가 가나안은 이미 완전하게 그들에게 허락된 땅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쫓아내야 할 죄악의 뿌리들과 습성들이 득실거리고 있는 게 사실이다. 왜 성경은 언제나 육체라 표현하고 혹은 세상적이라고 표현하고, 죄라고 표현하는가 ‘육체들, 세상적인 것을, 죄를 좇지 말라’가 다 이 이야기이다. 우리가 나중에 부활할 때 영만 부활하지 않는다. 우리의 몸이 부활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우리 육체까지도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몸으로 깨끗하게 씻기시고 완성케 하시는 작업이다. 싸움은 죄에 찌들고 길들여 있는 나의 모든 습관을 부수고 몰아내는 싸움이다. 그런데 그게 하기 싫다. 알면서 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내가 나를 쳐 복종시킨다’고 하였다. 눈이 범죄하면 눈을 뽑고, 손이 범죄하면 손을 찍는 각오로 싸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사기의 기록은 우리 자신들의 기록이 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뜻은 구원에 있다. 그릇된 길로 빠진다 하여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신다. 두들겨 패서라도 돌아오게 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찾는 가장 큰 이유는 아무리 바알과 아세라에게 아무리 외쳐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데 있다. 블레셋이든, 암몬이든, 모압이든, 미디안이든 이들은 이스라엘을 쳐서 항복시키려고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들을 깨우치게 하기 위해서 든 회초리이다. 회초리 앞에 아무리 빌어도 회초리를 든 분을 달래기 전에는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사사기의 교훈이다. 모든 신앙인들이 걷고 있는 최고의 아픔의 악순환이다. 사사기의 기록은 우리의 기록이다. 쫓아내야 할 적들을 쫓아내지 않고 사는 현대인들의 뼈아픈 ‘죄에의 기댐’이다. 에훗은 모압왕 에글론을 칼로 찔러 죽였다.
“에훗 후에 아낫의 아들 삼갈이 사사로 있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
백명을 죽였고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삿 3:31)”
에훗은 어쩌다 칼을 하나 구해서 그것을 숨겨 가지고 가서 에글론을 죽였고 모압 사람 일만명 가량을 죽였다. 삼갈은 소 모는 막대기로 육백명을 죽였다. 이런 한 뛰어난 전과는 결국 사사 개인의 우수성에 있지 않다. 하나님만 섬기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우상을 숭배함으로 그 큰 고생을 사서 한다는 것이다. 사사라는 어떤 하나님을 의지하는 용사가 나와야 비로소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들 앞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축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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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그렇지 않는 것을 섬기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들 앞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축복이며 그렇지 않는 것으로 무슨 일을 당하는가를 가장 대표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한 사람을 들어 쓰는 것이다.
“그 날에 모압 사람이 이스라엘의 수하에 항복하매 그 땅이 팔십년 동안 태평
하였더라(삿 3:30)”
‘기드온 살아있는 동안 그 땅이 평안하였더라’ 그러나 기드온이 지키고 있는 동안 ‘못왔다’가 아니라 기드온으로 말미암아 펼쳐진 그 메세지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섬겨야겠다. 눈으로 보고 그 편을 들더라’ 이것이다. 그 기억이 있는 동안 하나님 편을 드는 동안은 하나님이 보호하신다. 그 기억이 사라지고 또 다시 다른 신을 섬기면 다시 채찍에 맞을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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