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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징계 (히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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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개신교회의 하나님에 대한 정의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라고 봅니다.
여기에서 보면 살아 계신 하나님은 오직 한 분 뿐이시요, 육을 입지 않으사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본질이시며, 변하지 않으시고 전능하시며, 가장 지혜로우시며, 가장 거룩하시고, 가장 자유로우신 절대적 존재로서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그의 변치 않으시는 의로우신 뜻에 따라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가장 사랑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사 오래 참으시며 선함과 진실이 풍부하시고 모든 부족과 위법과 죄를 용서하십니다. 열심을 가지고 자기를 찾는 자에게 보답하시고 죄를 미워하사 결코 죄를 묵과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 대한 이러한 정의는 분명히 그의 초월성을 강조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거스틴의 하나님에 대한 사상으로 뒤에 마르틴 루터, 쯔빙글리, 칼빈, 멜랑흐톤 등 위대한 개혁자들의 하나님에 대한 사상으로 각각 그 강조점이 다르면서 계승하여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대 개혁주의 신학의 하나님에 대한 사상은 개혁자들의 가르침 속에 그 근거를 두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19세기와 20세기 초의 현대사상의 도전을 받아 모든 신학자들은 그들이 물려받은 신앙을 새로운 지식에 직면하여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이냐 하는 공통된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그들의 반응으로 두 가지의 길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현대주의의 하나님 사상으로서 매우 복잡하며, 하나님을 인간의 의식 안에서만 자각하게 된다는 헤겔의 『절대정신』, 스펜서의 『무한하고 영원한 힘』, 후에 화이트 헤드의 『구체적원리』, 또는 와이만의 『인간이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될 환경의 본질』등으로 정의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말한 현대주의 정의에 반대편의 한 길은 『자유주의의 하나님 사상』으로서 곧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라』고 밝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 와서 하나님을 정의함에 새롭게 발전시킨 국면은 우리는 현대사상에 대한 반항으로 또는 현대 세계로부터의 은퇴로 이해함이 옳다고 보는 바입니다.
오늘날 신학도 실존주의의 영향을 매우 강하게 받고 모든 형태의 합리주의에 대한 반항으로서 하나님에 대하여 그 본질적 존재를 간단한 정의로 표현해 보려는 모든 인간에 대한 깊은 무관심과 불신을 생기게 했습니다.
종교적 신앙으로 이해하는 하나님의 실존이라는 것은 인간의 마음, 또는 표현하고 정의하는 인간의 언어의 힘을 초월한다고 하는 일반적인 생각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모든 정의에 회의를 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상 하나님에 대한 사상은 매우 다각적이면서 세대를 거쳐 헤겔의 正, 反의 원리에 해당하는 것 같은 과정을 거쳐왔으며 이제는 正反合의 合의 완성을 향해 잘 종합하여 성경 진리의 토대에 귀한 체계를 세워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위의 요약해서 말한 하나님에 대한 관념을 종합하여 볼 때 그 요점은 하나님은 초월적 존재가 되는 점과 하나님은 창조한 세계안에 능력적으로 임재하시는 분, 즉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사야 57:15를 보십시오.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함이라』
이 말씀의 상반부 즉 『지존무상하시며...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에서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말씀하고 있으며, 후반부 즉 『또한 통회하고...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함이라』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세계 가운데 오셔서 함께 하고 계심, 즉 하나님의 내재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인간세계를 창조하셨고, 그 세계 안에 들어오셔서 인간 역사의 지배자가 되시고 주인공이 되신 것입니다.
로빈손 씨는 『역사 이해란 하나님 중심의 관점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역사의 지배자요, 주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해야 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주인공으로서 인간 세계에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역사 실현을 위한 동반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세계는 하나님이 쓰시는 한 도구와도 같다고 인정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서 인간 역사에 들어 오셔서 그 장을 엮어 갔으며,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와 동질이신 또 한 분 보혜사 성령(파라크레토스)으로서 우리와 동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이 이것을 모르는 것은 저희가 이것을 받지 못한 까닭이요, 우리는 아는 것은 우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우리 속에 계신 까닭이라고 요한복음 14:17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5절을 보십시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경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나라의 역사는 우상숭배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사적이 마치 전쟁역사와 같이 點綴(점철)해간 역사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인격을 산 인격에다 절해야 하는데 말못하고 행동 못하는 우상에다 머리를 숙이는 것은 비진리라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을 징계하지 아니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동양의 역사도 하나님의 징계받은 역사라 볼 수 있습니다. 말 못하는 돌부처에게 빌고, 죽은 영혼에게 제사를 지내는 등의 불교, 유교사상이 지배해 왔던 동양이 낙후되었던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떠난 역사였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을 잘 믿고 그 말씀을 따라 사는 나라일수록 경제적으로도 잘 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전에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 미국 대사를 만난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의 나라 조상인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북미대륙으로 건너갔다가 신앙의 자유를 찾았을 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조상들은 금을 찾아 이 남미대륙에 앞을 다투어 왔는데 지금보니 금도 찾지 못하고 신앙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넘치도록 영적인 축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육신적, 물질적인 축복도 가득히 부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6:33을 보세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리고 요한삼서 2절을 보세요.
『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며 강건하기를 바라노라』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우리가 우리 죄로 말미암아 멸망당할 그 십자가를 대신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사랑하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가 잘하면 칭찬과 상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잘못할 때에는 징계를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징계는 우리가 미워서 하시는 징계가 아니라 사랑하시기에, 우리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자녀로 만드시기 위해 주시는 것이므로 오히려 기쁨으로 받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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