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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을 내버린 에서 (창 25:2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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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러 들어온 복을 차 버린다.’는 말을 들으면서,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을 했던 어린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철이 들고, 또 수십 년의 세월을 살아 오면서 점점 더 그 말이 인생을 깊이 꿰뚫은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닌게아니라, 굴러 들어온 복을 차 버리는 인생들이 너무나 많고, 심지어는 주어져 있는 복을 내버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굴러들어온 복을 차버렸는지도 모르고, 또한 주어져 있는 복을 내버렸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예 복이 복인 줄을 모르고, 그저 복이라면 물질적인 것만을 생각하니 그런 현상이 빚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요즈음 물질 만능주의 풍조로 돈 버는 데 혈안이 되어 인격을 팔고, 몸을 팔고, 자녀 사랑까지 돈으로 때우다가 자녀를 망쳐 버리는 일들이복을 내버린 에서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교독한 말씀은, 하나님께서 주신 장자의 복을 팥죽(원 뜻은 불콩죽) 한 그릇에 팔아버린 사건입니다.

2. 장성한 에서와 야곱

아내인 리브가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이삭이 간구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 부부에게 쌍둥이를 잉태케 하셨습니다. 열 달이 되자 쌍둥이가 서로 먼저 나오려고 다투었고, 결국 힘이 센 태아가 먼저 나왔는데 그가 바로 에서였습니다. 그리고 에서의 발꿈치를 붙잡고 늘어지다가 나온 태아가 바로 야곱입니다. 그럭저럭 장성하여 에서는 능숙한 사냥꾼이므로 들사람이 되었고, 반면에 야곱은 종용한 사람이므로 장막에 거하였습니다. 그런데 믿는 부모답지 않게,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는 아버지 이삭은 에서를 편애하고,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편애하는 잘못들을 범하고 있었습니다.

3. 에서의 곤비

어느 날, 야곱이 죽을 쑤었는데, 마침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는 야곱에게, “내가 심히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라고 부탁했습니다.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그냥 ‘붉은 것’이라고 했다 하여 나중에 에돔(붉음)이란 별명을 얻게 됩니다. 사냥꾼인 에서는 붉은 색이니까 선지국으로 오인한 것 같은데, 실은 불콩죽이었습니다.
아무튼, 야곱은 절호의 기회로 여겨 뱃속에서 놓친 장자권을 차지할 궁리를 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미친 척하고,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라고 했습니다.
당시의 장자는 유업을 받을 권리가 있고, 가문을 대표하고, 다른 자손보다 유산을 두 배나 더 받게 됩니다.
그러나, 단순하고 경박하고 어리석은 에서는, 그 귀중한 복을 소중히 여기는 대신에 당장의 배고픔을 더 중시했습니다. 그래서, 에서는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 속에서 우리는 어리석은 자의 전형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무한한 내일의 가능성 대신에 현재의 고통에 집착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 대신에 당장의 욕심을 만족시키기에 급급합니다. 매사에 신중을 기하는 대신에 즉흥적인 기분에 자신을 내맡깁니다. 미래의 수많은 세월을 위해 끈기 있게 노력하는 대신에 오늘 하루의 안락에만 급급합니다. 영원한 영광을 위해 참고 기다리는 대신에 찰나적인 육적 쾌락만을 추구합니다. 따라서,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은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자기의 욕구를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처럼 어리석은 사람들이 드러내는 특징 중 특징은 현재의 고난을 지나치게 과장하는 것입니다. 에서는 지금 죽게 됐는데, 장차 주어질 장자권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나, 심히 곤비한 정도일 뿐, 결코 죽을 지경은 아닙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죽 한 그릇에 해결될 수 있었던 정도의 고통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과거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은 고통이 있었고, 머리가 깨지고 심장이 터지는 것 같은 고뇌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렇게 의연하게 에배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때 그 시절을 돌이켜 보면, 실은 고통 그 자체보다도, 실은 고뇌 그 자체보다도 몇 배, 몇십 배 더 과장했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과장이 아니었다면, 그때 그 시절의 고통과 고뇌 때문에 지금 여기 머물러 있지 못했을 겁니다.
에서가 죽게 됐다고 한 판단이 옳다고 칩시다. 그렇더라도 분명히 죽게 됐다고 판단 내린 오늘만이 생의 전부는 아닌 것입니다. 오늘 죽게 됐다고 해서, 내일도 죽게 된다는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더군다나 죽을 지경인 현실이란 미래의 무한한 복과 바꿀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절망적인 판단을 내렸기 때문에 겪지 않아도 될 실패와 패배를 겪고, 심지어 재기 불능의 비극적인 종말을 맞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얄미울 정도로 약삭빠른 야곱은, 찾아온 기회를 아주 확실하게 붙잡을 양으로 에서에게 “오늘 내게 맹세하라.”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당장의 곤비함을 해결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는 에서는, 앞뒤 생각 없이 맹세하며 장자의 명분을 팔았고, 그 대가로 불콩죽을 얻어먹고는 일어나서 가 버렸습니다. 모르긴 해도, 미련한 것으로 보아, 아마 덤으로 준 떡 때문에 더 신나게 먹었을 겁니다. 떡 한 줌과 죽 한 그릇하고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바 보장되었던 엄청난 영의 복과 물질의 복을 송두리째 내버리고 말입니다.
의원직, 장관직, 대통령직의 영예를 가지고 떡고물과 바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신령한 복인 하늘나라의 직분을 자신의 세속적인 욕심과 바꾸는 교인들도 적지 않습니다. 단 하나밖에 안 되는 자기의 물질, 또는 권력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수십 만, 수백 만 명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특수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좌우를 분별할 줄 아는 지혜자, 특히 미래를 내다보는 지혜자라야 모든 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런 사람은 세상이 수용을 못합니다.
조선 시대에 김지라고 하는 무관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군인이라면 창칼과 방패와 활을 연상하는 시대인데, 이 김지 장군은 총포 제작에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보는 군인들마다 “저것도 장수냐 땜장이지.”라며 비아냥거렸습니다. 100여 보 나가는 소총인 승자총통을 본 사람들은 면전에서는 “참으로 장하외이다.”라고 하고는, 돌아서서는 빈정거렸습니다. 조정에서도 “쓰자니 소용에 닿지 않고, 버리자니 아깝고, 어떻게 한다” 하며 시큰둥하게 여길 뿐, 지원해 주지를 않습니다.
결국 그는 일생을 헛 산 기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가 죽은 뒤에, 선조 때에 니탕게 총대장의 지휘 아래 여진족이 쳐들어와서 경성을 포위하고 맹렬한 공격을 가했습니다. 매우 위급한 처지에 빠졌을 때, 승자총통을 보는 눈이 달랐던 온성부사인 신립 장군은, 장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창고에서 녹슬고 있던 승자총통을 거뒀습니다. 그리고 그 총을 사용하여 적을 몰살시키는 대승리를 얻었습니다.
일반 대중이란 에서 같아서 지혜자가 설 자리가 없습니다. 믿는 우리라도 신령한 눈이 열려 지혜자가 되어 지혜자를 귀한 복으로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4. 맺음말

에서가 실패한 원인은 배고픔과 마침 눈앞에 보인 먹을 것, 성격적인 결함 곧 경박하고 무딘 성격, 이성적 사고가 아닌 기분 따라 움직이는 정적 사고, 분별할 줄 모르는 어리석음 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원인하고도 비교할 수 없는 결정적인 실패의 요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긴 것이요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무시해 버린 것입니다. 성경은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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