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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얍복 나루 (창 32: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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얍복 나루터에서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을 하고 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24)”
이 씨름은 우리는 쉽게 ‘기도’라고 이해를 해버린다. 그 이유는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 곧 하나님을 붙잡고 “당신이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했고 천사가 끝내 그를 축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 보자. 이 부분이 야곱의 기도라면 이 씨름은 야곱이 씨름의 도전장을 내야 한다.그런데 씨름은 하나님이 싸움을 거신다. 그럼으로 이것은 기도일 수 없다. 또 하나는 이 씨름은 하나님 쪽에서 걸었고 하나님이 의도한 것이기 때문에 누구를 기준으로 판정이 나는가를 보아야 한다.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25)”
그가 씨름을 걸었고 그가 그 씨름이 성공하지 못함을 보고 되돌아 가려고 한다. 그래서 이 씨름은 야곱이 무슨 조건이 있어 하나님께 매달렸고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아서 나중에 기를 써서 얻어낸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요구한 것이 있어서 싸움을 거셨고 그것이 의도된대로 되지 않아서 가려고 했다는 내용으로 성경은 진술하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야곱은 하나님을 붙잡았다. 이 문제를 오늘 풀어야 한다. 첫 시간에 야곱은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절대적으로 붙잡은 사람이라는 설명을 드렸다. 야곱의 생애 중 재미 있는 점은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알고 구원의 의미를 아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主’로 대접하지 않은 사람의 상징적인 생애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세주요 동시에 주이시다. 구세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쉽지마는 주인삼는 일에는 전 생애가 걸린다. 야곱의 생애는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인생을 자기 각본대로 끌고 다니신다. 야곱은 그의 전생애에 하나님을 시종으로 대동하고 다녔다. 형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을 때도, 아버지의 축복권을 가로챌 때에도 하나님은 묵묵히 보고 계신다. 하나님은 그가 그렇게 고생을 해서 빼앗은 것들을 쓸모없게 드셨다. 장자의 명분과 축복권을 빼앗고 나서 하란으로 피난을 간다. 삼촌을 속여 거부가 되었다. 라헬을 사랑하여 죽어라고 일했더니 하나님은 몇명을 더해 주셔서 아내들끼리 다툼으로 집안은 엉망이 되게 하셨다. 그가 전 가족과 재산을 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형 에서가 마중 나온다고 해서 두려움 속에 벌벌 떨면서 나아간다. 떼를 나누어 형 앞에 보내고 일곱번씩 절을 하면서 “주여, 저는 주의 종입니다”라고 부르면서 형을 만난다. 기껏 장자의 명분을 빼앗아 놓고 ’주의 종‘이 되었다. 그리고 그 절정이 얍복 나루터이다. 목숨이 경각에 붙여지게 되자 하인들을 시켜서 떼를 나누어 예물을 보낸다. 아내와 자식들도 앞서 보냈다. 그런데도 아직 그의 인생이 그의 손에 있는줄로 알고 있다. 모든 것을 잃고도 아직도 그가 최후의 순간까지 자기 인생이 자기 손에 있는 줄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하여 오셨다.그것을 알리려 오셨음에도 야곱은 항복하지 않았다. 화가 나셔서 그의 환도뼈를 부러 뜨렸다. 그리고 떠나시면서 “내가 떠나면 너는 끝장이다”라는 선언을 남기시고 가버리려 하신다. 거기서 비로소 야곱이 무릎을 꿇었다. 드디어 처음으로 하나님을 붙잡았다. “나를 축복하지 아니하시면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이렇게 질문하신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창 32:27)”
야곱이란 이름의 의미는사기꾼, 약탈자, 강도이다. 야곱은 하나님을 믿는 자이기는 하지만 한번도 하나님에 의해서 자기 인생이 만들어지도록 요구하지 않은 사람이다. 자기의 소원을 자기 힘으로 빼앗은 사람이다. 그런데 축복해 달라는 것은 남에게 도움을 청하는 태도이다. 그러자 하나님은 “너는 강도가 아니냐, 너는 남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 말씀하신다. “강도입니다” 이 때는 이미 야곱이 자기가 누구였던가를 더 이상 회개할 수 없는 차원까지 낮아져서 꺼내놓은 고백일 수 밖에 없다. 이때 주어지는 이름이 이스라엘이다. 그뜻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이다. 그가 드디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께 축복을 얻어내는데 승리하는 것이다. 야곱의 전생애는 하나님 앞에 어떻게 하면 축복을 얻어내는가 하는 싸움이다. 야곱은 그것을 자기 힘으로 얻어내고 하나님이 그것을 도와주는 분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던 사람이다. 그의 전생애가 그것을 대표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 주시는 것은 우리가 그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가 우리를 보장하시고 지키시고 인도하실 수 밖에 없는 분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하나님은 어느 경우에도 하나님이 主가 되지 않는 그런 신앙을 허락하신 적이 없다. 하나님은 사랑과 존경의 마음으로부터 항복을 받는 주인이 되시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에게 야곱에게 나타난 것 같은 긴 여로를 허락하신다. 고난이 닥칠 때 “나에게 무슨 잘못이 있어서 이런 일들을 허락하시는가”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지 않은 사람이다.
“야곱이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로 사자들을 자기보 다 앞서 보내며 그들에게 부탁하여 가로되 너희는 이같이 내 주 에서에게 고하라 주의 종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에게 붙여서 지금까지 있었사오며 내게 소와 나귀와 양떼와 노비가 있사오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고하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더라하라 하였더니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가로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인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창 32:3-6)”
에서가 이를 갈며 20년을 기다렸고 그가 온다는 소식을 듣자 야곱은 즉각적으로 이에 대처한다.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종자와 양과 소와 약대를 두 떼로 나누고 가로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고 야곱이 또 가로되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 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 주께서말씀하시기를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창 32:7-12)”
위의 말씀을 보노라면 야곱의 양면성을 볼 수 있다. 야곱은 신앙심이 깊은 일면 뻔뻔함도 가지고 있다. 야곱의 신앙생활은 우리의 신앙생활과 비슷하다.
씨름을 하시고 환도뼈를 부러뜨리시기까지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라. 그것은 심판도 아니고 포기도 아니다. 분노도 아니다. 그것은 사랑이다. 세상에 야곱만한 고집장이가 없다. 그런 야곱을 항복시키는 하나님의 열심을 보라. 얍복 나루터에 세우고야 마신다. 거기서 항복하지 않자 씨름을 하러 내려 오신다. 그래도 안듣자 부러 뜨리신다. 그가 뿌리신 자녀에 대하여는 결코 포기하시는 법이 없다. 그 가장 큰 증거가 예수 그리스도를 갈보리 십자가에서 죽이신 사건이다. 예수를 믿는 자가 꼭 하나 항복해야 될 것은 더 이상 절망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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