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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로부터 오는 기쁨과 행복 (행 02:14,22-32, 벧전 01:3-9, 요 20:19-31)

첨부 1


이번 15대 국회의원 총선거는 참으로 이변(異變)이 많은 선거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서울에서 처음으로 여당이 다수당이 되었다는 것과, 그리고 여야 중진들이 대거 탈락했다는 점을 들 수가 있습니다.
때로는 선거가 우리에게 걱정과 피해를 주기도 하지만, 한 편 많은 재미와 교훈을 주기도 합니다. 영원한 승자가 없고 영원한 패자도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깨닫게 해주고 있거니와, 자만하거나 게으름을 피우면 패배하게 될 확률이 많다는 사실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또 하나, 이번 선거에서 재미있었던 일은, 선거 분위기가 마치 시소게임을 보는 듯했다는 점입니다. 여당이 아주 불리한 상황에서 출발한 선거가, 이회창 박찬종 씨의 영입으로 여당의 인기는 상승하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장학로 비리 사건의 폭로로 말미암아, 여당의 인기는 떨어지고 야당이 유리한 형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막판에, 북한의 무장 군인들이 비무장 지대를 넘어오는 바람에, 선거 분위기는 다시 역전되고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슬픔과 기쁨이 여러 차례 엇바뀌는 경험을, 이번 선거에 관련된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일입니다.
이런 분위기는 개표 과정에서도 이어졌습니다. 제천 단양 지역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수없이 역전을 거듭한 끝에 당락이 결정된 곳이 많습니다. 경주을(慶州乙) 지구에서는, 다 이긴 줄로 알고 당선 소감까지 밝혔던 사람은 떨어지고, 진 줄 알고 낙심 중에 있던 사람이 당선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승리한 줄 알고 기쁨의 환호성을 치던 사람의 그 기쁨이란, 너무나 짧은 순간에 불과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여덟 번이나 떨어지는 아픔을 겪다가, 지난 번 선거에서 당선되어 팔전구기(八顚九起)의 신화를 낳고 승리의 기쁨을 안았던 김포의 김두섭 씨는, 이번에 다시 떨어지는 슬픔과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한 기쁨을 맛보려는 생각을 아예 갖지 말아야 합니다. 즐거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한 즐거움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올라가는 기쁨을 맛보게 되면 떨어지는 슬픔도 당해야 하는 것이, 이 세상을 사는 우리 인간의 숙명입니다.
분명히 그렇습니다. 이 세상 것을 가지고 기쁨을 얻으려 한다면, 그 기쁨을 얻게 되는 순간에 슬픔을 당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 기쁨과 영광을 잃어버릴까 봐, 두려움과 걱정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기쁨과 영광이란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기쁨이란, 상대적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픔과 고통을 겪어야, 내가 기쁨과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내가 많이 갖게 되는 즐거움을 누리려면, 누군가가 자기 소유를 내놓아야 합니다. 내가 배불리 많이 먹게 되면, 누군가는 배를 곯던지 적게 먹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베드로도, 이 세상의 기쁨과 영광을 구하다가 실패한 적이 있는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순수한 열정으로 주를 따랐으나, 차츰 그 신앙이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예수를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는, 큰 실수와 쓰라린 경험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처음 주님을 따르게 된 것은, 그가 고백한 대로 ‘주는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의 신임을 받게 되게 되자, 엉뚱한 욕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예수가 왕이 되면, 한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가 죽게 되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급기야는 죽음이 무서워서, 스승인 예수를 전혀 모른다고, 잡아떼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말입니다.
그러던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뵌 후에는, 사람이 정말 달라졌습니다.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를 뵙지 못했다면, 국회의원이나 장관이 되려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돈을 싸 들고 윗사람들을 부지런히 찾아다녔을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몇 번이고 국회의원 선거에 나섰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고 새로운 인생을 살 수가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얻게 되는 복이란, 무슨 장관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며 부자가 되는, 입신양명(立身揚名)이 아닙니다. 하다못해, 어떤 기관이나 단체에서 무슨 직함을 얻거나, 무슨 업적을 쌓고 드러내어 인정받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의 첫째 편지 1장 3절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를 믿게 될 때에 하나님께 주시는 복이란
①우리가 거듭나게 되는 특권이고
②하나님과 한 가족이 되어 영원한 소망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③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지금 진심으로 기쁨을 갖고 살게 되었으며, 또한 영원한 즐거움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6).
물론, 예수를 믿으면 국회의원이 될 수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믿는 사람은 더욱 열심히 국회의원도 되고 장관도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직분이나 지위를 얻는 것이 최고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인은, 그런 직분을 얻으려고 하기 전에, 먼저 거듭나는 체험을 가져야 합니다. ‘거듭나는 체험’이란 말할 것도 없이, 그런 명예나 소유를 최고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정직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일임을, 깨닫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국회의원이 되려 한다면, 이것은 너무나 앞뒤가 안 맞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기독교인의 최고 목적은 ‘무엇을 얼마나 소유하고 어떤 지위에 오르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자리에 있거나 어떤 형편에 놓여 있든지 간에, 그 주어진 여건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이 부활을 믿는 기독교인의 삶이요, 그러한 삶 속에서 우리는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을 맛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잠깐 누리다가 말게 될, 이 세상 즐거움과 기쁨을 얻기 위하여 애쓰고 있습니까 아니면 영원한 즐거움을 바라보면서 생명의 길을 가고 있습니까 물론 이 자리에 참석하신 분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행복이 소중한 줄 알고 있기에, 모든 일을 젖혀놓고 교회에 나오셨으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1.하늘로부터 오는 영원한 생명을 충분히 누리고 있는지,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예수를 따르며 영생을 믿노라고 하면서,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볼 때에 옳지 못한 일을 행하고 있으면, 그의 삶은 영생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고 있으니, 믿음 가진 사람들이 한 표를 던져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돈 봉투를 돌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과 그의 교회를 대단히 크게 모독하는 행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 부활은 예수님께서 이루셨습니다만, 그 뒤를 이어 우리가 계속적으로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불의하고 거짓된 것들, 남을 미워하거나 욕하고 원망하며 탐욕을 부리던 일들을 십자가에 못박고,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와 함께 새롭게 태어나서, 하나님의 말씀 따라 정직하게 살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만일 부활의 삶을 살지 못하고, 여전히 세상 즐거움과 명예만을 추구하면서, 생명이 아닌 죽음의 길로 달려가고 있다면,
①그것은, 예수의 부활과 영생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탓입니다.
ㄱ.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너무나 확실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믿지 못한다면, 새로운 인생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그리고 그 사실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의 모든 것이 헛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ㄴ.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하면, 바르게 살려는 용기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믿음대로 살려고 할 때에 겪게 되는 시련을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를 뵙기 전에는 그렇게 비겁할 수가 없었으나, 부활하신 예수를 뵈온 후에는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어린 소녀 앞에서도 예수를 모른다고 하면서 벌벌 떨던 그가, 부활을 체험한 후에는 대제사장이나 총독 앞에서도 담대하게 예수를 증거 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를 믿지 못한다면, 아주 작은 불의(不義)의 세력 앞에서도 쉽사리 굴복하게 되는, 비참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의 부활을 확신하지 못하고, 그래서 불의의 세력을 이겨내지 못하면
②거듭나는 특권과 영생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ㄱ.거듭남이란, 이제까지 우리가 추구하던 것들이 얼마나 보잘것 것 없으며 쓸데없는 것이라는 것을 철저히 인식하고, 진실로 우리 인간이 영원토록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그것을 위하여 새롭게 다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예수 믿기 이전에 소중하게 여기던 것들을 헌신짝처럼 미련 없이 다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ㄴ.그러나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하면, 이렇게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새롭게 태어난 기쁨과 은혜, 그리고 즐거움을 맛보지 못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을 더 의지합니다. 그래서, 언제쯤이나 얻게 될는지 모를, 세상 행복을 열심히 추구하고, 또 얻었다 하는 순간에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불안한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불안한 마음을 떨쳐 버리고, 어떻게든지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통하여 다윗의 예언을 들려주십니다.
「주께서 내게 가까이 계시니, 내 마음이 떨리지 않는다. 내 마음이 기쁘고 한없이 즐거워 편안히 살아가고 있다(행2:26)」
그렇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고 주를 가까이 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2.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삶의 즐거움과 기쁨을 주십니다

다시 한 번, 베드로가 말하는 다윗의 예언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몸이 주님을 애타게 그리니, 주께서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또한 주는 내게 생명의 길을 보여 주실 것이니, 주는 나의 기쁨과 즐거움이다(행2:27-28」라고 했습니다.
①예수의 부활은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을 갖게 해 주었습니다.
누구나 다 가치(價値) 있는 삶을 살아야 할 줄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은, 그런 삶이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기보다는 고통이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바르게 살면, 그야말로 세상적인 복을 더 많이 누려야 할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르게 살면, 세상 사람들이 그를 인정해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옳은 일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예수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정말 억울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있던 양심가들은, 세상이 완전히 끝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예수의 삶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높이 올리셔서 귀한 자리에 앉히심으로써, 그의 삶이 옳았다고 하는 것을 증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성실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 결코 헛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정직하게 살아보려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소망과 기쁨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②예수의 부활은, 그 부활을 믿는 사람들에게 평안함과 기쁨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이 바르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소망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의 부활은, 삶의 기쁨과 평안한 마음을 가져다주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베드로는 「하늘로부터 오는 기쁨이요 행복이라」고, 그의 첫째 편지 1장 8절에서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계속 말하기를 「여러분은 예수를 한 번도 뵌 일이 없지만, 예수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믿고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그것은 예수를 믿는 믿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삶은 틀림없이 옳은 것이고, 또 그렇게 살아야 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우리는 주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현실’이라는 시간 속에 갇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이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해 주셨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고, 또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며,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된다는 것을 다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우리의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뒤만 따라가면 됩니다. 그 길이 험하고 힘들지만, 그 고난이나 시련을 겪는 것이 결코 헛되지 않고 보람된 일이기 때문에, 고난이 닥쳐도 두렵지 않습니다. 시련 가운데에서도 소망을 갖고 기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3.부활과 영생에 대한 확신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의 산 증인이 되어 살아야 합니다.

영국의 어떤 학자가 광산촌에서 기독교와 성경을 비판하는 강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의 부활은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이 때 검은 광부복을 입은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선생님, 저는 일개 광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예수의 이야기가 꾸며낸 이야기요, 성경은 거짓이라고 하신 말씀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습니다.
“3년 전까지만 해도, 나와 우리 가정은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매일 술로 세월을 보냈고, 처자식에게는 욕을 퍼부어 대면서 횡포를 부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여 믿게 된 후, 나는 그분을 내 중심에 모셨고, 나는 지금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내가 술을 끊고 처자식을 사랑함으로써 우리 가정은 새롭게 변화되었고, 지금 우리는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나의 이러한 사실은 여기 모인 광부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이야기가 꾸며낸 이야기라요 그렇다면, 나의 가족과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변화를 받아 새롭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의 꾸며낸 이야기를 믿고 되어진 일이란 말입니까”하고 항변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다른 선택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국회의원을 뽑을 때에는, 여러 후보 중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을 하나 선택하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 길에 있어서, 우리에게 바른 인생 길을 가르쳐 주실 분은 오직 한 분뿐입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①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사랑해야 합니다.
ㄱ.의심 없이 믿고 가까이 해야 합니다. 물론 확인 작업은 필요합니다. 내 생각과 지식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중에 성경을 열심히 읽고, 예수가 나의 스승이 될만한 분인지를 깨우쳐야 합니다.
ㄴ.그래서 예수님만이 나의 기쁨이요 즐거움이 된다는 것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죽는 순간까지 계속 이 사실을, 생활 속에서 체험하고 확인하면서, 다시금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②그러나 믿음의 길에는 시련이 있습니다.
ㄱ.하지만, 시련은 우리 믿음이 얼마나 순수한 지 알아보고자 하는 시험이라고(벧전1:7),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그러나, 믿음대로 살려고 하다가 당하는 시련인지, 자신의 욕심 때문에 당하는 시련인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ㄴ.시련을 당할 때마다, 좌절하거나 실망해서는 안됩니다.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더욱 강하고 순수한 신앙을 갖도록,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고 사는 우리에게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③우리 자신이 부활의 산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서로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짜 부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이런 삶을 살아도 손해가 되거나 억울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살아야 정말 사람다운 삶이라는 것을 확실히 믿고, 하늘로부터 오는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살아감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진실로 복된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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