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나는 그런 사람을 전혀 알지 못하노라 (사 50:4-9, 빌 02:5-11, 마 26:14-27:66)

첨부 1


철새들은, 자신들이 살기에 적당한 기후를 찾아, 철을 따라 이동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 나라에서 살아가는 철새들 중에서, 따뜻한 기후를 좋아하는 철새들은, 겨울이 되기 전에 먼 남쪽으로 날아갔다가 봄이 되면 다시 돌아와서 가을까지 지냅니다.
철새들이 이처럼 먼 곳까지 날아갔다가 날아오는 수고는 하지만, 그 추운 겨울을 겪지 않아도 되는 유리한 조건 속에서 일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철새들은, 추운 겨울이 지난 후에 맛보게 되는, 새 봄의 산뜻한 기운은 알지 못할 것입니다. 겨울이 길다고 느껴질수록 더욱 기다려지는 봄, 그 새 봄을 맞이할 때의 설렘과 짜릿한 기분은, 아주 추운 겨울을 지내고 난 뒤에야 맛볼 수 있는 느낌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살이가 고달픈 것만은 사실입니다. 혹 어떤 분들은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인생을 즐겁게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갖가지 고달픈 일들을 수없이 겪어 가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뜻한 곳만을 찾아 이동하면서 살아가는 철새들처럼, 우리 인간도 고난과 고통을 피하면서 살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할 수만 있으면 고통이나 고난을 덜 겪고 인생살이를 하고 싶어합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라도 해야 한다고 어른들은 흔히 말하지만, 자기 자식만큼은 고생을 시키지 않으려 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고난을 싫어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그 고난을 스스로 불러들인 분이 있습니다. 그 고난을 피할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고, 또한 피할 수 있는 능력도 있었습니다. 하건만, 그 고난의 길을 피하지 않고 기꺼이 걸어가셨던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 선생님은, 「예수가 우리에게 보여주신 자세를 본받아야 한다(빌2:5)」고 가르쳤습니다. 예수가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든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 뒤에 부활이 있었습니다. 긴 겨울 내내 죽어지내던 생물들이 따뜻한 봄이 되면서 다시 소생하듯이, 예수님은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매섭고 차가운 바람이 자주 부는 겨울 동안에는, 생물들이 다 죽은 듯이 지냅니다. 그러다가 봄이 되면 제철을 만난 양, 기지개를 활짝 펴고 활동을 시작합니다.
죄악이 극성을 부리는 어둡고 추운 겨울 동안에, 예수께서는 온갖 고난과 수모를 다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가 별 수 없는 존재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듯이, 예수님은 그런 고난을 당할 만한 아무 죄도 짓지 않으신 분입니다. 그리고 얼마든지 그 고난을 피하실 수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 고난을 아무 불평도 없이 감내 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은 아무 고난이라도 쉽게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실 때에, 같이 간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하시고 있습니다.「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여기 머물러 있어라. 여기서 나와 함께 있어 다오(마26:38)」
이렇게까지 힘들고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길을 주께서 가셔야만 했던 이유를,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훨씬 더 자기를 낮추어 죄인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하늘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빌2:8-9)」
그냥 아무런 이유 없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던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은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명령을 따르기란,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얼마나 힘드셨으면 「만일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소서(마26:39)」하고, 간절히 요청하셨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리 힘든 일일지라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대로 따르겠노라’고 하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높이 들어올리셨고,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활의 기쁨을 누리게 하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께서 십자가의 사명을 감당하심으로써, 우리 모든 인류가 죄에서 구원함을 받는, 크신 역사를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이루기 위한 사명입니다. 그러나 이 사명을 감당하려면 많은 고난과 고통을 겪어야만 합니다. 물론 생명의 복과 영원한 기쁨이 약속된 사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 사람들은 고난이 두려워 사명 감당하기를 꺼리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밤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다(마26:31)」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말하기를, 「비록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버린다 해도 저는 버리지 않겠습니다(마26:33)」라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 알다시피, 그후 베드로는 어떻게 했습니까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주를 안다고 할 때에 따르는 고통이 무엇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잡히실 때에, 모든 제자들은 다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예수께서 붙들려서 심문을 받고 있는 가야바의 집 뜰 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일생 최고의 치욕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를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어느 여자아이가 “당신도 예수와 같이 다니던 사람이지요”하고 말하자, “네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화를 내며 부인했습니다(26:70).
두 번째는, 또 다른 여자아이가 어떤 사람에게 베드로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사람도 예수와 같이 다니던 사람입니다”라고 말하자, “나는 그 사람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하고, 맹세까지 하면서 부인했습니다(26:72).
세 번째로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한 일은, 너무나 지독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안다면 천벌을 받겠소. 나는 정말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 말이오”라고 하면서, 베드로는 예수를 저주까지 했던 것입니다(마26:7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얼마나 예수를 안다고 시인하면서, 그 뒤를 얼마나 가까이 따르고 있습니까 베드로는 죽음이 두려워 그처럼 예수를 부인했지만, 오늘 우리는 무엇 때문에 예수를 부인하고 있는 것인지요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특별히 그와 다른 두 제자를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를 올라갔습니다. 함께 기도하자고 말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를 비롯한 세 제자는 잠만 자면서 기도를 하지 안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깨어 기도하라. 그렇지 않으면 시험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마음은 간절하나 육신이 약하구나!(26:41)」하시면서, 기도하기를 독려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기를 각오하고 기도하고 있는 사이에, 제자들은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했습니다. 「아직도 자고 있느냐 그렇게도 피곤하더란 말이냐(26:45)」
이사야 선지자가 사명을 열심히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말씀 듣기를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그의 책 50장 4절에서 「나는 항상 주의 말씀을 듣고 싶어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기도하지 아니하고 말씀을 보지 않으면
①영적으로 잠자는 상태에 머물게 됩니다.
ㄱ.그렇게 되면, 세상의 포로가 되어 살게 됩니다. 말씀을 멀리하고 기도하기를 게을리 하면, 그의 믿음은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고로, 세상 세력에 의하여 이끌려 갈 수밖에 없습니다.
ㄴ.세상의 포로가 되어 살게 되면, 헛된 일에 정력을 다 쏟다가 일생을 마치게 됩니다. 영적으로 잠을 자게 되면, 무슨 일에 힘을 기울여야 유익이 되는지를 잘 분별치 못합니다. 그래서 쓸데없는 일만 열심히 좇아 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②주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는 자신을 높이는 생활을 합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고 기도를 열심히 할 때에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힘씁니다만, 그렇지 않으면 자기 영광만 추구하게 됩니다.
ㄱ.자신의 권리를 열심히 주장하고 집착하면서,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 열중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도 당신의 권리를 요구하거나 집착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주 별 수 없는 존재이면서도, 자기의 권리를 그토록 강하게 주장하고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 급급하고 있습니다.
ㄴ.그렇기 때문에, 손해를 보거나 고난 당하는 것을 아주 싫어합니다. 그러니 어찌 주를 위해서 십자가를 질 수가 있겠습니까 믿음의 길이란 십자가를 지는 일인데, 그 십자가를 멀리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베드로처럼 큰소리는 치지만, 결국 주를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는 멸망의 자리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베드로처럼 “나는 그런 사람을 전혀 알지 못한다”고 하게 되면, 그처럼 비참하고 부끄러운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믿는 자에게는 이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주님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새롭게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2.주는 스스로 낮아지셔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얼마 전, 지방 내 어느 교회에서 모임이 있었습니다. 기도회를 갖고 있는데, 동네 어른이 와서 소리 소리를 지르면서 소란을 피웠습니다. 교회 앞에 대 놓은 차를 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 땅은 그 사람이 교회로부터 세를 받고 대여해 준 터였습니다.
그런 정황이라면, 웬만한 사람의 경우 화를 낼 법도 합니다. 그러나 담임 목사님은 아무 기분 나쁜 표정도 짓지 않고, 그분에게 가까이 가서 다독거려 주고 있었습니다. 비록 그 목사가 나보다는 어린 사람이었지만, 저절로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폐병 3기까지 가는 중병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거의 살아날 가망이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죽었구나!’하고 완전히 삶을 포기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열심히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기도 중에 주께 약속하기를, ‘이제 주께서 저를 살려 주시면, 그 생명은 저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주께서 하라시는 대로 살겠습니다’하고 서약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런 결심을 한 순간부터 서서히 몸이 회복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아주 건강한 몸으로 목회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하기를, “그 때 나는 죽었다. 지금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 사시는 것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처럼 ‘나는 죽은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니, 화 낼 일도 없고 속 상할 일도 없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보다 훨씬 귀하신 분입니다. 아니, 그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영화롭고도 귀한 보좌에 영원토록 앉아 계셔야 할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께서
①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낮추신 것입니다. 막강한 권리도 그는 포기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옛 아담이 스스로 높아지고자 해서 타락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높아지고자 하는 욕심이 우리의 본능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 본능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모법을 보여 주시려고, 다시 말하면 겸손한 마음을 지니고 구원의 길을 갈 수 있게 하려고, 당신 자신을 낮추셨던 것입니다.
어디까지 낮아지신 고 하니,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리에서 인간의 자리로, 인간의 자리 중에서도 가장 천한 종(從)의 자리로, 이제는 종의 자리에서 죄인처럼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②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랐던 것입니다.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이 타인을 위하여 손해를 보려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 귀한 지위와 신분을 버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사야가 모든 고난과 수모를 견뎌 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무죄를 증명해 주시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사50:8).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려 주시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 따라 살면, 하나님께서 우리편이 되어 주신다고 했습니다(사50:7). 뿐만 아니라, 우리가 겸손히 주의 뜻을 따르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를 영화롭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세상 것을 가지고 아무리 자랑하려 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는 것과 비교하면, 그 자랑이란 그야말로 새 발의 피에 불과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3.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깨어 기도하라. 그렇지 않으면 시험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예수님은 자꾸만 졸고 있는 그의 제자들에게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겪게 되는 어려운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 따라 값진 인생을 살고자 한다면, 십자가의 고난은 필수적으로 감당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기도하지 않고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은 채, 십자가를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①말씀을 듣고 전하는 일을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를 쉬지 말고 해야 합니다.
ㄱ.그래야,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고 말씀 중심으로 살게 됩니다. 내 생각, 내 욕심을 따르게 되면, 그 순간 그 사람은 죄에 빠지게 됩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있어서 생명입니다. 말씀을 떠나면 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열심히 듣고 또한 전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말씀과 기도는 불가 분리(不可 分離)의 관계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ㄴ.기도를 하게 되면, 주의 뜻을 알게 되고 또한 그 뜻대로 살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성경만 봐서는 안 됩니다. 끊임없는 기도 속에서 성경을 봐야, 성경의 뜻을 밝히 알 수 있습니다. 기도하며 성경을 보고, 성경을 보며 기도를 하게 되면, 인생을 지혜롭게 살 수 있습니다.
②성경을 열심히 읽고 기도 생활을 꾸준히 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됩니다.
ㄱ.이사야 선지자는 말씀을 전하는 일로 감옥에 갇히고 고문을 당하여도, 말씀을 전하라는 명령을 거역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무슨 사명을 받아도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 편에 서 계신다(사50:7)”고 하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 따라 옳은 길을 가면, 어찌 하나님께서 우리를 외면하시겠습니까 이 믿음이 있다면, 어떤 고난이나 어려움도 잘 견뎌 내면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ㄴ.예수를 십자가형으로 집행을 하던 백부장이, 예수께서 운명하실 때의 광경을 보고 하는 말이 “이 사람이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구나!”하고 고백을 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의 죽음이 헛된 죽음이 아니었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거룩한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떠난 것이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병아리가 될 수 없는 무정란과 같은 삶이 되고 맙니다. 성경을 가까이하고 기도를 하면서 살아야, 주님이 가신 거룩한 길을 갈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성경을 잘 알고 기도를 많이 해도, 그리고 우리의 삶을 유익하게 할 만한 지혜를 얻었다 할지라도, 겸손한 마음을 갖지 않으면 정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주께서 십자가를 지심은 겸손의 극치입니다. 겸손히 당신 자신을 낮추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을 전혀 알지 못하노라” 어떤 사람이 하는 말이겠습니까 하나는 위험 앞에서 진실을 부정하는 자요, 다른 하나는 교만하여 곤란을 겪고 있는 사랑하는 형제를 부정할 때에 하는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나의 이웃을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주께서 십자가를 지셨던 것은, 그가 무슨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인류를 위한 헌신이요 희생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가 있다면, 진리가 되시는 예수를 안다고 하는 것이고, 고통을 겪고 있는 이웃을 안다고 하는 고백이어야 합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은 주의 뒤를 끝까지 따르는 신실한 제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