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아비멜렉 (삿 09:7-15)

첨부 1


기드온은 70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것도 아들만 70명이었고 또 세겜에 있는 첩 사이에 아비멜렉이라는 아들 하나를 더 두었다. 기드온이 죽은 후에 세겜에 사는 사람들이 아비멜렉과 결탁하여 그를 왕으로 추대한다. 아비멜렉은 배다른 형들 70인을 다 죽였다. 그중에서 유일하게 요담이라는 아들이 죽음을 면하고 아비멜렉과세겜 사람들을 저주한 내용이 오늘 본문이다. 요담의 저주대로 아비멜렉과 세겜성 사람들 사이에 다툼이 생기고 서로 찢고 싸움을 벌이다 둘다 망하게 되었다.
사사기는 유명한 위인들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 책이 아니다. 드보라. 입다. 기드온 이런 사람들을 자랑하기 위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왜 이런 사람들을 비상수단으로 동원해야 했는가 하는 이스라엘 국민의 당시의 신앙생활과 그들의 실수, 영적상태 등을 날카롭게 지적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사사기에서 드보라나 기드온이 잘난 것이 아니라 오죽했으면 하나님이 이런 사람들까지 세워 쓰셨는가 하는 뜻으로 등장했다고 말씀을 드렸다. 어떤 사람을 세웠는가가 문제가 아니다. 그런 사람에게 배울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사람이나마 써야만 했던 하나님의 마음, 그리고 이스라엘의 형편’을 우리가 살펴 보아야 한다. 사시기를 우리가 읽으면서 꼭 놀라야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한 인물을 세우셨을 때의 이유하고, 단 그 인물을 반대로 쓰셨을 때의 이유를 알아야 한다. 한쪽을 들어 쓰셔서 이쪽을 무참하게 만드시는 방법이 있다. 드보라를 세우고 기드온을 세워서 이스라엘 민족을 부끄럽게 하신 방법이 하나 있다면 이스라엘 민족자체의 실수를 그대로 까 놓으신 장면도 있다. 그것이 아비멜렉의 사건이다. 그들이 어떤 미련한 짓을 하고 있는가를 그냥 뒤집어 보이신 것이다.
아비멜렉은 기드온의 아들이다. 아비멜렉은 ‘내 아버지는 왕’이라는 뜻이다. ‘나의 아버지가 왕’이면 그의 아버지 기드온이 왕이 된다. 이 왕 문제는 기드온 사건에서 매우 중요하다.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기드온
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
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삿 8:22-23)”
이스라엘이 기드온에게 왕이 되어 대대로 우리를 다스려 달라고 했을 때 그는 나와 내 자손은 결코 왕이 되지 않으리라고 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이 아비멜렉이 된 것으로 보아 그 이름은 기드온이 지어준 이름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기드온 사건을 이야기 할 때에 확인한 것을 다시 점검해 보자. 이스라엘 민족이 왜 왕을 요구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계시는데 왜 왕을 요구하는가 그들은 항복할, 신앙할, 경배할 대상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네들의 삶의 원리와 목표를 놔두고 그것을 보장해줄 ‘집지키는 사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기드온은 그것을 거부했고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것을 거듭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비멜렉의이름은 ‘나의 아버지는 왕’이다. 결국 자신이 왕자이고 나아가 왕이될 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세겜 사람들과 싸우고서 서로 왕이 되고 보호하는 자리에 들어간다. ‘세겜백성’은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한 유형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으로 왕삼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이에 대하여 요담이 저들의 잘못과 장래에 대하여 저주로 예언한다.
나무들이 모여서 감람나무와 무화과 나무, 포도나무에게 차례로 왕이 되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이 나무들은 다같이 거절했다. 제일 마지막에 가시나무는 그것을 허락해서 저들의 왕이 되었는데 ‘서로가 서로를 불살라 태워 죽이는 비극으로 그치고 말았다’하는 비유를 들고 있다. 이 비유는 상징하는 바가 크다. 나무는 자기를 방어할 능력을 전무한 존재이다. 그는 식물이기에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없다. 그러나 보라. 자연계를 보면 동물계보다 언제나 식물계가 무성하다. 방어력이 없기 때문에 식물계가 먼저 망해야 옳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그 이

-21-
유는 단 한 가지이다. 스스로의 방어력을 다른 면에서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식물의 방어력은 ‘식물의 존재가치’로 말미암아 생긴다. 식물을 없애면 모두가 살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식물은 존재할 수 있게 되었고 스스로를 보존할 수 있다. 과실을 가지고 살펴보자. 식물이 갖는 열매 때문에 아무도 쉽게 나무를 잘라버리지 않는다.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일 때는 그늘이 필요하다든지 하는 이유 때문에 나무들을 가치있게 보존하고자 하는 것이다. 농부되신 하나님께서 각각의 나무들을 보호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 존재의 이유와 가치와 목적이 무엇이냐 너희들이 너희 생의 목적을 정하고 그 목적을 너희 힘으로 완성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너희가 잘못가고 있는 것이다. 너희 본분과 존재를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요담이 나무 비유를 통해 신랄하게 꼬집고 있는 것이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는 것을 예수만이 대답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그 답을 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진리라고 할지라도 각자가 항복하기 전에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 인생의 최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증명되는가 각자의 지위와 수준으로 일차적으로 증명된다. 자녀가 잘되면 그것이 본인에게는 축복이지만 부모에게는 영광이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라고 하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의 가장 아름답고 충만한 모습을 개발시킬 수 있고 만개시킬 수 있는 분으로서의 요구이다. 하나님 안에 들어와 순종하고 그분 말씀대로 산 사람만큼 아름답고 멋있고 강하고 영광스러운 사람은 없다.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뜻이다.
사사기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인간의 죄악된 성품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약속한 영광의 자리보다는 내가 결정한 운명의 길을 가고 싶은 고집이다. 신자는 ‘하나님이 나보다 높다’는 것을 아는 사람을 일컫는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치 않고 자기 운명에 관한한 자기가 주인인 사람도 있다. 그러면서도 거짓말하지 않고 깨끗하게 산다. 스스로 자고한 사람이다. 그는 자기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이다.
사사기가 집요하게 다루는 것, ‘너희는 누구를 왕으로 요구하고 있는가’ 이것 하나이다. ‘당신의 삶은 무엇을 향하여 어떻게 뛰어가고 있는가 누가 정해 주었는가 누구의 방법으로 좇고 있는가’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이 사사기 9장이다. 우리는 종종 ‘성공이라는 단어에 집착한다. ‘당신이 지금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 당신의 사업이나 기업을 위해 하나님이 등장하고 있지 않은가 당신 가정의 안녕과 질서를 위하여 성경책이 도입되고 있지는 않는가’
하나님 앞에 항복하여 그가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그가 ‘어디로 가라하시든지 가겠습니다’하는 것에서 요구된 상황으로 내 가정과 사회와 직장과 인생이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오직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과만 연대하고 연합하라. 각자가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가 있으며 하나님 말씀 앞에 내가 지금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그 한 가지 사실 외에 우리가 신경 쓸 것은 없다.
“저는 아비멜렉 안하겠습니다. 저는 그저 하나님의 종, 지팡이, 청지기 이런 것들만 하겠습니다” 이 결정을 내려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로 결정하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여러분의 인생을 꺼내놓아 그 길이 순탄한가, 안한가의 문제가 아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라.

-22-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