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큰 빛 예수 그리스도 (사 09:2)

첨부 1


1.성탄의 분위기는 교회 안에서 보다는 밖에서 더 빨리 느껴지게 된다. 물건을 판매하는 업소에서는 12월이 시작하자 마자 성탄츄리를 장식하고 분위기를 고조 시킨다.

2.교회의 경우는 12월 둘째주는 되어야 츄리를 장식하고 반짝이를 점등하는 것이 보통이고 좀 부지런한 교회라야 첫주를 지낸 후 장식하는 것을 본다.

3.그러나 금년의 경우는 전에 비해서 한결 차분해진 것처럼 느껴 진다. 성탄을 조용히 보내자는 켐페인의 영향때문 이라면 퍽이나 다행일 것이다.

4.우리가 성탄의 의미는 기억해야 하지만 의미도 모른채 들뜨기만 한다면 매우 불행한 일이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을 깨우치시려고 오셨기 때문이다.

5.어두운 곳에서는 진실을 알지 못한다. 온통 거짓이 활개를 친다. 주님이 오시던 그 때의 모습은 온통 어둠 뿐이었다.

I.어두움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다(2a).
A.왜 어두웠는가

1.하나님과 동등해지려는 인간의 욕심이 이 땅에서 빛을 몰아내고 말았다. 종이 주인과 같은 위치를 차지하려는 것은 욕심이다. 이것은 옛날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2.이 땅에서 빛을 몰아내고 어두움을 불러들인 직접적인 원인인 “동등해지려는 욕심”은 수천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동일하다. 조금도 변함이 없다. 그래서 부교역자는 담임목사가 되고싶어 하고, 집사는 하루빨리 장로가 되고 싶어 한다.“더 많이”봉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적어도 그사람과 “동등해지고 싶어서”그렇다.

3.왜 나와 똑같이 등록한 “누구 누구”는 집사가 됐는데, 나는 못되야 하느냐고 항의하고 속상해 한다. 도무지 빛이라고는 바늘구멍 만큼도 없다.

4.민주화시대의 군대에서 사병이 장교를 폭행하여 장교가 탈영을 하고 온통 세상을 뒤집어 놓는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온통 어두움만이 가득찬 암울한 모습이다.

5.일반 시민들이 착실하게 낸 세금을 공무원이 몰래 가로채는 세상이다. 죄악에 사로잡힌 인간들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보여주는 적나라한 모습일 뿐이다. 그것은 율법의 고발이다.6.죄를 지적해주고 벌주는 “율법”은 있었지만 새롭게 변화시키는 재창조의 능력은 없었다.어두운 곳에서는 자신을 보기가 더욱 힘들어 진다. 보인다면 잘못된 것들을 분간하겠지만 보이지 않으니 분간을 못하고, 빠지고, 넘어지고, 자빠지기만 한다. 그러니 누가 이렇게 나를 불편하게 하느냐는 원망 밖에는 나올 것이 없다.

7.빛이 없는 사회는 “법”이 주인행세를 한다. 그러나 법이 지배하는 사회에는 용서가 없다. 용서가 없으니 긍휼도 없고 아량도 없다. 참아주는 것도 없다.그래서 “이에는 이, 눈에는 눈”만이 지배할 뿐이었다.

B.주님없는 세상은 어두움만이 지배한다.

1.만일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미래의 문제로 불안해 하거나 질병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것은 빛되신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구원의 확신도 없으면서 체면 때문에 봉사를 한다든지 체면을 세우기 위해서 물질을 헌금한다면 그 마음에는 더 큰 어두움이 자리를 잡게 되고 만다.

3.주님이 없는 행동은 쉽게 피곤해지고 쉽게 지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이 후회스럽기만 할 뿐이다.

4.혹시 지금 나에게 이런 현상은 없는가 왠지 기쁨이 없다든지 하는 일에 도무지 흥미가 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단 하나다. 아직 “빛되신 주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5.남에게 조금만 서운한 소리를 들어도 마음이 격분한다든지, 혈기가 자신을 지배하려 든다면 그것은 주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어둠이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6.어둠움에 머무는 사람이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목회자가 되면 다른 사람들이 불행해 진다. 국회가 여야로 나뉘어 싸우듯이 교회가 나뉘어 싸워서야 된단 말인가 스스로를 시험하여 아직까지 빛이 가득차지 못했다면 직분을 사양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을 하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자는 일이라면 싸울 필요도 없고 반대할 이유도 없다.

II.예수 그리스도는 캄캄한 어두움을 물리 치셨다(2b).
A.모든 사람이 빛의 혜택을 받게 하셨다.

1.주님은 유대 땅에 오셨다. 모세 이후 그들은 율법을 전승해 왔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 했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그 말씀을 지키기 위해 감히 “여호와”를 부를 수 없었고, 그래서 자신들이 그토록 믿는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릴 정도로 그들은 자부심이 컸다.

2.주께서 유대땅에 오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정작 주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자신의 땅을 방문 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주인을 몰라본 것이다. 그 주님은 지금도 때때로 우리들에게 오시지만 여전히 우리들은 그 주님을 박대하고 있다. 때로는 나환자의 모습으로 오시기도 하고, 때로는 거지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찾아 오시지만 우리는 그를 분간하지 못하고 있다.

3.하나님도, 여호와도, 주님도 모르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있다.그래서 주님은 “모든사람들”에게 이 빛을 비추셨다. 노예상인 뉴튼에게도, 살인마 김대두를 비롯한 지존파에게도, 그리고 과학자 파스칼에게도, 음악가 하이든에게도 모두모두에게 주님은 이 빛을 비추셨다.

4.이 빛은 철의 장막 북한 땅에도 비춰졌다. 그래서 6.25때 포로가 되었던 조창호 소위를 끝까지 비춰주시고 결국 그를 자유의 땅으로 인도 하였다. 그가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빛되신 주님”이 그 마음을 끝까지 비춰주었기 때문이다.

B.주님을 모신자에게 빛이 있다.

1.사도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어두움을 비추는 참 빛”이라고 소개하였다. 그 자신이 어두움에 갇혀 있다가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빛을 찾았기 때문이다.

2.양정신 여사는 맹인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마음의 빛을 찾았기 때문에 멀쩡한 눈을 갖고도 심령의 눈이 어두워진 사람들을 빛으로 인도할 수 있었다.

3.강영우 박사는 맹인이지만 장애를 극복하고 박사가 되었다. 그것도 가짜라고 하는 비공인 박사가 아니라 정식 박사가 되었다. 주님이 그의 마음을 비추어준 까닭이었다.

4.손양원목사는 자신의 두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여 양자로 삼았고, 탁명환씨의 아들 지원군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선처해 달라고 탄원서를 냈다. 너무나 큰 빛이 그들에게 있음을 보게 된다.

5.내 마음에 빛이 있다면….미움이 왜 이 땅에 존재해야할까 왜 교회 안에서 다툼이 일어나야 할까 빛을 모시지 못한 까닭이다. 빛이 없어서 한국 교회가 병들고, 빛이 모자라서 우리교회가 부흥하지 못하고 있다.

결론

1.이 땅에 오신 주님은 흑암의 세력을 물리치셨다. 미움가 증오를 몰아내고 용서와 화평을 주셨다.

2.주님을 영접했다는 것은 단순히 언어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심령에 빛이 있는가 어두움이 있는가의 문제다.

3.빛은 모든 흑암의 세력을 삼켜 버리고 녹여 버린다. 형제와 형제의 불화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 빛에 거하자.

4.성탄절은 “내 안에 빛이 있는가 어두움이 있는가”를 확인하는 날이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