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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을 바쳐서 이루신 사랑 (행 04:5-12, 요일3:16-24, 요 10: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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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어버이날에, 제 아내 혼자서 대전에 계신 부모님을 뵙고 왔습니다. 핑계는 건축 때문이라 했지만, 다른 사정이 저를 다시 한 번 불효하게 만들었습니다. 내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뵈리라 다짐해봅니다.
이번에, 아내가 다녀와서 하는 말이 제 가슴을 때렸습니다. 아내가 찬거리를 사러 시장 갈 때에 아버님도 함께 가셨던가 봅니다. 아버님이 앞서 가시고 아내가 그 뒤를 따라갔는데, 걸어가시는 아버님의 뒷모습을 바라보자니,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더라는 것입니다. 아버님께서 뒤뚱뒤뚱 힘없이 걸어가시는 그 뒷모습이, 아내가 보기에 너무 안쓰러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으면서, 저는 속으로 ‘그 당당하시던 모습도 흐르는 세월과 함께 어쩔 수 없이 잃어버리시고, 이제는 발걸음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형편이 되셨구나!’하고 탄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부모님을 가까이 모시고 살지 못하는 제 형편이기에 그저 안타깝게 생각할 따름인 것입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다음에 아무리 후회하고 애통한들 무슨 소용입니까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에 편안히 모셔야 할텐데, 제 현실은 그런 마음을 용납하지 않고 있습니다. 단지,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부모님께 욕을 돌리지 아니하고 기쁜 소식을 전해드리도록 힘쓰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마다 그 부모님과의 애증(愛憎)관계는 제각각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부모님의 사랑에 대해서 한없이 고마워하고, 또 어떤 사람은 부모님을 원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모님의 사랑과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힘쓰고 있습니다.
자식이 그 부모의 은혜를 다 갚는다고 하는 것은 아주 요원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식이 그 부모의 사랑을 다 이해하고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자신도 자식을 낳아 키우게 될 때에 비로소 부모의 은혜를 조금은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부모를 공경하는 일이 맘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님의 은혜를 깨닫고 보니, 그 부모님은 세상에 계시지 않더라’고 어느 시인이 노래했듯이, 하나님의 은혜도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쯤이나 온전히 깨닫게 되지 않을까요 진작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산다면 후회 없는 인생을 살 수 있으련만, 그처럼 쉽게 깨닫고 사는 경우가 흔치 않다는 게 문제입니다.
요일 3:16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써 사랑의 본을 보여주셨고, 그래서 우리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우리 인간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인간 예수로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그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랑에 대해서, 예수님은 요 10:11 이하에서 비유를 들어 아주 구체적으로 잘 밝히고 있습니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선한 목자다”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목숨을 빼앗을 수 없지만, 예수님은 양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끼기 때문에, 그 양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평소에 당신이 말씀하신 그대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몸을 바치셨습니다. 죄와 사망이라는 극악한 세력으로부터 우리 인생을 지키시기 위하여 당신 몸을 던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참생명을 얻게 하셨고, 또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특권까지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찬송가 404장에 있는 구절처럼,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사랑을 깊이 깨닫고 직접 현실감 있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그냥 저절로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기자는 3장 16절에서 『우리도 믿음의 형제들을 위하여 생명을 바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남을 사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사랑의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우리가 왜 예수를 믿습니까 무엇 때문에, 이렇게 교회에 와서 말씀을 배우고 예배를 드립니까 두말 할 것 없이, 하나님을 바로 알고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계명이란 무엇입니까 물론, 그 계명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요일3:23 말씀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할 것을 명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이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되고, 하나님께서도 그와 함께 살게 된다(23)』고 밝히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어떤 식으로 주의 가장 큰 계명인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농사를 지을 때에는 많은 소출이 있기를 원하면서도, 우리 신앙인에게 정말로 중요한 영적 열매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일3:22 말씀에 『하나님께 복종하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열심히 했다면,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인 이웃 사랑을 실천할 때에 신앙생활을 바르게 한다고 할 수 있거니와, 우리가 평소에 소원하면서 구하던 일들까지도 성취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생명을 바쳐서 이루신 그 사랑을, 작은 예수인 우리가 본받아 사는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부끄러운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왜냐하면, 예수의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할 때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이미 여러 차례 말씀드렸듯이 ‘사람’과 ‘생명’과 ‘생활’이라는 단어는 하나의 어원인 ‘’에서 나왔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사는 이유는 사랑이요, 사람이 살아있다는 증거도 사랑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는 생명이다’라고 하셨는데, 그 생명도 사랑을 의미한다 할 수 있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예수를 믿는 우리가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지 않을 경우, 그런 사람은 결코 믿음이 있노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그 외형은 신앙인처럼 보일지 모르나, 그 내면은 세상 사람들과 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요컨대, 영적으로 생명을 잃어버린 자라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는 것입니까
①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분인지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거듭 밝히지만, 예수는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써 ‘사랑의 본’을 보여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사랑을 할 수 있도록 본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목적도 ‘올바른 사랑의 실천’에 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우리가 이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부자로 잘사는 것입니까 병자를 고치거나 무슨 기적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물론, 그런 것을 다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가 세상에 보여줘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사랑의 능력과 올바른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의 능력을 힘입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②그래서, 예수의 참된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이해와 관심입니다. 생각과 마음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영춘교회 예배당 신축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돌아보는 것도 사랑입니다. 부부가 서로의 입장과 형편을 이해하고 도와주는 것도 사랑입니다. 남북 통일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기도하는 것도 사랑입니다.
그런데, 참된 사랑은 내 것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시간과 나의 물질을 드려서 관심을 표시할 때에야 참된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사랑을 뿌린 만큼 그 사랑의 열매도 거두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무슨 목적을 가지고 사랑을 베푸는 것은 참사랑이 아닙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시간과 물질을 드려 사랑할 때, 하나님의 기적과 능력은 나타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참사랑이 너무나 부족합니다. 어떨 때에는 ‘왜 교회를 다니는 것일까’ 하고 의문이 들 정도로, 주의 사랑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는 사람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저 자신입니다. 제 모습을 꼼꼼히 살펴보면, 예수의 참사랑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미움과 시기와 원망과 질투를 품고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이런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부끄러운 모습을 속히 벗어버려야 하겠습니다. 성도요 집사 권사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생활을 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와 여러분이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항상 잊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2.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서 그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참사랑은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무슨 칭찬이나 명예를 얻기를 위해서 사랑을 베푼다면, 그것은 참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본분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의 예수를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김 권사가 기회 있을 때마다 “예배당 건축이 끝날 때까지, 저는 영춘교회 권사입니다”라고 한 말을, 저는 인상깊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김 권사는 돈을 목적으로 일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건축에 대한 대가로 얼마를 주던지 상관하지 않고, 자신은 하나님의 집인 예배당을 온전하게 짓는 일에 힘쓰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는, 주께서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자를 비교해서 말씀하십니다. 삯꾼이란 품꾼을 말합니다. 돈을 목적으로 일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의 본질이 사랑일진대, 우리 인간은 돈을 목적으로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그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 경우, 우리가 사랑하며 살아가기에 필요한 물질은, 이 세상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풍족하게 허락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①예수 이름으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그런 삶이야말로 멋있는 인생이요, 우리가 본받고 따라갈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나만을 위하여 사는 것은 참으로 무가치한 것입니다. 주님처럼 자신을 희생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이웃을 진정 사랑하며 사는 것만이 참된 인생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런 생각과 믿음을 갖고 말씀 중심으로 사는 것이 구원받은 삶이요 영생입니다. 그 길이 천국으로 가는 길인 것입니다.
②예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본받아 살아감으로써 부활의 삶을 살도록 합시다.
남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껴야 합니다. 내 심령에 조금이라도 미움이나 원망이 있으면 안됩니다. 그런 마음은 내게 올무가 되어 나를 불행에 빠뜨립니다. 예수님처럼 살아야 진정 복된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한들 아무 소용없습니다. 내 것을 희생할 줄 모르는 사람은 주의 기쁨과 은혜, 하늘의 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주님처럼 모든 것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로만 아니라, 내 것을 드리는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참된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의 은혜를 보답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 구원받은 자요, 부활의 은총을 누리며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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