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너의 불안을 맡기라 (시 43:5)

첨부 1


최근 우리는 매우 다행한 소식을 들었습니다.북한과 미국의 3단계 회담이 합의 로서 마쳤습니다.우리는 물론 아시아 여러 국가들이 이 회담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무엇입니까.만일 북한이 핵을 보유한다면 일본을 비롯하여 아시아 여러 나라들도 어쩔수 없이 핵을 가져야 합니다.그렇게 된다면 언제 전쟁이 더질지모르는 긴장감이 아시아에 고조될 것입니다.다시 냉전시대가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모든 국가들은 불안과 두려움에 하루 하루를 보내게 될 것입니다.그러나 이제 다행히 그런 불안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지구상에 단 한군데 밖에 남지 않았던 긴장지대에 비로소 평화의 초석이 놓여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 시편 기자가 살았던 시대에도 역시 전쟁의 시대였습니다.이스라엘은 여러 나라들과 전쟁을 치뤄야 했습니다.이웃의 나라들은 호시탐탐 이스라엘의 비옥한 땅을 노렸습니다.이스라엘은 지중해와 애급으로 가는 요충지여서 목축업뿐 아니라 상업도로를 비롯하여 여러가지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그래서 경건한 신앙인들은 늘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했습니다.이방인의 손에서 지켜 달라고 간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을 보니 시인은 이런 기도를 합니다.“내 영혼아 어찌하여 낙망하며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고”이 시인은 무엇인지, 어던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불안에 쌓여 있습니다.
불란서의 어떤 사회학자가 말하기를 오늘의 시대를 『불안의 시대』라고 말했습니다.너무나 급속도로 변화하는 시대에 사람들은 적응하지 못하고 불안해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이 세상에 아무 불안이나 걱정, 두려움없이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그것은 신자나 불신자나 마찬가지 일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어떤 불안을 경험해 보셨습니까.여러분의 마음에는, 그것이 사회적이든, 환경적이든, 영적이든 혹 불안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이시간 우리의 모든 불안한 마음들이 평안하고 넉넉한 여유있는 마음으로 변화되는 축복의 시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심리학자들은 사람이 인생을 사는동안 겪는 불안의 종류가 280여 가지가 된다고 합니다.그것들을 정리하며 크게 다음의 몇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급겪한 환경의 변화에 대한 불안입니다.
대 부분의 사람들은 무모한 모험보다는 안정을 원합니다.하지만 우리는 날마다 들려오는 뉴스를 통해서 갑작스런 일들을 당한 많은 사람들을 봅니다.교통사고나 재난과 같은 것들입니다.엊 그제도 우리는 매우 안타까운 사고를 당했습니다.가족을 잃은 그들의 슬픔은 말로 형언할수 없을 것입니다.저도 성수대교는 자주 지나가지 않았지만 지금 보수하고 있는 원효대교를 불안한 마음으로 가끔 건넜습니다.아마 지금 한강다리를 건너고 있는 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을 조이며 건너고 있을 것입니다.
뿐 만아니라 우리 주위에서는 내 스스로 원치 않았던 급작스런 환경들이 찾아 옴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우리는 불현듯 소방차의 소리가 나면 혹시나 하는 생각에 집쪽을 바라보곤 합니다.
해마다 여름만 되면 바다가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태풍에 대한 불안을 떨쳐 버릴수 없습니다.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언제 갑자기 찾아올지 모르는 이상 기온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이런 급작스런 일들은 비단 사고 뿐이 아닙니다.사업이 부도가 나거나 직장에서 실직하여 물질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갑자기 자신에게 닥쳐 올지 모르는 이런 환경들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습니다.설마 나에게 그런 일이 오겠느냐고 한편으로는 안정시키지만 어느 누구도 이런 불안을 버릴수 없을 것입니다.왜냐하며 그런 일들은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닥치기 때문입니다.

질병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입니다.
질병 역시 보편적인 불안입니다.질병에 걸리기 원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지난 주에 히로시마에서 레스링으로 금메달을 딴 어떤 선수가 위암에 걸려 병원에 누워있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본 일이 있습니다.엊 그제 어떤 장로님을 만났는데 담석증초기의 증세 때문에 10일간 고통을 받았는데 100억과 건강과 바꾸라면 그렇게 하고 싶다며 자신의 괴로운 심정을 토로 했습니다.
한 2주 전에 저희 교단 총회가 있었는데 부산에 있는 병원에서 진료팀이 올라와서 목회자들 건강진단을 해 준다고해서 가 보았다가 그냥 왔습니다.얼마나 많이 줄을 섯는지 접수증까지 써서 기다리다 중간에 포기 했습니다.연약한 육체를가진 사람은 누구나 건강에 대한 관심을 갖게 마련입니다.
최근 사무실과 빌딩이 운집한 여의도나 강남의 역삼동 근처에는 건강을 위한 야채즙이라든지 녹즙,인삼즙등 건강 식품들이 많이 팔린다고 합니다.

모두가 질병에 대한 불안 때문입니다.주위에서 누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불안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특히 젊은 사람들의 경우는 덜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건강에 대한 불안은 더 해가기 마련입니다.본의 아니게 자식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까 염려합니다.

비난받을 것에 대한 불안입니다.
같은 성가대로 봉사하던 한 자매가 늘 독창으로 활약하던 친구에게 질투를 느껴 나는 네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인지 사람들의 박수 때문에 노래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그 후로 두 자매의 교제는 금이 갔습니다.한 자매는 찬양으로 모든 사람의 관심이 되었다는 자긍심을 공격했기에 그것을 방어해야 했고, 또 한 자매는 자신도 남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했기에 자신도 모르게 질투의 마음이 생겼던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자기 자신의 존재 가치를 느끼는것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필요로 하고 있고 사랑해 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신하면서도 사람이기에 다른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의 대상이 되기를 원합니다.따라서 그와 반대로 “혹 내가 사람들에게 외면 당하게 되면 어떻게 하나”“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실망의 대상이 된다면 어쪄나”“비난의 대상에 되면 어쪄나”“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어쪄나”“내 아내에게, 남편에게, 자식들에게, 필요없는 존재가 되면 어쪄나”하는 등의 불안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하는 것에 대한 불안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과는 대조되는 것으로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거나 떠나가는 것에 대한 불안입니다.특히 가족의 경우는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저도 어떤 때는 불현듯 고향에 계신 부모님이 염려 될 때가 있어서 전화를 하곤 합니다.아마 어머니의 입장에 있는 분들의 경우에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놓고 혹 집에 오다가 무슨 일을 만나면 어쪄나 하는 불안감에 안절부절 할 때가 있었던 경험들이 있었을 것입니다.특히 요즈음 같이 어수선한 사회적 분위기에서는 아마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예정된 시간에 돌아오지 않는 남편 때문에 잠을 못자고 불안했던 기억도 있을 것입니다.자식이 장성하여 결혼을 하게되면 부모들은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혹 며느리에게 사랑을 빼앗기지는 않을까 하는 심리를 가지게 된다고 합니다.
심지어 개를 사랑하던 사람들은 개가 죽으면 사람을 잃은 것 못지않게 슬퍼한다고 합니다.그래서 서양에서는 개의 묘비와 무덤까지 만들어 주는 사람들도 많다고 합니다.
사랑하던 것들을 잃지 않을까 하는 불안은 인간 모두의 공통된 생각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불안입니다.
어떤 학생이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저는 세상으로 나갔다가도 두렵고 불안해서 머물 수가 없습니다”.왜그러냐고 물으니 자신에게 심장병이 있는데 가지 말야야 할 곳을 가면 이상하게 심장병이 다시 재발되어 숨을 쉬기가 힘들어 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그렇게 무서운 분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만일 하나님께서 잘못할 때마다 사람을 징계하신다면 아마 믿는 사람들은 다 병원에 가야할 것입니다.하나님은 탕자의 비유에서 보듯이 오래 참으시는분입니다.하나님께서 징계하실 때는 그야말로 도저히 안될 때 쓰시는 비상수단입니다.그런 생각을 가지니까 스스로 부담이 되어 심리적으로 불안해서 더 병이 심각해 지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대 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멀리하거나 신앙생활을 게을리하면 자신에게 어떤 불행이 닥쳐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습니다.그렇다면 세상으로 자유롭게 부담없이 나가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하나님께서 나에 대하여 징계하시기에 앞서서 오래 참으신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하나님께서는 매를 들고 있는 아버지와 같이 때려서 두려움 가운데 우리를 그 분의 곁에 두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사랑 가운데서 나와 함께 있기를 원하십니다.나 자신 스스로가 하나님의 참으심과 사랑을 깨달음으로 하나님의 곁에 머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입니다.
시편기자는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고 했습니다.사람이 나이가 들고 늙는 것은 당연한 자연의 섭리입니다.그럼에도 사람들은 늙는 것에 대한 불안을 가지고 있습니다.여기 있는 우리 학생들은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생각이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늙는 것과 죽음에 대한 불안을 가지게 됩니다.
죽음에 대한 불안이야 말로 죄를 범한 인간이 겪는 가장 원초적인 불안입니다.더우기 불신자들은 죽음 뒤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더 불안한 것입니다.누군가 분명하게 죽음 뒤에는 어떻게 된다고 말해 준다면 어떤 대책이라도 세울 텐데 아무도 돌아와서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사람들에게 있어서 죽음에 대한 아쉬움과 불안을 갖는 이유는 죽음 뒤에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생각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던 사람들과 이끼던 것들과의 이별 때문입니다.얼마 후에는 천국에서 만나겠지만 잠시 떠나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슬픈 것 뿐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본문으로 돌아가서 이런 불안을 어떻게 해결하며 해방될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어 보십시다.

첫째는 하나님을 바라라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고 했습니다.『바라라』는 뜻은 하나님을 기대하며 바라보라는 의미입니다.사실 우리가 겪는 불안은 모두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일들입니다.미래는 사람의 주권이 아닙니다.인간의 미래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1분 후의 미래를 장담하지 못합니다.만일 서울 시내 1천만의 사람중 단 한사람이라도 1분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는 사람이 있었다면 성수대교의 인명 피해는 막을수 있었을 것입니다.그러기에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것에 대하여 불안해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오히려 그 불안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십시다.이제 앞으로는 남자들이 많아서 자칫 잘못하면 5명 중에 1명은 장가를 못갈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국민학생 아이가 장가못갈까봐 지금 부터 불안해 하면서 고민한다면 그 부모가 뭐라고 말하겠습니까.그것은 그때가서 생각할 일이니 지금 너는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를 예측할수는 있지만 그 어떤 사람도 앞으로 올 미래에 대하여 절대적인 책임을 질수 없습니다.물질도 명예도 인간의 미래를 책임질수 없습니다.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그러기에 본문은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을 버리고 인간의 미래를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내 얼굴을 도우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내 얼굴을 도우신다는 말씀은 내 형편을 도우신다는 말씀입니다.사람의 형편은 얼굴에 다 나타납니다.아무도 얼굴 빛을 속이지 못합니다.하나님은 내 형편을 아시고 나를 도우심으로 내 얼굴에서 근심과 불안의 빛이 사라지게 하시는 분이시기에 그 분만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야곱이 형을 만나려고 얍복강에 도착했을 때 도저히 그 강을 건너지 못했습니다.형의 복수가 두려웠습니다.얼마나 마음이 불안한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그래서 꾀를 생각해 냈습니다.형에게 선물을 먼저 보내고 그 뒤에 아내와 아이들을 보내고 자신은 맨 뒤에 건너가려는 생각을 했습니다.그래서 다 보내고 난 뒤에 혼자 남았는데 도무지 불안해서 견딜수가 없었습니다.강을 건널수가 없었습니다.그의 얼굴에는 온통 근심과 불안의 그림자가 덮여 있었습니다.그래서 그는 그 밤에 강을 건너지 못하고 밤새도록 강가에서 하나님이 보낸 천사를 붙들고 도움을 청했습니다.새벽 동이 틀즈음에 하나님은 그에게 평안한 마음을 주셨습니다.담대한 마음을 주셨습니다.“야곱아 내가 너를 도울테니 이제 불안해하지 말고 강을 건너가서 형을 만나라”하나님께서 그의 마음 가운데 주신 말씀입니다.브니엘을 지날 대 떠오르는 태양빛이 야곱의 얼굴을 비췄습니다.이제 그의 얼굴은 어제의 어둡고 불안한 얼굴이 아니라 아침햇살에 환하게 빛나는 자신감과 평강에 찬 얼굴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야곱과 같이 우리의 형편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의지 하십시다.그 하나님을 의지할 때 우리 속에 자리 잡고 있던 불안이 물러갈 줄로 믿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마음 속에 불안이 있는데 어떻게 찬송하라는 것입니까.찬송이 나올수 없는 형편인데 어떻게 찬송을 하라는 것입니까.그러나 말씀은 오히려 찬송하라는 것입니다.이 찬송은 믿음의 찬송입니다.내 문제와 불안의 걱정들을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하며 찬송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적어도 나를 부르신 하나님,나의 미래와 장래를 아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이미 나의 미래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인도하실 것이니 이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맡길 뿐만 아니라 오히려 찬송하라는 것입니다.
시38:8에는 이런 고백이 있습니다.“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얼마나 고통스런 마음입니까.피곤하고 지치고 미래는 불안하고 그래서 말조차 할 기운이 없어서 신음한다는 것입니다.이 시는 다윗이 원수들에게 쫒기며 어려운 환경들을 만나면서 고백했던 시입니다.39:13에서는 건강을 위해서 기도합니다.40:17에는 긍핍을 해결해 달라고 기도합니다.다윗은 20여 년의 세월을 이렇게 공포와 불안한 세월을 보냈습니다.그럼에도 승리할수 있었던 것은 미래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찬양을 하는 그의 신앙때문입니다.41:13에 그가 이런 곤혹스런 환경 가운데서도 뭐라고 합니까.“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송할 찌로다”라고 했습니다.
요즈음 주일 오후 2시에 청년들이 찬양예배를 드리는데 얼마나 은혜스러운지 모릅니다.불안이 찾아 옵니까.“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있으랴”“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영영부를 나의 찬송 예수인도 하셨네”“내 맘에 한 노래있어 나 즐겁게 늘 부르네 이 노래를 부를 때에 큰 평화 임하도다”이제 오히려 찬송을 불러보십시요.그 불안이 물러가고 평강의 물결이 밀려 올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에게는 어떤 불안과 두려움이 있습니까.직장과 사업 때문입니까.가정의 문제 때문입니까.자녀 때문입니까.건강 때문입니까.사실 모든 불안의 근본적인 원인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둘째 아담으로 오신 주님은 십자가서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하셨습니다.우리의 모든 불안을 해결하셨습니다. 자식을 군대에 보내놓고 아무리 잠을 못이루고 불안해 한다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미국으로 유학가는 비행기에 아들을 보내 놓고 “혹시 추락하면 어쪄나”하며 아무리 불안해 한들 해결 될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미래는 내 영역이 아닙니다.젼혀 불안없이 살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우리에게 찾아오는 불안들을 믿음으로 극복하라는 것입니다.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인간의 생사화복과 이 우주와 역사의 미래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맡기십시요.이제는 오늘 말씀과 같이 오히려 모든 일을 선히 인도하실 하나님을 찬송하십시요.불안과 근심들이 아침이 되면 어둠이 물러가듯 다 사라질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