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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볼 수 없는 존재 (딤전 06: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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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 있어서 신앙의 시야는 교회에서 이웃과 사회로 광대하게 넓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전 인류의 죄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기에 이렇게 불신자들의 영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경향은 대단히 중요하고 귀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문제는 세상사람들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좋으나 때로 신앙과 복음이 약화되고, 세상에 의해 재해석되는데 큰 문제가 있습니다.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은 永遠自存者(영원자존자)요, 全知全能(전지전능)하시다는 변개할 수 없는 하나님의 존재성마저 오늘날의 신학세계에서는 흔들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것은 대단한 위기라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에 대한 부정』은 전에도 철학자 『니이체』가 그랬을 뿐만 아니라, 『프로이드』『칼 맑스』도 그 존재에 대한 도전자요, 19세기 중엽의 『꽁트』는 실증주의자로서 볼 수 없는 신의 존재를 부인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의 몇몇 신학자들은 『신이 없다』고 그 존재를 부정하기보다는 『신이 죽었다』고 말합니다. 에모리대학의 『해밀턴』이라는 교수는 『신은 우리 시대와 역사 속에서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한 『그 신은 인간이 죽인 것이 아니라 신 자신이 죽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들은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영적 존재에 대하여 直覺觀念(직각관념)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보이는 것 그러나 없어지는 것만 인정합니다.
성경에 보면 영적 존재는 천사이거나 마귀이거나 스랍이거나 죽지 않는 존재입니다. 하물며 요한복음 4:24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라고 했듯이 모든 존재(영적이든 육적이든 간에)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은 그 본질이 죽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에 보면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영이신 하나님이 죽는다는 사상이 불합리하고 비진리임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자연과학으로 증명이 되지 않는 존재에 대해서는 그 존재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實證主義者(실증주의자)에 불과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들은 신을 찾아도 현미경이나 망원경에 나타나는 신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는 인정하지만 신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즉 현대의 급진주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예수는 역사적인 인물로서의 인간 예수요, 예수를 통해 그들이 느끼는 매력도 윤리적인 차원 또는 교훈적인 차원에서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 즉 구세주로 믿지 않습니다.
주님의 제자인 베드로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피곤해 하시는 모습도 보았고, 음식을 드시지 못했을 때 주리신 모습등 참으로 인간적인 모습을 누구보다도 많이 보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시는 주님의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나이다』라고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영이 알도록 가르쳐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는 모습이 나옵니다. 가인은 농사군으로서 농사지은 식물로써 제사를 드렸고, 동생 아벨은 양치는 목동으로서 어린양을 제물 삼아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볼 때 아벨의 제사는 열납되었으나 가인의 제사는 열납되지 못했습니다. 왜 나름대로의 제물을 준비하여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는 열납되었고 다른 하나는 열납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근본적인 문제에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제사에 피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가인은 자신이 수고하고 노력한 댓가를 가지고 나가서 자신을 인정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수고와 노력을 통해 스스로 행복해 질 수 있고,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물질주의요, 인본주의자들의 표상입니다. 한마디로 육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아벨은 어린양을 죽이는 피흘림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죄인됨을 인정하는 죄의식을 갖는 제사로써 하나님의 죄사함의 은총을 믿고 겸손하게 하나님께 엎드리는 神本主義(신본주의) 신앙의 표본이 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영에 속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손을 드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함께 멸망하리라』(사 31:3)
씩씩한 애굽의 정병들, 티끌을 구름같이 날리며 달리는 마병, 지축을 뒤흔드는 철병거, 당시 세계의 최대 강국이었던 애굽의 軍勢(군세)라면 최대의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서 33:9에서부터34:11까지를 보면 그 튼튼했던 애굽도 멸망당할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세상의 물질과 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의를 의지하게 되면 결국은 멸망당하게 될 것임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아야 합니다. 반드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있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사람들은 점점 죄악에 빠져 갔습니다.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마치 세상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줄 알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며 향락하는 일에만 열중하였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의 죄악의 소리는 하늘에 사무쳤고, 하나님께서는 대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살았던 노아와 그 가정 이외에는 깨끗이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제 우리 앞에는 더 큰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영원히 꺼지지 않고 영원히 죽지 않는 불의 심판입니다. 가장 비참한 멸망입니다. 이 심판은 『하나님은 죽었다』고 하며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자들에게 예외 없이 내려질 것입니다.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자에게 그날은 가장 축복된 날입니다. 新天新地(신천신지, 새 하늘과 새 땅)를 바라보는 날입니다. 이제까지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을 만나는 날이요, 가장 귀한 일은 주님과 상봉하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날을 바라보고 주를 앙망하는 생활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이사야서 40:30-31을 보십시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이렇게 하나님을 앙망하는 백성이 장차 들어가 살게 될 땅은 놀랍게 변화된 땅입니다. 이사야서 35:6이하를 보십시오.
『...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시라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거기 대로가 있어...』
하나님과 그 아들의 속죄의 피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꽃』이 피는 놀라운 일들도 일어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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