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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의 능력은 용서와 평화 (민 11:24-30, 행 02:1-21, 요 20: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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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석가모니께서 가필라 국(國)의 왕자로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에, 한 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다른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면서 외쳤다고 하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는 오직 나 혼자 뿐’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는지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는, 인간 세상에서 직접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함께 하셨음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예수 탄생에 대하여 예언하되,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이름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석가모니 불(佛)께서는, 인간 스스로가 고독하게 홀로 모든 진리를 깨닫고 살아가야 할 존재임을 드러낸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든지 믿음을 갖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살 수 있는 존재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저는 불교의 진리를 잘 모릅니다. 다만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생각해 보면, 기독교와 불교는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우선, 모든 죄의 근원을 욕심으로 보는 것이 같습니다. 그래서 그 죄에서 벗어났을 때에 자유롭게 되는 것을, 불교에서는 해탈(解脫)이라 말하고 기독교에서는 구원(救援)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죄에서 자유롭게 되는 과정이 다릅니다. 다시 말하면, 해탈의 방법과 구원의 방법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ㄱ.불교에서는 말하는 해탈을 하려면, 깊은 산 속 조용한 곳에서 혼자 기도하는 가운데, 진리를 깨닫는 득도(得道)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기도하는 중에 은혜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2장의 말씀을 보면, 오순절 날 예수의 제자들이 한 곳에 모여 함께 기도하는 중에 성령이 임하는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불교에서는 혼자서 기도하는 중에 득도를 하게 되고, 기독교에서는 여럿이 함께 기도하는 중에 성령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ㄴ.불교에서는 득도를 하게 될 경우, 인간이 부처가 되는, 곧 신(神)이 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 스스로가 인간의 위치에서 신(神)의 자리로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위치에서 인간의 자리로 내려 오셔서, 우리 인간과 함께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신(神)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어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부족한 인간을 도와 구원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결국 불교에서는, 인간이면 누구든지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신(神)이 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그러한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다고 봅니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 물 속에서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헤엄을 잘 치는 사람일지라도, 그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을 영원한 죽음의 바다로 빠뜨리는 죄라고 하는 것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인간 능력 밖의 문제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에, 초월적인 존재인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울 선생님은, 그가 로마교회 교인들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나를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속으로는 올바른 일을 해야지 하면서도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내가 원하지 않는 짓, 내가 미워하는 짓만 저지르고 있습니다. 나는 내 행실이 잘못되었다는 것도, 내가 어기고 있는 말씀이 선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러는 나를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나는 이미 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게 이런 악한 일을 시키는 것은, 내 속에 들어 있는, 나보다 더 힘이 센 죄입니다(로마서 7장 15-17절)」
‘내 속에 있는 죄’가, 나보다 더 힘이 세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계속 말하기를 「아무리 몸부림쳐도, 나는 나에게 올바른 일을 하게 할 수 없습니다. 선한 일을 하고 싶어도 되지 않고, 악한 일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도 되지 않습니다(로마서 7장 18하-19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다른 길이 없습니다.
ㄱ.함께 모여서 기도해야 합니다. 나 혼자의 힘으로는 어렵습니다. 혼자서 기도해야 할 때도 있으나, 우리보다 훨씬 더 강한 세력인 사탄을 이겨내려면, 합심하여 기도함이 좋습니다.
ㄴ.그렇게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 체험을 해야 합니다. 성령 체험 가운데, 새롭게 거듭나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제까지 나 자신만을 위하여 욕심으로 살던 생활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나를 도우시는 주님과 함께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해야 합니다.
ㄷ.그러면, 악령은 떠나가고 성령이 함께 하심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내 노력과 의지로써 살아온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깨닫고 보니, 이제까지 내가 살게 된 것이,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었음을 알고, 깊이 감사하면서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성령 체험이라 말합니다.
ㄹ.성령 체험을 하는 순간만큼은, 마음에서 모든 미움이 사라지고 슬픔과 괴로움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까닭에 불안과 걱정이 떠날 날이 없었는데, 성령이 함께 하시는 순간에 평안과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바로 그 순간을 가리켜서, 구원이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ㅁ.구원이 이루어지게 되면, ‘나를 위한 삶’에서 ‘주를 위한 삶’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이 부탁하신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육신의 즐거움과 쾌락을 위한 일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내 영혼과 마음이 기뻐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의 형편은 어떻습니까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까 육신을 위한 일과 영혼을 위한 일을 비교해 볼 때에, 예수 믿기 이전보다 지금이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지요
우리의 마음을 그토록 괴롭히는 걱정과 근심이 죄에서 오는 것이며, 그 죄란 이 세상에 속한 육신을 위하여 욕심을 부리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말씀을 듣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과연 그 욕심에서 얼마나 벗어나려고 했던가요 인간 고통의 원인인 욕심은 버릴 생각을 않으면서, 마음의 평안만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는 것은 아닌 지요
욕심을 벗어 던지고 새롭게 살기 위해서는, 함께 모여 기도하고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은 고백한 것처럼, 살아가는데 있어서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일에는 대단히 열심인 반면에, 정작 꼭 필요한 일은 아주 등한히 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1.두려움과 미움의 영(靈)이 우리에게서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게도 총명하던 사울 왕이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엉뚱한 일에만 신경 쓰더니, 그만 미움의 영에게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아끼는 신하요 사위이기도 한,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니다가, 끝내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모세 시대에, 70명의 지도자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때 ‘만남의 장막’에 있지 아니하고, 진영(陣營) 안에 머물러 있던 엘닷과 메닷 두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내려 예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여호수아가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저들이 기도회에는 참석하지 않고, 그냥 진영 안에 머물러 있다가 예언을 하는 것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된다”고, 모세에게 말했습니다.
이 때에 모세가 한 말은 “지금 네가 나를 생각해서 질투하고 있느냐(공동 번역)”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좋은 일이라면 함께 나누는 것이 옳은 일이지, 질투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모세는, 모든 백성이 다 하나님의 영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①우리는 지금, 좋은 일을 하자고 할 때에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불필요한 일에는 아주 적극적입니다. 결혼식에도 참석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보다는 덜 소중한 일입니다. 직분 맡을 정도라면, 그 정도는 알고 있을 것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니던 열성을 가지고 나라 일에 신경을 썼으면, 성군(聖君)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영원한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사는 우리가, 썩어질 땅의 일에 신경 쓰는 것의 반만 마음을 기울여도, 우리의 믿음은 쑥쑥 자랄 것입니다.
②이처럼 경건 생활에 소홀하게 되면, 자연히 악영이 우리 속에서 역사 하게 마련입니다.
ㄱ.내 영혼이 원치 않는 시기와 질투를 하게 되고, 내 입에서는 불평과 원망 소리가 크게 나올 것입니다.
ㄴ.뿐만 아니라, 서로 의심하고 미워하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기도 생활을 열심히 해도, 내 마음속에서는 시기와 미움이 꿈틀거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과 기도를 멀리하게 될 경우, 우리의 영적 생활은 한없이 후퇴할 것이 뻔한 일입니다.
아무튼 좋은 일을 자꾸 도모하고 기도하면서 살게 되면, 모든 일이 은혜스럽게 느껴지고 감사할 일이 많아집니다. 하지만, 믿음 생활에 소홀히 하게 되면, 남을 자꾸 의심하게 되고 미워하며 원망을 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세상일에 치우치면 악한 영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게 되어
③구원과는 먼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한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다움을 이루며 사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을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성도라면, 악령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도록 그대로 내버려두어서는 안 될 줄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악령의 지배를 받는 생활은
ㄱ.서로 용서하지 못하는 까닭에,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성령이 함께 하는 증거가 용서라고 한다면, 악령이 지배하는 마음에는 미움과 원망, 그리고 불평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평안이 그 마음에 깃들 수가 없습니다.
ㄴ.그리고 악령의 지배를 받게 되면, 여전히 헛된 것만 구할 뿐, 참으로 가치 있는 일과 좋은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런 기회가 주어져도 별로 마음내켜 하지 않습니다. 진정 인간다운 삶을 살려면 가치 있는 일을 도모해야 하는데, 악령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 즐거움과 쾌락 쪽으로만 눈길이 가게끔 유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십니다. 우리가 사탄의 꾀임에 잘 넘어가는 어리석은 존재라는 것도 물론 아십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냐, 세상이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을 때에, 그들은 예수가 아닌 세상을 택했습니다.
스승인 예수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은 배은망덕(背恩忘德)한 몹쓸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평안을 선포하셨습니다. 그것은 ‘너희들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니, 마음 놓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또한,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정말 형편없는 생활일 것입니다. 복이 되는 일에는 거의 관심이 없고, 죄가 되며 불행하게 되는 쪽으로만 자꾸 마음을 기울이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 다시 주 앞에 모여 기도하면서 말씀을 듣는 저와 여러분에게, 다음과 같은 복된 말씀을 선포하시고 있습니다.

2.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구원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을 부르며 간구하는 자에
①평안을 선포하십니다.
물 속에 빠진 이가 살아날 길은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살려 달라!’고 소리치는 일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실 만한 능력이 있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는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원치 않는 일을 행함으로써, 아니면 책임을 다하지 못한 죄책감으로,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주저할 것 없습니다. 진정으로 마음의 평안을 원하시면, 하나님께 나아 와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평안함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②성령을 충만히 주십니다.
악령에 사로잡히면, 아무리 바르게 살려고 해도 어렵습니다. 악령은 세상 욕심을 많이 가진 자에게 접근하여 유혹합니다. 이 악령을 멀리하려면,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도와주십니다.
그러나 성령은, 충만히 받아야 더욱 값진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주님의 일을 하고자 하는 열의가 생기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용기도 생기는 법입니다.
③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죄와 사망을 향하여 달려가던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고, 바르게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를 하게 되면, 우선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자유함과 평안함을 누리게 하십니다. 그리고 더욱 열심히 믿음 생활을 하게 될 때에, 성령 충만함을 허락하시고 주의 일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믿음이, 이 단계까지 도달할 수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이란,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그냥 있으면 좋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직장이나 들에 나가서 일하는 모든 수고를 헛되지 않게끔 하는, 귀하고 값진 것입니다. 이 믿음이 온전해져야, 그만큼 우리 인간 삶의 질은 향상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집을 짓는데 있어서 기초와 같습니다. 믿음이 튼튼해야, 일하는 목적을 분명히 할 수 있거니와, 그 일의 수고가 헛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을 성실하게 하려면,

3.하나님의 영을 가득하게 받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의 말씀을 보면, 성도들이 한 자리에 모여 열심히 기도하고 있을 때에, 방안에는 강한 바람이 부는 소리가 났고, 각 사람 위에는 불길이 나타나 머물렀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이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요엘서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너희 모두에게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그 날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것이다(행2:17-21).」
결국 성령을 받는 목적은, 구원을 이루기 위한 일입니다. 성령 받은 증거는 뭐라고 했습니까 용서하고 사랑할 줄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평안과 기쁨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평안함과 기쁨을 얻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은,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가운데, 평안과 기쁨의 생활을 하고자 함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①하나 되어 열심히 기도하면서,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ㄱ.세상의 악한 일은 멀리하고 거룩한 일을 도모하기 위해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의 악한 일을 멀리하기 위해, 스님들처럼 산 속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 악한 세력과 싸워 이겨내야 합니다. 물론, 그러한 일에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게 마련입니다. 좋은 일에는 성령님이 오셔서 도와주시게 되어 있습니다. 좀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자꾸 일으켜야 합니다.
ㄴ.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면, 주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습니다. 세상일에만 신경을 쓸 때에는 짜증나는 일뿐이었는데, 하나님의 일, 곧 자신의 양심이 원하는 일을 자꾸만 하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비로소 알게 됩니다.
②서로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ㄱ.성령 받은 증거는 용서하고 사랑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억지로 하는 용서가 아닙니다.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을 깨닫게 되면 성령이 충만하게 되고, 성령 충만하게 되면 자연히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사랑할 수 있는 용기도 생기는 법입니다.
ㄴ.그 결과는 평안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평안함을 빌어 줄 수 있는 단계까지 발전하게 됩니다. 그야말로, 거룩한 성도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워 떨고 있을 때에, 주님이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마음을 평안히 가지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을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과 함께, 서로 용서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 욕심 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가득하게 되는 것이 성령 충만이요, 그렇게 되면 용서 못할 일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마음에는, 평안과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길이요, 구원의 길입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은, 죽는 그 날까지, 세상의 욕심을 멀리하고 주님의 마음을 닮아 가기를 힘씀으로써, 하늘나라 들어가기에 부족함이 없는, 거룩한 성도가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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