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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자 (고전 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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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있기도 힘든, 무덥기 짝이 없는 날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때에도 우리는 타들어 가는 논밭을 바라보면서도 속수무책으로 탄식밖에 할 수 없는 농민들의 아픔보다도 우리 자신의 불편과 괴로움을 더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보며서, 모든 인간은 원죄 아래 태어나 본능적인 이기성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성경 말씀에 새삼스레 공감을 하게 됩니다. 또, 남들의 고통보다도 자신의 불편을 더 큰 문제 거리로 여긴다는 점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다시금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영 또는 마음의 거리를 재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개선해 나가려는 의지를 버리고, 주님께 자신을 전적으로 내맡기려는 의지를 세워야 합니다.

2. 바울의 선교 자세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다가 도리어 부활하신 주님께 붙잡힌 바울은, 그 사건을 계기로 자신을 주 예수께 내맡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즐겨 그리스도의 종, 즉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자처했습니다. 그 결과, 바울은 그 어떤 교인들보다도 탁월한 신앙 인격, 신령한 능력과 지혜, 그리고 놀라운 사도로서의 업적을 남기고 있었습니다. 이 바울 사도에 대해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더 중요한 사실은, 그는 결코 어제의 인격과 어제의 영력에 머무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제의 업적에 안주하지도, 어제의 공을 내세우지도 않았습니다. 바울 사도는 항상 뒤엣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서 인도하시는 주님을 좇아 달려갔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을 주님께 전적으로 내맡겼으며, 따라서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대로 순복하는 자로서 일하며 살았습니다. 이러한 깊은 신앙인의 모습은,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라고 한 말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바울 사도가 제2차 선교 여행 중에,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동안 활동하면서 교회를 세운 사건을 언급한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 사도는 고린도에서 하나님의 증거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에, 탁월한 말과 지혜를 위주로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뛰어난 변론술과 지혜는 사람들을 감동시키거나 감탄케 할 수는 있으나, 영적 공명을 불러일으키는 데에는 오히려 방해가 될 경우도 많습니다.
말씀 선포가 아니더라도, 수다쟁이나 말 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 말재주 때문에 이야기의 요지나 핵심이 모호해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의 도를 전하며 일하고, 또 살아가야만 할 우리는, 자신의 말재주나 세상적 지혜를 드러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복음 선교에 있어서 소극적인 면을 말한 바울 사도는, 이어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라고 적극적인 면을 말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당시의 유행을 따라 뛰어난 웅변술과 지혜를 추구하는 고린도 교인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을 알고, 그 밖의 모든 것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아마 이러한 각오는 고린도 선교 직전에, 아덴에서 한 철학적이며 수사적인 설교가 실패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한 것이 동기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덴에서의 설교 사건은 그리 큰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실상 그 이전이나 이후나, 아니 언제 어떤 상황에서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바울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는 바울의 존재 근거, 존재 이유, 존재 의의, 존재 목적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 1:20에,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하였고;계속해서 21절에,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같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가정과 교회, 직장과 사회 등에서 우리의 행동 때문에 예수님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존귀히 여김을 받고 계십니까
성자 프랜시스가 어느 날 아침에, 제자들을 거느리고 시내에 전도하러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시내의 큰길과 골목길을 돌아다녔습니다. 수도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 제자가 너무도 이상해서 정색을 하며 질문했습니다. “아버지, 우리는 언제 전도를 시작합니까” 그러자 성 프랜시스는 “얘들아, 우리는 길을 걸으면서 전도한 것이다. 사람들이 우리의 얼굴을 보았고, 우리의 행동을 보았다. 그것이 우리의 아침 설교였다. 만일 우리의 걸어다니는 것이 전도가 못 된다면, 아무리 많은 말을 하고 다닌다 해도 전도가 못 될 것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의 모습, 우리의 말, 우리의 행동이 그대로 주님을 존귀하게 드러내는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은 설교의 중심 주제인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극명하게 하기보다는, 청중을 감동시키기 위한 설교의 수사 기술에 치중하는 설교자들에게 중대한 경종이 됩니다. 또, 주님과 주님의 말씀과는 산관없이 자기 나름대로 살아가는 모든 교인들에게도 엄중한 경고가 됩니다.

3. 바울의 선교 방법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 적용해야 할 바울 사도의 핵심적인 선교 방법은, 사적인 대화이든 공적인 설교이든 간에 인간의 지혜에서 비롯된 말재주가 아니라,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 사도는 성령님과 성령님의 도구로서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교의 비결입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15:18에,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라고 하였습니다.
바울 사도가 이러한 방법, 이러한 비결을 터득하게 된 것은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나약함과 임무 성취의 불확실성에 대한 인식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라고 했습니다. 이 고백은 백절불굴의 복음의 투사인 바울의 또 다른 면모를 드러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기는 하나, 그는 약하기 때문에 주저하거나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의지하여 십자가의 그리스도만을 전했습니다. 그런 바울 사도는 종종 “두려워 말라.” 또는 “담대하라.”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곤 했습니다.
권력자이든 지식인이든 재벌이든, 인간으로서의 본질적인 나약함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주님 안에서 역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나약함을 심각하게 인식하는 교인이라면, 결코 신령한 지혜와 영력의 보고이신 주님의 뜻을 벗어난 말과 행동을 하려고 들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사도로서의 일과 삶을 오로지 성령님의 나타남과 성령님의 능력으로 하게 된 동기는, 사람들의 믿음이 교인이나 전도자의 말재주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근거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4. 맺음말

만유의 만유이시요, 만복의 근원이시며,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주님을 가리켜야 할 손을 너무 요란하게 치장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자기에게로 끄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 안에서 자신을 비울수록 성령님의 능력이 더욱더 강하게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술에 많이 취하면 취할수록, 추한 자기의 감춰진 모습이 나타나고, 또 술의 힘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성령님의 새 술에 취하면 취할수록, 우리에게서 성령님과 그의 능력이 그만큼 더 확실하게 나타납니다. 아무쪼록,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여 성령님과 그의 능력으로 일하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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