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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당하거든, 진정 기뻐하라 (행 01:6-14, 벧전 04:12-14, 요 17: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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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어느 권사님 댁에 들렀더니, 화분에다가 고추 한 그루를 심어 놓고는, 지주를 네 개나 세워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고추를 몇 개나 따먹게 될지는 몰라도, 그 고추나무는 좋은 주인을 만나 행복한 일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 고추나무는, 일생을 지내는 동안, 바람에 넘어질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아마 벌레나 병균들도 범접을 못하리라 여겨집니다. 거기가 어디라고 접근을 하겠습니까 주인 어른께서 고추나무를 얼마나 아끼며 보살피고 있는지, 하찮은 벌레나 병균이라고 하지만, 그 사실을 알 것만 같지 않습니까
또 어느 집사님 댁을 갔더니, 집사님께서 강아지의 입을 벌리고 손가락을 집어넣어 무엇인가를 끄집어내고 있었습니다. 목에 무엇이 걸렸는지, 강아지가 밥을 안 먹는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날 보니, 그 집사님이 약 봉지를 들고 있었습니다. 강아지가 체한 것 같아서, 약방에서 약을 지어 오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그 집사님이 강아지와 대화하는 것을 보면, 사람 이상으로 정이 뚝뚝 떨어집니다. 아마 멀리 떠난 손자들 대신, 강아지들을 키우면서 정을 붙이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이 식물이나 동물들을 그처럼 정성스럽게 보살피고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돌보시는 정성이 어떠할까요 말로 이루 다 표현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의 첫째 편지에서 「시련이 닥치더라도 당황하거나 놀라지 마십시오. 시련은 결코 이상한 것도 별다른 것도 아닙니다(4:12)」라고 하면서, 오히려 시련을 당하면 진정으로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베드로는 말하고 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게 되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십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기도하기를 「아버지 하나님께서 친히 이들을 돌보아 주소서(요17:11)」하고, 하나님께 부탁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슨 염려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다만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해야 할 것은, 주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일을 얼마나 과연 잘 감당할 수 있을는지, 그것이 문제입니다.
고추나무를 정성껏 가꾸면서 보살폈건만, 고추가 몇 개 달리지 않았다면, 그 실망이란 어떻겠습니까 달려 있는 고추마저 시원치 않으면, 더더욱 큰 실망을 하게 될 것입니다.
강아지에게 약까지 지어다 먹이며 정성을 기울이던 집사님은, 어느 날 대단히 속상한 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강아지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강아지가 나가지 못하도록, 높다랗게 솟을대문까지 해 놓았는데 말입니다. 마치 자식을 잃어버린 듯, 대단히 섭섭한 눈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할 경우, 하나님의 실망은 어떠하겠습니까 그처럼 신신 당부하면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했건만, 집사님이 주일에 교회에 있지 아니하고 엉뚱한 곳에 가 있게 된다면,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 아프시겠습니까 사람을 강아지처럼 가둬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베드로는 우리에게 교훈 하기를,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저주와 모욕을 당하거든 행복하게 생각하라(벧전4:14)」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靈)이 큰 영광으로 감싸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길을 열심히 가게 되면, 그래서 믿는 자의 사명을 잘 감당하게 될 경우, ①주께서 돌봐 주시고, 성령이 감싸주실 것이며
②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는 날에, 그 영광을 함께 받고 한없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벧전4:13). 그 날에 맛보게 되는 영광과 기쁨은, 이 세상 것과는 전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살피심을 받으면서, 주께서 일러주신 ‘부활의 증인’ 역할을 잘 감당하게 되면, 이 세상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참 기쁨과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그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 볼 때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현재는 별스럽지 않게 여겨질 것입니다. 하지만 머지 않아 주께서 다시 오시면, 실감이 날 것입니다. 그리고 적잖이 후회를 하게 되겠지요.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요17:9에서 말씀하시기를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들이란 바로,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우리 모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고난을 잘 견딜 수가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잘 참고 이겨냄으로써, 부활의 승리와 영광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뒤를 따르면, 영원한 영광과 기쁨을 누릴 수 있으리라 믿고, 오늘 믿음 따라 가는 길에서 겪게 되는 시련을 참아 내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무엇 때문에, 고난을 참아 내야 합니까 진정 무엇을 얻고자 하여 시련과 고통을 참는 것입니까 끝까지 예수를 잘 믿으면 무엇을 얻을 수 있기에, 억울하고 속상한 일까지도 참아 내야 한단 말입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 2절에서 「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영생이 우리 믿는 자가 추구하는 최고의 목적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이들이

1.영생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고, 그것을 얻고자 하는 의지도 없습니다

요 17:3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에 이르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을 알려고 노력했으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얼마나 배우려고 힘썼는지요.
유럽의 오스트리아는 관광으로 유명한 나라입니다. 그 나라의 ‘잘츠부르크’라고 하는 도시에는, 매일 수천 명의 관광객이 몰려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도시에 있는 한 대학에서 관광객에 대한 연구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관광객들의 행동을 잘 알아, 그에 대처함으로써, 더 많은 관광 수입을 얻고자 함이었습니다.
한 사람 당 15분씩, 비디오로 촬영을 했는데, 무려 4만 명을 조사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관광 수입을 최대한 많이 얻으려는 목적으로, 대학교수 두 분이 많은 대학생을 동원하여 조사를 하고 연구를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관광 수입의 극대화를 위하여, 4만 명의 관광객을 조사해서, 그 행동을 알아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생을 얻고자 하는 우리는, 그 영생을 주신다고 하는 예수에 대해서, 얼마나 알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지요 그리고 얼마나 많은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고 있는지요
①우리는 예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이 많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면, 영생을 지켜 산 사람들에게는 무한한 영광과 기쁨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고로 먼저 우리는, 예수의 재림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셨을 때에, 천사들이 나타나 말하기를 「예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 가시던 그 모양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행1:11)」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영생일까요 그것은 영원하신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곁을 떠나지 않게 되면, 우리는 영원한 삶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이 믿음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따라 삶으로써, 우리는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이 영생을 소유한 사람은, 주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큰 영광과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라고, 베드로 선생은 그의 첫째 편지 4장 13절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이 분명치 않으면
②믿는 자에게 따라붙는 시련을 잘 이겨내지 못합니다.
벧전 4:12에서는 ‘시련의 불’이라고 표현합니다. 그 「시련의 불이 옮겨 붙더라도 당황하지 말라」고, 베드로 선생은 우리를 격려합니다.이 ‘시련의 불’이, 믿는 자에게는 결코 손해볼 일이 없는 불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영원히 복된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이 되며, 그 시련을 통해서 더욱 큰 믿음을 가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개구리를 뜨거운 물에 갑자기 집어넣으면 튀어나오지만, 미지근한 물에 넣어 두고 서서히 불을 달구게 되면, 자신의 생명이 다하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편안하고 별 탈이 없는 게 복된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려움이 많아야 복되다는 말은 아닙니다. 믿음 따라 바르게 살고자 하면, 자연히 환난과 시련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악된 사람들이 바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지를 않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해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환난과 시련의 불’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 짧은 인생을 즐겁게 살려는데 있지 않습니다. 영원히 값진 삶을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 이러한 자세를 갖고 사는 사람을,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 합니다. 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2.주님께서는 영생을 주셨고, 또한 하나님은 그들을 항상 돌봐 주십니다

물론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요17:2에서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모든 사람들을 다스릴 권한을 주셨다」고 하면서, 그 권한을 가지고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①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27절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 애쓰지 말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 애써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려는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나를 보내셨다」고 말입니다. 바울 선생도 이 말씀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참을성 있게 실천하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하는 영광과 명예와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롬2:7).」
그렇습니다. 「죄의 값은 죽음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롬6:23)」
②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이 진리의 말씀을 믿고 따르다가 고난 당한 사람들을 위하여, 다시 오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영광과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바보같이 무슨 믿음이냐’ ‘신나게 인생을 즐기지 못하고, 고리타분하게 교회에 가서 꾸부리고 앉아 있느냐’ ‘세상에서 자유스럽게 살지 못하고, 왜 일부러 교회에 가서 구속받고 사는가’ ‘모처럼 쉬는 일요일에, 산에나 가서 재미있게 놀다가 올 일이지, 그 아까운 시간을 교회에 가서 낭비하느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사랑과 은혜로 여러분을 초청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그렇게도 빨리, 하나님을 떠나서 다른 길을 따라가고 있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하늘나라로 가는 길이 아닙니다(갈1:6)」라고, 안타깝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길고 짧은 것은, 두고 보면 알겠지요.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주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믿음을 지켜 살면서 영원한 생명을 위해 열심을 다한 사람들에게, 큰 기쁨과 영광이 있을 것임을 믿습니다.
③그리고 하나님은, 믿음을 지켜 살 수 있도록, 그리고 고난을 극복하고 더욱 열심히 부활을 증거할 수 있도록, 성령의 권능을 주십니다.
「믿음을 위해서 싸우시오. 하나님께서 그대에게 주신 영생을 굳게 간직하시오. 이 영생을 위해 하나님께서 그대를 부르셨고, 그대는 많은 증인들 앞에서 훌륭하게 믿음을 고백하였습니다(딤전6:12).」바울 선생이 한 말입니다.
잘 키워서 충실한 열매를 얻고자, 고추나무 한 그루를 위하여 지주 네 개를 세운 어느 권사님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그와 같이 잘 지켜 보호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실한 믿음과 성실한 삶을 통하여, 큰 기쁨 얻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아버지께서 가시신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시듯, 이들을 내게 주셨으므로, 이들은 내 영광입니다(요17:10)」라고 고백했습니다.

3.이제 우리는 주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의 증인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목적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영생을 얻는 길은, 하나님과 예수를 잘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훌륭한 인생’이 되기를 원하셔서, 아들인 예수를 보내셔서 참 생명을 얻게 하셨고, 보혜사 성령을 보내셔서 바르게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군고 하니, 바로 그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셨던 분입니다. 죽어 가는 줄도 모르고 따뜻한 물 속에서 나올 줄 모르는 개구리처럼, 우리 인생들은 죄에 빠져서 나올 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인생들을 죄와 사망에서 건지시려고, 예수님은 스스로 죽음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누굽니까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사람들입니다. 선택된 사람들은 참 많지만, 그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은 아주 적습니다. 다행히 우리는, 그 부르심에 응답할 수가 있었습니다. 정말 영광스러운 선택을, 우리가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①주와 하나님을 굳건히 믿고 영생을 소유해야 합니다.
당뇨병 환자들은 보리밥을 먹어야 합니다. 만일 당뇨병 환자가 죽는 줄 알면서도 쌀밥을 계속 먹는다면, 그처럼 어리석은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올바로 믿어야 영원히 사는 길인 줄을 잘 알고 있건만, 세상 즐거움과 죄악된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참으로 어리석다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ㄱ.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고 바른 믿음 생활을 하기 위하여, 열심히 예수를 알도록 해야 합니다.
과연 우리가 예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다 투자한다 해도, 손해가 없는 일인지 아니면, 세상일을 다 한 다음에, 여가가 있을 때에나 알아볼 정도의, 별 볼 일 없는 존재인지
이제는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에서 어물거리다가는, 슬피 울며 탄식할 날이 틀림없이 올 것입니다.
ㄴ.예수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이, 하나님 중심으로 방향이 잡히게 됩니다. 믿는 목적과 방향만 뚜렷하다면, 환난이나 시련인들 두려울 게 있겠습니까
브라질의 아마존 강 유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질병으로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삶은 덤으로 사는 것이라 여기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써, 선교 활동을 하고 있노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몇 번씩이나, 죽음의 문턱을 드나들었기 때문에,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지, 분명히 깨닫게 된 것입니다.
②성령의 권능을 받고, 부활의 주님을 열심히 증거 해야 합니다.
부활만이 살길입니다. 물론 부활의 체험을 하려면, 이 세상 것과 함께 죽어지는, 십자가 고난을 겪어야 합니다. 이 과정을 겪게 되면, 부활하여 영생의 길을 가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 썩어질 것과 함께, 영원히 죽게 될 것입니다.
ㄱ.이 과정을 잘 밟으려면, 말씀보고 기도하는 경건 생활을 성실하게 해야 합니다. 처외삼촌 벌초하듯이 믿음 생활을 대충하게 되면, 죽도 밥도 안됩니다. 무슨 일이든지 열심히 해야,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ㄴ.말씀과 기도의 생활을 착실히 하게 되면, 우리의 가는 길이 옳은 길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통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③주께서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며, 모든 고난을 기쁨으로 이겨내도록 합시다.
잘 하고자 하면, 시련은 반드시 있습니다. 믿음 생활을 하면서 아무 고통이나 아픔이 없다고 한다면, 그 믿음을 의심해 봐야 합니다.
ㄱ.시련이 닥치면, 당황하거나 주저할 일이 아닙니다. 바로 그 때가 주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믿음 생활을 더욱 열심히 함으로써, 사탄의 계략을 물리쳐야 합니다.
ㄴ.그러면, 하나님께서 천사를 동원하여 우리를 돌보시고 있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우리의 믿음은 굳건해집니다.
결국 올바른 믿음의 길에는 시련이 따르게 되어 있고, 그 시련을 이겨냄으로써 믿음 생활을 더욱 확실히 할 수가 있습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하신, 주님의 명령을 잘 수행함으로써, 마지막 날에 회심의 미소를 머금을 수 있는, 복된 인생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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