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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원죄 (창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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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연대기적 의미에서 인류 최초의 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점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아담이 인류란 뜻으로 사용된다는 사실과, 뱀을 통한 사단의 유혹에 아담보다 하와가 시간적으로 먼저 넘어갔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실을 잘 아는 바울 사도가 원죄를 언급할 때에는 하와의 죄라고 하는 대신에 아담의 죄라고 표현하는 사실 등을 보아 분명해집니다. 특히, 바울이 쓴 로마서 5:12에는, 한 사람(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인해 사망이 온 것처럼,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원죄란 인간의 근원적 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관계상의 죄를 뜻하는 것입니다.

2. 사단의 유혹과 인간의 타락

하나님은 사귀며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사람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고, 말씀을 따라 만물을 다스릴 능력을 가진 자유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 곧 아담과 아담에게서 비롯된 하와를 에덴 동산에 두시고,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 부부는 자기들을 짝지어 주신 하나님 아래서 정말 복에 겨운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뱀이 그들 사이에 끼여들었습니다. 실은 사단이 그 뱀을 통해 사람들을 타락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뱀은 성격이나 기질로 보아서 자기의 꾀에 더 쉽게 넘어갈 것 같은 여인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니라, 여인의 마음속에 의심과 호기심의 씨를 뿌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뒤에도, 사단의 하수인인 많은 유혹자들은 사람을 유혹할 때에, 권유나 명령보다는 위하는 듯한 질문을 즐겨 사용해 오고 있습니다.
거의 무한하다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단 하나의 금령을 부각시켜 유혹하는 질문에 여인은 그만 말려들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됐다는 점과 만물을 다스릴 능력과 에덴 동산을 다스리며 지킬 의무를 부여받은 자율적 존재라는 점, 그리고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누리고 있다는 점 등을 생각해 볼 때, 뱀의 유혹은 유혹이라 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그 모든 은혜에 감사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한 원죄
가지에 대해 불만스런 의심과 호기심을 가졌습니다. 사실상 유혹의 경우에, 더 큰 문제는 유혹자나 유혹의 내용이 아니라 유혹받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여인의 대답을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라고 한 여인의 대답은, 2:16 이하의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라고 말씀하셨는데, 여인은 그 무조건적이며 무제약적인 은혜의 말씀의 의미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라고 하여 단순한 허용을 의미하는 것으로 약화시킨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 즉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여인은 “만지지도 말라”는 말을 덧붙여 금령을 주신 하나님께 대한 불만을 나타낸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여인은 그 단호한 죽음에 대한 선언을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라고 하여 의문을 제기한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마땅히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할 피조물인 여인이 말씀대로 순종하기는커녕, 그 말씀 또는 말씀의 의미를 왜곡하거나 변질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원죄입니다. 즉,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 파괴, 명령자와 복종자의 관계 파괴인 것입니다. 원죄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선악과를 왜 만드셨나 만들지 않았으면 따먹는 죄를 짓지 않았을 것 아닌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는 죄는 이차적인 죄이며, 선악과는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것입니다. 문제는 복종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오히려 다스려야 할 뱀과 그의 유혹의 소리를 좇은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인간을 하나님께 속한 자와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에 속한 자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8:47에는,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라고 명기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복된 말씀 대신에, 돈과 권력 그리고 명예와 온갖 죄악의 쾌락 등을 미끼로 유혹하는 마귀의 소리를 좇아 노예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 거하며 주님의 말씀을 좇는 사람만이 자유를 누리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원죄의 이야기는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바로 너와 나, 우리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죄란 시작이 어렵지, 일단 한 발걸음만 들여놓으면 그 다음부터는 너무나 쉽게 범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뱀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또는 변질시킨 여인의 대답을 듣고는 쾌재를 불렀습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 본격적인 유혹의 소리에서 우리는 또 마귀의 놀라운 지혜를 보게 됩니다. 혹시 따먹고 죽지나 않을까 하는 인간의 염려에 대해 우선적으로 단호하게 안심시킵니다. 그 다음에, 마치 인간의 눈이 어두운 상태에 있는 것처럼 현혹시킵니다. 그런 다음에, 인간의 교만을 최고도로 불러일으킵니다. 따먹기만 하면 눈이 밝아져 전지전능하신 신들(Elohim)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질투 때문에 선악과를 못 먹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런 하나님 밑에 있지 않고도, 자주적으로 선악을 판단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말씀 대신에 뱀의 소리에 기울은 여인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이제는 그 선악과가 예전의 선악과로 보이지를 않습니다. 하나님과 사귀며 말씀을 좇아 살 때에는 선악과가 별것 아니었는데, 유혹에 마음을 빼앗기고 보니까 정말 별것이 된 것입니다. 여인이 보니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합니다. 주저할 것 없이 그 열매를 따먹고, 너무나 좋은 나머지 사랑하는 남편에게도 주었습니다. 사랑도 잘 골라 받아야지, 세상에 그게 뭔데 낼름 받아먹습니까 사랑하는 색시가 주니까, 그냥 헬레레해 가지고 ···. 남편 좋은 게 뭡니까 아내가 잘못하면 박력 있게 “안돼! 죽으려고 환장했어!” 하고 팔목을 꽉 잡고 막아야 되는 것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아내도 남편이 잘못하면, 애교스런 목소리로 충고하고, 그래도 안 들으면 어떻게 합니까 바가지라도 박박 긁어야죠
아무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옆에서 지켜보다가, 주는 선악과를 받아먹은 아담도 하와보다 나을 게 없습니다. 원죄란 하와의 죄요 아담의 죄요 하나님의 말씀을 좇지 않는 우리 모두의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맺음말

그렇다면 한마디로 원죄란 무엇입니까 전통적인 견해는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의지, 즉 교만이라고 합니다. 어떤 신학자는 에덴 동산을 다스리며 지켜야 할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는 점을 들어 태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은 일면만 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임무를 망각하고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한 의지는, 동시에 인간이 지배해야 할 뱀에게 복종하는 의지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원죄란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교만과 뱀에게 복종하는 자기 비하라고 정의해야 할 것입니다. 교만 동시에 자기 비하, 즉 하나님과의 관계 파괴입니다.
우리 모두 담대하게 말씀대로 행하여 항상 주의 은혜와 복을 누리는 자유로운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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