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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야곱의 말년 (창 49: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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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공부하려는 것은 ‘오늘 야곱이 어떻게 변해 있는가’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의 생애 전 과정을 추적하면서 하나님이 야곱을 그의 손에서 만드시고 빚으시고 고치시는데 그래서 야곱이 ‘무엇으로 바뀌며 어디서 바뀌는가’하는 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본문 창세기 49장 22절부터 26절까지를 보면 야곱이 죽기 전에 그의 열 두 아들들을 불러 놓고 말일에 될 일들을 가르치며 그들의 장래에 대해서 예언하며 아들 하나 하나에 대하여 축복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보다 깊은 의미, 야곱의 변화된 모습들이 번득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창 49:22-26)”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이 힘이 있음이라’ 야곱의 하나님, 전능자 하나님에 의하여 요셉의 활이 견강하고 그의 팔에 힘이 있다. 야곱은 지나온 평생의 삶에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을 알고 그를 신뢰하고 있다. 그와 동일하게 하나님이 요셉에게도 역사하셨고 앞으로도 그를 붙들어 주실 것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원천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로다. 네 아비의 축복이 내 父與祖의 축복보다 낫다” 야곱의 부여조는 아브라함과 이삭이다. 야곱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축복보다 자신이 받은 축복이 낫다고 고백하고 있다. 여기에 야곱의 변화가 있다. 야곱은 우리가 아는대로 약탈자요, 강도이다. 자기의 힘을 의지했고 자기의 꾀를 의지하고 살았던 정말 열심있는 정력가였다. 야곱이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었던 것은 전혀 자신의 인생의 결과물들이 자신의 소산이 아니요, 하나님의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요셉을 축복함에 자기의 이름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야곱의 축복’이 아브라함과 이삭의 축복을 합친 것보다 낫다고 한다. 야곱이 하는 이야기 중에 제일 재미있는 것은 이점이다. 나로 말미암아 축복이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축복을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끼리의 비교라면 누가 하나님을 더 잘 아느냐의 싸움이지 누가 더 잘났는가의 싸움은 이미 아니라는 것이다. 야곱이 자신의 부여조보다 더 하나님을 잘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것은 왜인가 그는 아브라함보다 이삭보다 많이 맞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무엇으로 완성했는가 하면 하나님을 아는데 이만큼 자신있는 자로 만들어 냈다. 이것은 결코 교만이거나 자랑이 아니다. 하나님이 한 인생을 무엇으로 만들어 내실 것을 목적하시고 어디를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삼아서 공부를 시키고 훈련을 시키는가 하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는 것이 바로 목적이다. 우리 손에 무엇을 쥐게 하며 우리가 남 앞에 어떤 대접을 받는가가 아니다.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아는가’의 싸움이다.
야곱의 인생을 이제 거꾸로 훑어 보자. 야곱이 태어날 때부터 어떤 사람으로 태어났으며 축복과 약속 속에서 그의 길을 인도함 받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자기 고집대로 살아왔는가, 그래서 자기가 뿌린 씨를 생전에 어떻게 거두었는가, 그가 장자의 명분을 빼앗은 후 에서에게 당한 일은 무엇인가 그는 형을 ‘나의 주(主)’라고 호칭해야 했던 경험을 지녔던 사람이다. 아버지를 속여 형이 받아야 할 축복을 가로챈 댓가로 후일 자식들에게 속아 넘어간다. 밧단아람으로 도망가서 아버지의 축복을 ‘받아논 주제’에 도망갈 수 밖에 없었고 도망가서는 자기 외삼촌에게 고달픈 몸을 의탁할 수 밖에 없었고, 그런 가운데 외삼촌의 꾀임에 빠져서 사랑하는 여인 라헬을 얻으려고 했던 것이 레아까지 얻어 14년간을 공짜로 일해 주어야 했다. 그러나 야곱은 거기서도 꾀로 승리해서 많은 소유를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 쫓겨나고 말았다. 피난한 곳에서 쫓겨났다. 갈곳이 없어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형 에서가 400인의 사병을 이끌고 자신을 죽이겠다고 달려온다. 야곱의 고난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다나가 그 땅 여자를 보러 나갔더니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땅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창 34:1-2)”
레아를 통해서 나은 자식들이 분개해서 세겜성의 모든 남자들을 다 죽여 버렸다. 야곱은 이 일로 떨었다. ‘우리가 이방의 객인데 이곳의 원주민들과 원수가 되었으니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가 34장의 사건이다. 34장의 사건의 발생 원인은 35장에 나온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창 34:1)”
하나님은 단을 쌓고 거기 거하라고 명령하셨다. 그 명령은 왜 떨어졌는가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은 고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성에 이르러 성앞에 그 장막을 치고 그 장막 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은 일백개로 사고 거기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하였더라(창 33:17-20)”
야곱은 밧단아람으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에 돌아왔다. 아비집을 떠나 밧단아람으로 도망할 때 그가 벧엘에서 드린 서원을 상기해 보자.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창 28:20-22)”
‘이곳에 내가 전을 짓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고...’ 이것은 야곱이 했던 약속들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벧엘이 아닌 세겜에 와 있다. 그러나 평안히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까지 벧엘에 올라가지 않았다. 야곱의 전생애를 통해서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야곱이 얼마나 지독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어느만큼 자기 편리하게만 생각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모두가 동일하다. 야곱은 여기까지 평안히 왔다. 그리고 지금 세겜에 있다. 그리고 자기는 더 이상 걱정할 것이 없다. 걱정이 없자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이 평지풍파를 일으킬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디나 사건’이 터진다. 35장에 하나님께서 정말 강하게 나타나신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창 35:1-2)”
야곱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이 우상을 섬기는 것을 그래로 방치했던 사람이었다. 사실은 우리가 그렇다. 야곱에 대해서 이렇게 정직하게 낱낱이 기록된 것에 대해서 우리가 분개하고 펄펄 뛰는데 우리가 동일한 사람이라는 지적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항복을 않고 있다. 나는 안그런 척 위선을 부리고 있다. 오늘 우리의 우상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중앙에 모시고 우편 보좌에는 맘몬을 좌편 보좌에는 권세라는 신을 모시고 있다. 우상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조금이라도 방해하는것은 다 우상이라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다. 우리의 신이 스스로가 되고 있지 않은가
야곱은 이런 지적들을 받아 온 후에야 드디어 인생을 이해하는 것이다. 자기가 누군가가 아니라 인간이 무엇인지를 안다. 그래서 49장에 이르러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축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그만이 우리를 주장하시고 그만이 우리에게 축복을 주실 수 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누가 이 세상에서 가장 잘 안다고 외칠 수 있는가! 그것은 나다!” 그는 자기 인생의 역정을 통해서 그것을 터득한 것이다. 바로 야곱만큼 자기 인생을 통하여 ‘인생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알았던 사람은 역사상 없었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일 수 있고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그것보다 더 무한하시고, 더 크고, 더 깊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그 모든 죄악을 저 뿌리로부터 문제의 문제됨을 해결하시고 고치시고 완성하시고야 만다는 이 사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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