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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유로 된 종 (갈 05: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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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대단히 귀한 것입니다. 참다운 자유는 아무리 높이 평가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한마디로 말해 투쟁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그 투쟁은 대부분 자유를 위한 투쟁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영국의 청교도혁명이나 명예혁명, 불란서의 대혁명, 미국의 독립전쟁이나 노예해방을 위한 남북전쟁등이 자유를 위한 투쟁의 역사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3.1. 만세운동과 독립군들의 활동은 일본에 주권을 빼앗긴 우리 민족의 자유와 해방을 위한 투쟁이었습니다.
어느 역사학자는 『세계사의 의의와 가치는 자유와 해방을 위한 투쟁에 있다』고 했습니다. 페트릭 헨리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쳤습니다. 스탈린의 딸도 철의 장막인 소련 공산체제에서 망명해 나왔습니다. 최근에 북한에서 월남한 분이 『자유는 확실히 생명보다 귀중하다. 자유의 진가는 자유를 떠나 봄으로서만 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자유는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자유가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유를 얻을 자격이 없으며, 사실 그러한 자에게는 자유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참자유가 무엇인가를 설명해 주시는 가운데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유대인들은 『우리가 일찍부터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는데 어찌하여 우리를 종이라 하느냐?』고 반문합니다. 이 말은 자기 조상들의 종살이를 은폐하려는 말장난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조상들은 430년간 애굽에서 종살이 했고, 바벨론에 끌려가서 70년간 종살이 했습니다. 그리고 수리아, 페르시아, 헬라를 번갈아 가며 섬기는 종살이를 했고,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의 식민지로써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로마에 주권을 빼앗겼음에도 불구하고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쇠사슬에 묶여 잠든 개는 자기가 쇠사슬에 묶여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불편함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주권을 빼앗겨 억압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쇠사슬에 매여 잠든 개와 같이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자유에 대한 의식까지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참자유가 무엇인지 모르는 자는 참자유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참자유라는 것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인 차원에서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자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관심은 다분히 정치적이요, 경제적인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자유를 말씀하실 때 그들은 노예상태만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시는 자유의 개념은 훨씬 높은 개념의 자유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 율법으로부터 자유가 참된 자유임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정치적, 사회적, 제도적, 경제적으로 자유하면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그곳에는 참된 자유가 없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아들이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고 말씀하신 대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실 때에 비로소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함을 받을 때 참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러시아의 문호 토스트예프스키의 대표작 『죄와 벌』에 보면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사회의 암적 요소인 고리대금업자 노파만 없어지면 그 사회의 여러 사람들이 경제적인 압박에서부터 자유하리라고 생각하고 쥐도 새도 모르게 그 노파를 살해합니다. 그러나 라스콜리니코프는 정당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고, 정의와 자유가 실현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 자신이 노파를 살해한 것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견딜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다 결국에는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형벌을 받게 될 때에 그는 비로소 자유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죄로부터 자유할 때 자유할 수 있는 것이지 다른 곳에서 자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만이 우리를 자유케 하십니다. 어떻게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하여 죄의 종인 상태에 매여 있던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길은 죄로 인해 얼룩졌던 자신의 삶을 부인하고 내 죄로 인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는 것입니다.
또한 이 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동시에 그리스도에 대하여 속박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누려 왔던 욕심과 세상적 향락등 죄악된 생활에 대한 속박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참자유를 얻은 자는 자신의 소유도 자신의 시간도 자신의 건강도 심지어는 자신의 생각까지도 그리스도께 철저하게 속박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속박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유가 너무나 큰 것이고, 그 감격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갈 때는 모든 것이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로마의 차가운 지하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빌립보에 있는 성도들에게 수없이 『기뻐하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바로 이 자유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이 귀한 자유를 주신 것은 그것으로 죄를 짓는 기회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봉사하는 기회로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그의 저서 『기독교인의 자유』에서 『기독교인은 모든 것 위에 서 있는 자유로운 군주로서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기독교인은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봉사하고 종으로서 누구에게도 예속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자유자인 동시에 종입니다. 죄와 율법과 사망에 대해서는 자유자이지만 사랑과 의와 복음과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종인 것입니다.
선을 위하여 내 육신의 자유를 버리며, 사랑을 위하여 내 미움을 버리며, 의를 위하여 내 생명을 버릴 줄 아는 사람이 참자유자인 것입니다. 진리의 종이 될 때 진리가 나를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1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 믿음과 사랑과 의와 진리위에 서서 자유를 지켜야 합니다.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자는 진리안에 있게 되며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고 말씀과 진리와 성령을 좇아 행하므로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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