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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어나 빛을 발하라 (사 6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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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이 시작되고 이제 세번째 주일을 맞이합니다. 성도님들의 가정과 사업위에 하나님의 평화와 기쁨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새해를 맞이한 우리는 새소망을 가지고 희망에 부풀어서 우리의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우리가 희망을 가지고 새출발을 하였지만은 알지 못하는 장래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사람의 장래는 계획과 꿈대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미래의 축복이 보장되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예기치 않은 아픔과 시련이 우리 앞에 파도처럼 엄습해 올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구름 뒤에 여전히 빛나고 있는 태양을 바라보시며, 낙심하지 마시고 약속된 미래를 바라보며 성실하게 노력할 때 주님은 올해에도 크신 복과 사랑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1. 변화된 신앙인이 되자.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에 가장 소중하고 귀한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이 땅에서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는 하나님의 창조를 통하여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도 인간에도 깊은 사랑과 애정을 가지고 계셨다. 그들에게만 당신의 호흡을 주셨으며, 당신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다고 하셨다. 즉 인간은 만물의 영장으로서 하나님이 창조한 가장 신비하고 중요한 존재인 것이다. 많은 성현들이 인간은 천지만물 중에 가장 중요한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의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 지극히 허망하며, 연약하고, 미련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울면서 세상에 태어나 삭막한 생존경쟁에서 쉴틈없이 허덕이다가 생명이 다하면 땅에 묻혀 한줌 흙으로 돌아가는 아주 연약한 존재입니다. 맹인 가수 이용복의 노래 가사 가운데 “어느날 피어나는 꽃잎처럼 났다가 가을 바람에 의미 없이 뚝뚝 떨어지는 낙엽처럼 사라져 버린다”고 인간의 삶을 노래하였습니다. 독일의 유명한 실존 철학자인 하이데거와 야스퍼스는 인간이란 넘을 수 없는 한계상황에 몸부림 치다가 결국은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는 존재라고 하였다.
이처럼 바람에 쓸려가는 낙엽처럼 외롬고 허무한 것이 인간의 생이라면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귀한 존재가 아니라 보잘것 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무의미와 허무속에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놀라운 삶, 변화된 삶을 허락하셨다. 바로 인간에게 영생을 허락하신 것이다. 바로 우리는 영생하기에 위대한 존재이며, 만물의 영장인 것이다.

예화)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메뚜기와 하루살이가 하루 종일 논에서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날이 저물자 메뚜기는 하루살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 이젠 저녁이 다 되었어.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또 놀자 이 말을 들은 하루살이는 메뚜기의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 되물었습니다. 메뚜기야, 내일이 뭐니 어떻게 내일 또 놀자고 하니 메뚜기는 잠시 후면 하늘에 별들이 반짝이고, 모든 동물이 다 잠을 자게 되는데 잠자는 이 밤이 지나면 내일이 온다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루살이는 내일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메뚜기를 향하여 날씨가 무더워져서 메뚜기가 정신이 나갔나 보다고 놀렸습니다. 다음날 하루살이와 헤어진 메뚜기는 개구리와 온 여름을 함께 놀았습니다. 가을이 오고 날씨가 차가워지자 개구리가 메뚜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메뚝아, 내년에 만나 다시 놀자. 메뚜기는 내년이 뭐냐고 개구리에게 물었습니다. 개구리는 흰눈이 천지를 뒤덮고 얼음이 얼고 몹시 추워서 모든 개구리가 땅 속에 들어가서 오래 오래 겨울 잠을 자고 나면 다시 따뜻한 봄이 오는데 그 때가 내년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러나 메뚜기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개구리를 보고 날씨가 서늘해지니 정신이 나간 모양이라고 놀렸습니다. 하루살이나 메뚜기는 내일 혹은 내년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내일이나 내년을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지 않는다고 해서 내일이나 내년이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일이나 내년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도 각각의 가치관과 목적에 따라 전혀 차원이 다른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육체의 환락을 탐하며 오늘만 위하여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율법에 매여 자유하지 못한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삶이 있습니다. 반면에 오늘이 아니라 영원을 바라보며, 신앙의 은혜 안에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사람의 변화라고 합니다. 사람의 변화는 가치관과 목적에 따라 이루어 집니다.

여러분은 어떤 변화된 삶의 자리에 있습니까 변화의 구체적인 모습을 성경을 중심으로 생각해봅니다.
위대한 복음의 전파자인 바울은 주님을 만나고 그 은혜와 사명을 깨닫고 변화되었습니다. 고후 5:11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전에는 자신을 위해 살았지만 이제 예수를 위해 사는 피조물로 변화된 것입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에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데 앞장서던 사람입니다. 자기의 지식과 자기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살아가던 자기 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 후 예수를 위해 핍박당하며, 고난당하는 예수를 위해 예수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삭개오는 어떻습니까 예수를 만나기 전에 그는 세리장이었습니다. 자기의 동족들의 재물을 탈취하여 자기의 배를 채우던 사람입니다. 물질만을 바라보며, 자기만을 위해 살아가던 이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가 예수를 만난 후 이제 대접하는 사람이 되었고, 남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으며, 예수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와 가정을 위해 열심히 그물을 던지며 고기를 잡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 후 자기의 직업과 가정을 버리고 예수만 따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예수를 만난 사람의 삶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은 예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자기를 위해 살던 사람이 예수를 위해 사는 사람으로 변화되야 합니다. 주의 복음을 위해 사는 사람으로, 주님의 사랑을 행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를 만난 우리는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직도 나를 더 사랑하며, 예수의 사람이 아니라 나 중심의 사람이 아닙니까 예수 보다는 나와 내 가정이 우선이지는 않은지요 예수의 일보다는 내 일이 더 바쁘지 않은지요
나 중심의 삶은 이런 결과를 초래합니다.
바쁘다는 핑계를 많이 합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간은 나의 가장 귀중한 시간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쓰다 남은 시간을 드리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시간이 되면 예배에 참석하고 시간이 안되면 참석하지 않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나 중심의 삶은 예배가 나의 기분에 좌우 됩니다. 그날 기분이 좋으면 예배시간의 모습이 활기차고, 그날 기분이 나쁘면 찌그러진 모습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봅니다.

지금까지 나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까 97년은 하나님 중심, 예수 중심으로 예수의 사람이 되어서 예수의 일만 하고 예수만 기쁘게 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빛을 발하라
본문에 이사야 선지자는 일어나 빛을 발하는 삶을 살라고 권면하고 있다. 빛은 어두움을 밝히며 생명을 성장시킵니다. 어두운 밤에도 한줄기 밝은 빛만 있으면 길을 찾을 수 있으며, 생명은 빛이 있어야만 성장합니다. 빛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아니 없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가장 먼저 빛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만드셨습니다. 빛이 없으면 다른 것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빛이 없는 세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어두움을 밝히시는 생명과 진리의 참 빛이십니다.
달은 스스로 빛을 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달이 태양을 보지 못할 때는 밤하늘에 빛을 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태양을 보면 빛을 비춰 캄캄한 밤을 비춰줍니다.
또 거울도 빛을 발하지 못하지만 빛을 반사하여 비출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스스로 빛을 비출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게 빛을 받아, 본을 받아 세상에 빛을 비추는 성도가 되야 합니다.
바울은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의 생을 어두움속에서 죄의 자녀로 빛과 원수가 되어 사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빛되신 예수를 믿는 성도는 일어나 빛을 발하며 어두움을 물리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더 이상 죄인과 노예가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어두움의 자녀가 아니고 빛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불의와 죄와 거짓이 세상에 판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더 이상 가망이 없는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밤이 깊고, 고통이 깊다 할지라도 불빛이 있으며 어두움을 이길수가 있습니다. 한줄기 빛이 있으면 어두움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을 탓만하지 마시고 우리의 말과 행실로 스스로를 태워 어두움을 물리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①복음의 빛-복음(예수 그리스도)을 전파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이 주곡리에 아직 주의 복음이 들어가지 못한 가정들이 있습니다. 즉 어두움에 있다는 것입니다. 믿는 성도는 이 어두움을 물리치는 빛이 되야 합니다. 복음을 증거하여 참 빛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여 어두움을 물리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 지역에 사는 많은 영혼들에게 빛을 전하는 복음의 빛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② 신앙의 빛-기도하는 생활, 찬송하는 생활, 말씀보는 생활, 예배하는 생활등 모든 성도의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저게 믿음 생활이구나. 신앙생활의 참 모습을 보여 줘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믿는 사람들이 믿을려면 제대로 믿으라는 말을 많이 한다.(남편, 아내, 친구들)
예) 주일 빠지기를 우습게 하며 신앙생활을 하면 다른 누가 그 사람을 보고 그것이 신앙인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초신자들도 당연히 교회에 자주 빠져도 되나보다 생각한다.
예) 목회자가 많이 배출되는 교회와 그렇지 않은 교회의 차이는
바로 목회자에 대한 교회와 교인의 태도에 달려 있다.

③ 생활의 빛-삶의 모든 태도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본이 되야 합니다.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칭찬을 들어야 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항상 남을 존대해야 합니다. 존중해야 합니다.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이타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는, 우러러 보는 존재가 되야 합니다.
특별히 성도의 가종이 기쁨과 사랑의 본이 되야 합니다.
④ 사랑의 빛-예수님의 사랑의 본을 보여주는 성도가 되야 한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셨듯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성도가 되야 합니다. 나만, 내 가족만, 우리 친척만이 우리 시대의 모습이지만 성도는 항상 이타적인 사랑의 삶을 살아 이 땅에 평화를 가구는 신앙인 되시기 바랍니다.
물질이 함께 나누어 져야 합니다.
우리의 재능이 함게 나누어 져야 합니다.(미용, 의술, 법률, 건축
우리의 몸이 나누어 져야 합니다.(헌혈, 자원봉사,
우리의 차량이 함게 나누어 져야 합니다.

성도는 빛이 되야 합니다. 빛을 비추지 못하는 것은 곧 어둠이고, 이것은 버려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97년 빛을 발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97년은
변화된 성도-예수의 사람, 예수의 복음을 위한 사람, 사랑의 사람
빛된 성도-복음의 빛, 신앙의 빛, 생활의 빛, 사랑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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