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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창 25:19-34, 롬 08:1-11, 마 13:1-9, 18-23)

첨부 1


두 주간 동안의 세미나 기간 중에, 저는 연세 대학 안에 있는 기숙사에서 생활했습니다.
한 방 안에는, 네 분의 목회자가 함께 있었습니다. 제가 있는 방에는, 전주와 진해에서 오신 목사님, 그리고 제천에 계신 목사님이 함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를 포함한 네 분의 목회자가, 모든 면에서 아주 달랐습니다. 우선 몸매를 볼 것 같으면, 어느 분은 기껏 70Kg가 될까 말까 한데, 어느 한 분은 100Kg가 훨씬 넘는 거구였습니다. 어느 분은 거의 말씀이 없다시피 하고, 어느 목사님은 계속 화젯거리를 만들어 말씀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분은 짐 정리를 항상 깔끔하게 해 놓는가 하면, 어느 목사님은 옷이나 잠자리를 자연 그대로 팽개쳐 놓았습니다.
그리고 생활 방식도 제가끔 달랐습니다. 두 주간 내내, 어느 목사님은 틈만 나면 책을 읽고 있었으며, 어떤 목사님은 회갑을 넘기신 나이에 영어 회화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목회자는 컴퓨터로 설교 준비와 주보 작성을 꾸준히 하고 있었습니다. 말씀 나누기를 좋아하는 어느 목사님은, 우리 방에서 대화할 상대자가 없게 되자, 다른 방을 부지런히 찾아다녔습니다.
네 사람의 교역자가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하고, 저는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며 지내게 되었습니다. 아마 더 많은 사람이 함께 있었어도,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났으리라 생각합니다. 혹 비슷한 사람도 더러 있었겠지만, 그 다양성은 구구 각색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똑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니, 그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아무튼 사람들은 각기 주어진 성격과 사고 방식에 따라 살아가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가는 모습이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 추구하는 바 목적도 제 각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삶의 방향은 두 가지뿐입니다. 생명과 복이 되는 길을 가느냐, 아니면 재앙과 멸망의 길을 가느냐 사람은 이 두 길 중에서 한 길을 가야만 합니다. 그러니까, 그 생각하는 것이나 삶의 방식은 아주 다양하지만, 그 삶의 방향은 이 두 길뿐입니다.
물론 누구든지 재앙과 멸망의 길이 아닌, 생명과 복이 되는 길로 가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길이 아닌, 죽음과 재앙의 길을 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복이 되는 길로 가서 행복하게 살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으나, 그 삶의 방식이 복된 길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6절에 보면 「성령을 따라 살면 생명과 평안을 누리지만,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음에 이르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생명과 평안을 누리고자 하면서도, 생명과 평안의 길로 인도하는 성령을 따라 살지 않고 육신을 따라 살기 때문에, 재앙을 당하고 죽음의 멸망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이란, 자신만을 즐겁게 하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로마서 8장 5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 곧 자신만을 즐겁게 하기 위해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도 없거니와, 지키려 하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도 없고, 지키려 하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말씀 안에서 살아야 복이 된다고 신명기에는 분명히 밝히고 있건만,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면서 말씀을 외면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모순된 일입니까
그런데, 어째서 사람들은 이런 모순된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요 왜, 사람들은 복된 삶을 그토록 간절히 원하면서도, 복이 되는 길로 가지 않고 자꾸만 엉뚱한 길로 가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사람들의 손에다가 복이 되는 말씀을 쥐어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복된 말씀을 내팽개치고 제 멋대로 살아가는 것일까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누구에게나 복된 삶을 살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복된 길을 갈 수 있게끔 모든 은혜를 베풀어 주실 뿐만 아니라, 그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는 성령을 보내 주십니다. 로마서 8장 4절에서 바울은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다 이루어졌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이, 우리 인간이 진실로 복되게 사는 것이라면, 그 뜻은 성령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다른 걱정할 필요 없이,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만 살면, 인간 자신들은 정말 복이 되는 길을 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길을 방해하는 자가 있으니, 바로 인간 자신의 욕심입니다. 사람들은 이 욕심을 이겨내지 못하는 까닭에,

1.참으로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모양이나 삶의 태도는 아주 다양하지만, 그 삶의 길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살던지」, 아니면 「인간 자신만을 즐겁게 하기 위해 살던지」, 두 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여 살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사는 사람’을 ‘예수께 속한 사람’이라 하고, ‘자신만을 즐겁게 하기 위해 사는 사람’을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이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사는 사람은 ‘생명과 평안’을 누리고, 자신만을 즐겁게 하기 위해 사는 사람은 ‘죽음’에 이르게 된다고, 로마서 8장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25장에는, 육신의 욕심을 이겨내지 못하여 ‘실패한 인생을 산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로, 이삭의 아들 ‘에서’입니다.
‘에서’는 야곱과 함께 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배속에서 함께 있다가 거의 동시에 태어났건만, 서로 너무나 대조적인 성격과 성품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형 에서가 사내 대장부다운 성격을 지닌 반면에, 동생 야곱은 여자아이처럼 조용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성격 차이가, 그들의 인생을 가름한 것은 아닙니다.
형 에서는, 사냥이다 뭐다 하면서 밖으로만 나다니다 보니,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배울 기회가 없었고, 동생 야곱은 주로 집에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에게서 그러한 것들을 배울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서는, 그 당시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먹고 말았던 것입니다.
창세기 25장에서는, 에서가 동생에게 ‘장자권’을 팔아먹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장자권이 참으로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소중한 것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에서가 배고픈 나머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먹었듯이,
①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육신의 즐거움과 편안함을 위하여 아주 소중한 하나님의 은혜(생명과 평안)를 저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에서에게 있어서, 장자권이란 아무 소용이 없어 보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무슨 증서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야말로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무슨 큰 명예가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별 것 아닌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에서는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오늘 날, 기독교의 진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저 큰 탈이나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형식적인 믿음을 가지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에서 말하는 생명이 얼마나 중요하고, 주님의 평안이 왜 필요한지, 간절한 마음으로 알아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길바닥과 같은 마음의 소유자, 또는 돌밭과 같은 마음의 소유자라고, 예수님은 마태복음 13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여, 악한 자에게 그 은혜의 말씀을 빼앗기게 됩니다. 또는, 말씀을 깨달아 그 마음에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그 말씀이 생활 속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한 까닭에, 어려움이 닥치면 믿음의 열정은 식어지고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②이와 같이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은, 영적으로 심히 굶주린 상태에 있습니다.
에서는 육신적으로 굶주리게 되자, 장자권을 아무 생각 없이 팥죽 한 그릇에 팔아먹고 말았습니다만, 우리가 영적으로 굶주리게 되면, 신앙까지도 팔아먹을 염려가 참 많습니다.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려도, 잘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뿌리가 깊지 않은 나무는, 작은 비바람에도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나무들은 결코 큰 재목이 될 수 없습니다. 바람에 넘어지게 되면, 물론 열매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런 나무들은 아무 쓸데가 없기 때문에, 톱으로 베거나 뿌리째 뽑아서 불에 태우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렇게 되는 것은, 참으로 큰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ㄱ.그 마음에 생명과 평안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특별난 음식을 배불리 먹어도, 기쁨이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야말로 허무한 인생이요, 고통과 슬픔이 가득한 인생입니다. 배반을 당하고 배신을 하는, 악순환이 거듭될 뿐입니다. 로마서 8장 2절의 말씀을 보면, 「죄와 죽음의 악순환」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ㄴ.나중에는 악한 자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만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대신에 모았던 재물이나 명예를 철저히 다 빼앗기고, 아주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전직 대통령이었던 두 사람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육신의 욕망에 따라, 자신만을 위하여 산 사람들의 결과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손에 꼭 쥐어 주신 보물을 내팽개치고, 세상 욕심 따라 살게 되면, 우리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흔들리지 않고 튼튼합니까 어떤 환난이나 박해가 있어도 넘어질 염려가 없는지요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깨닫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 사람입니다. 이와 같이

2.주의 말씀을 잘 받아들여 열매 맺는 삶을 살게 될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과 평안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생명과 평안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그 사실부터 잘 알아야 합니다. 그냥 막연히 예수 믿으면 받게 되는 것, 이 정도만 알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를 믿고 말씀의 열매를 맺기까지의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잘 듣고 마음에 단단히 새겨 두시기를 바랍니다.
①예수 믿으면, 다시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로마서 8장 1절 말씀을 보면, 「이제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죄받는 일이 결코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죄가 없게 되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은 만물이 살아 움직이게끔 하는 원동력이자, 인간에게 있어서는 삶의 근원이 됩니다. 물론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생명이신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 곧 죽음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제 예수를 믿게 되면, 그 생명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죽음이 없게 됩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놀라운 소식입니까 이 진리가 얼마나 놀라운 소식인지를 알려면, 말씀의 참 뜻을 깨닫고 그대로 살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②이 생명을 계속 유지하려면, 성령 따라 살아야 합니다.
비록 생명을 얻었다 할지라도, 우리가 악령을 따라가게 되면, 그 순간 우리는 생명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생명은 성령 안에서만 보장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9절부터 보게 되면, 「우리가 성령 따라 살고, 그래서 성령이 우리 속에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죽은 후에도 다시 살리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③그런고로 우리가 성령 따라 살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ㄱ.생명과 평안의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고
ㄴ.죽은 후에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분명히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우리 인간의 모습과 삶의 방법은 다양하지만, 그 삶의 방향은 두 길 뿐이라고 했습니다. 곧,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인데, 이 두 가지 중, 우리는 어느 한 길을 선택해야만 합니다. 그 선택은 자유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은 죽음이 아닌, 생명의 길로 가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길이 아닌 죽음의 길로 가는 것은, 육신의 즐거움과 쾌락을 멀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하나님 앞에 나와 있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곧 기독교의 진리를 확실히 붙들지 않으면, 참으로 불행한 길인, 멸망으로 빠지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3.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깊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위대한 사상가 파스칼은 ‘진리는 늘 우리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다만 사람들이 그것에 주의하지 않을 뿐이다’라고 하면서, ‘언제나 진리를 찾아라. 진리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즐기는 동물적인 삶에서 벗어나, 좀더 가치 있는 삶을 살고자 한다면, 진리를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진리는, ‘예수를 믿으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의 말씀을 소홀히 여기지 말고 귀중히 여길 줄 알아야, 진정한 크리스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시지요 혹시 엉터리 신자라는 소리를 듣기 원하는 분이 있습니까 그런 분은 한 분도 없으리라 확신합니다. 그렇다면,
①말씀을 잘 듣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ㄱ.말씀을 잘 듣고 깊이 간직하려면, 옥토와 같은 마음 밭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려 듣기는 하되, 말씀을 인하여 걸려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겸손하면, 무슨 말씀이든지 유익이 되지 않는 말씀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나는 죽을 수밖에 없었던 더러운 죄인이었다.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이런 마음 태도를 가지고 말씀을 듣게 되면, 말씀을 은혜스럽게 받아들일 수가 있을 것입니다.
ㄴ.말씀을 듣고 은혜가 되었으면, 다른 악한 자가 와서 빼앗아 가기 전에,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통한 평안함과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말씀을 들은 후에, 오히려 불만이 더 커지고 의심이 깊어진다면, 자신의 심령 상태를 점검해 봐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자기와 같은 느낌을 갖게 되었다면, 분명 설교자가 잘못 된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데, 자신만이 말씀을 들은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한 번 자기 자신의 심령 상태를 의심해 봐도 괜찮을 듯 싶습니다.
②아무튼 우리는, 받은 바 은혜를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악한 세력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 악한 세력은, 외부에 있을 수도 있고 자기 자신 안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가장 악한 세력은,
ㄱ.우리 자신의 육에 속한 욕심입니다. 야고보서 1장 14절에서 「인간은 자기의 악한 생각이나 욕심에 끌려서 유혹을 당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육신의 욕심을 물리치려면, 기도하는 일과 말씀을 듣고 보는 일을 쉬지 말아야 합니다. 악의 세력에게 이끌려 가다가도, 말씀을 듣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면, 고쳐 살게 되는 것입니다.
ㄴ.하지만, 그 육의 욕심을 멀리하는 일도 중요하나,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욕심을 멀리하고 은혜를 가까이 하게 되지요.
요한복음 1장 16절 말씀을 보면 「우리는 모두 그분에게 넘치는 은혜를 입었으며, 한없는 복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5장 21절 말씀에「과거에는 죄가 모든 사람을 지배하여 죽음을 가져왔지만, 지금은 그와 반대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너무나 분명한 진리 말씀, 생명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졌는데, 이를 소홀히 여기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겨 헐값에 팔아 버린다면, 이보다 더 큰 비극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믿음이 흔들리 않도록, 그래서 어떤 비바람에도 굳건히 서서, 진리 안에서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복된 사람이 되기 위하여, 성령의 지시를 무시하지 맙시다.
아무쪼록, 성령 안에서 참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누릴 수 있도록, 믿음을 굳건히 다져가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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