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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확실한 구원을 향하여 (창 37:1-4, 12-36, 롬 10:5-15, 마 14:22-33)

첨부 1


이번 여름성경학교가 열렸을 때에, 교사들을 데리고 남천계곡에 갔었습니다. 우리보다 앞서서 남천교회 차를 이용하여 먼저 간 교사들이 몇 있었습니다. 우리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에, 그들은 이미 옷을 입은 채로 물 속에 들어갔다 나온 뒤였습니다. 머리에서 운동화까지 완전히 물로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번에 온 학생들 중에서 왈가닥에 속하는 편이어서, 짓궂은 데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학생들을 하나씩 물 속에 집어넣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 왈가닥들의 목표가 된 학생은 희생당하지 않으려고 도망 다녔습니다. 하지만 여러 사람이 달려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토록 물 속에 빠뜨림 당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던 학생이 일단 한 번 물 속에 빠지게 되면, 그 다음에는 금방 다른 학생을 물 속에 빠뜨리는 일에 한패가 되더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그리 한 것은, 물론 장난 삼아 한 일인 줄 압니다. 하지만, 그 이면(裏面)에는 인간의 묘한 심리가 작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심리 상태를,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이미 자신의 옷이 젖어 있어서, 다른 사람을 물 속에까지 끌어들이는데 거칠 것이 없어진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나만 당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려는데 있었습니다. 나중에 보니, 물에 빠졌던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구분되어, 따로 행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믿음의 세력과 불신 세력 사이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을 부지런히 교회로 이끌어 들이려고 합니다. 한편 세상 사람들은, 믿음 가진 사람들을 타락시켜서 자기 편 삼으려 부단히 애쓰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믿음 생활을 하던 사람이 타락을 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교회를 비난하면서, 믿는 이들을 세상 속으로 빠뜨리려 애쓰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러니까, 악의 세력은 할 수만 있으면 믿는 이들을 죄악의 길로 이끌어 들이려고,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한 번 죄에 빠지면, 그 죄를 부끄러워하지도 않거니와, 죄 짓는 일에 대담해집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그 죄를 짓게 해서 자기와 같은 동류(同類)가 되게 하려고, 모든 힘을 기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우리가 그토록 빠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던 세상 죄의 물결 속에, 파묻힐 염려가 많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이끌어 들여서 빠져드는 경우보다, 자기 스스로 세상 미끼에 걸려들어 직접 뛰어드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교회에서 말하는 복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것이 많은 반면에, 세상에서 말하고 있는 복은 아주 구체적이면서 금방 손에 쥘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니 세상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마태복음 14장 22절 이하의 말씀에서, 베드로가 바다 위를 걸어가다가 물 속에 빠진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배를 타고 바다 건너편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바다 물결이 사납게 출렁거렸습니다. 그리고 그 사나운 물결이, 제자들이 탄 배를 흔들어 대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새벽 네 시쯤 되었을 때에, 바다 위에 유령이 나타났습니다. 가뜩이나 두려워 떨고 있던 차에 유령까지 나타났으니,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그 때 그 자리에 영춘교회 사모님이 타고 있었더라면, 분명히 기절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겁에 질려서 소리쳤습니다. 어떻게 소리쳤는지, 그 내용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마 ‘우리는 영락없이 죽게 되었구나!’라고 소리쳤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유령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유령으로 잘못 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다.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제자들을 안심시켰습니다.
이 때 베드로가 나섰습니다. “주여, 정말 주님이십니까 그렇다면, 저더러 물위로 걸어오라고 하십시오.” 예수님이 걸어오라고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예수를 향해 물위를 걸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계속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출렁이는 바다 물결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물결이 높이 이는 것을 보고 무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1.우리는 믿음이 부족해서 물에 빠지는 일이 많습니다

바다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세상을 우리가 멀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세상에 깊이 빠져들지 않고 살아가려면, 주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를 바라보지 않고 세상을 보게 되면, 그만 그 세상을 두려워한 나머지, 주님을 버리고 세상 길로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자유롭게 사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자유스럽게 바다 물결을 거슬러 가려면 힘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의 힘은 세상 파도를 이겨낼 만큼 강력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세상 물결치는 대로 휩쓸려 살게 되는 것입니다.
①예수가 아닌 세상 중심으로 살게 되면
ㄱ.편애하고 차별합니다. 예수 믿는 자들이 ‘누구든지 다 차별하지 않고 한 형제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산다면, 세상 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여 자기들만의 이익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그 집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을 멀리하고 차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만을 가까이하고 사랑합니다.
야곱이 요셉을 특별히 사랑한 것은, 그가 아끼는 라헬의 자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입으로는 열두 아들을 모두 사랑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요셉을 편애했습니다. 이것이 형제간의 다툼을 불러들이는 요인이 되었고, 끝내는 형제들이 요셉을 종으로 팔아먹게 한 것이었습니다.
ㄴ.자신의 잘못을 깨닫기보다는, 서로 상대방 허물을 지적하기에 바쁩니다. 크리스챤들이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며 고쳐 살기를 노력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모든 책임을 타인에게 돌리면서 그 허물을 지적하고 탓합니다.
예수 중심의 삶은, ‘타인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면서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짐으로써 풍성한 삶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세상 중심의 삶은, 타인의 이익보다는 내 이익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 것을 많이 만들어야, 행복이 이루어진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②다툼과 갈등으로 인한 불편한 인간 관계만 남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물 속에 빠뜨린다고 해서 내게 도움이 되는 것도 없건만, 나만 물에 빠진 채로 있을 수 없다는, 이상한 심리가 작용해서, 다른 사람을 물 속에 빠뜨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어찌 나의 이익이 아닌, 타인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기가 그리 쉽겠습니까
그만큼, 기독교의 진리가 내게 가까이 있는 듯 하면서도, 실천에 옮기기에는 너무 멀어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진리가 옳다는 것은 인정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다가도, 그만 포기하고 세상 물결치는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ㄱ.서로 의심하고 미워합니다. 언제든지 저 사람이 나를 물속에 빠뜨리겠지 하고, 서로 의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계의 눈초리를 풀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조금이라도 손해를 입혔다 싶으면, 그를 미워하며 복수의 칼날을 갈면서 기회를 노립니다.
ㄴ.그렇게 되면, 그 마음이 평온할 리가 없습니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어납니다. 인간 관계가 복잡해지고 거칠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아껴 주고 따뜻한 사랑을 베풀며 살아야 사람 사는 맛이 있는데, 서로 의심하고 미워하는 사람뿐이면 그 인생이 얼마나 어둡고 답답할까요
풍랑 이는 바다에서 배를 타고 가던 제자들이,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던 그 모습 그대로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유령인 줄로 착각했듯이, 미움이 그 마음에 가득하면 진리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신도 원치 않는 엉뚱한 짓을 행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떤 형편에 놓여 있습니까 주님과 함께 평화의 바다에서 즐겁게 찬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거센 풍랑이 일며 어둡고 깜깜한 죄의 바다에서 하루하루 불안한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요셉 형들은 늘 그 마음에 요셉에 대한 미움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동생을 죽이는 살인까지 저지르게 됩니다. 나중에는 요셉을 우물에서 건져냅니다만, 그 마음은 이미 수없이 많은 살인죄를 저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참으로 구원받아야 할 심령이 바로 우리 자신이 아닐까요 서로 상대방을 보이지 않는 칼로 찌르고 있으면서도, 내 아픈 것만 생각하지 상대방이 아프다는 사실은 잊고 사는, 지독한 인간이 바로 나 자신이 아니던가요
우리는 이 죄의 바다에서 구출 받아야 합니다. 더 이상 지체하다가는 비참한 죽음을 당합니다. 우물쭈물하다가는 자전거에 다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뽑아 든 칼에 죽습니다. 이제 용단을 내리십시오. 주께서 손 내미실 때에, 어서 속히 구원을 요청하십시오. 그러면,

2.주께서 물에 빠진 자를 건져 주십니다

「너 어서 생명줄 던지어라. 저 형제 지쳐서 허덕인다. 시험과 근심의 거센 풍파 저 형제를 휩쓸어 몰아간다.」(찬송가 258장 3절)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기독교 진리만이 참으로 우리의 구원선(救援船)입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십자가가 그 근본입니다.
이제 그 십자가를 지신
①예수를 우리의 주님으로 모시게 되면
ㄱ.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 마음에 아직도 내 생각이나 내 이익이 주인으로 자리잡고 있다면, 그는 아직 구원함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며 찬양하는 것은, 주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살면 복이 되리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 선생은 「믿음을 통해 얻는 구원은 먼데 있지 않고 우리의 마음과 입에 있다(롬10:8)」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마음에
결심하기를, ‘주님이 지시하는 대로 따라가겠습니다’라는 다짐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입으로도, 주님의 말씀이 진리이며 그렇게 살아야 복이 된다고 하는 것을, 늘 증언해야 합니다.
ㄴ.그러면, 바람도 잔잔케 하시고 죽음도 이기신 주님께서, 우리 마음 중심을 바로 잡아 주실 것입니다. 세상이 아닌 주님을 바라보고 살도록 말입니다. 그러면,
②하나님은 우리와 좋은 관계를 갖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이루어 살게 된다면, 정말 아무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항상 내가 하나님보다 앞서가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지, 주의 말씀을 행하며 겸손히 기다린다면, 무슨 문제가 발생하겠습니까 바람도 잔잔케 하신 능력의 주님이신데 말입니다.
여호와가 나의 하나님이시며 예수가 나의 주님이시라는 것을, 자꾸 마음과 입으로 고백하면서 그 말씀을 늘 가까이하게 되면,
ㄱ.우리의 삶을 풍성케 해 주십니다. 누구든지 그 생활에는 굴곡이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주께서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만 있다면,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잘 극복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0장 12절에서 바울은 「주께서는 당신께 구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풍성한 복을 아낌없이 주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ㄴ.평안함을 허락하십니다. 풍랑이 심하게 일 때에, 제자들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이 때에 주님이 가까이 오셔서,「무서워하지 말라」고 안심시켰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에 바람을 잔잔케 하심으로써,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을 더욱 안심하게 했습니다.
주가 계시면 평안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가 우리 마음에 계시면, 마음이 평안합니다. 주께서 교회의 주인이 되시면 교회가 평화롭습니다. 가정에 주님을 모시고 살면, 가정이 평화를 누립니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든지 내가 주인이 되고자 하면, 그 순간에 풍랑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예수는 나의 주님이십니다’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그 예수가 부활하신 사실을 마음으로 굳게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그리고 이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입으로 고백하게 될 때에 확실한 구원을 얻게 된다고, 바울은 로마서 10장 10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은 이 고백을 주저 없이 함으로써

3.확실한 구원을 얻어 풍성한 삶을 누리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어저께 저녁나절입니다. 목양실에서 주보를 작성하고 있는데, 발자국 소리가 들렸습니다. 처음에는, 청년들을 데리고 와 있던 검단의 최목사인 줄로 알고, 농담 삼아 “거 누구요”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나요”하고 응답했습니다. 저는 “그러면 2층으로 올라오시지요”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또 다시 “이층을 어떻게 올라가는지 알아야 올라가지요”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싶어서, 창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23년만에 만나게 되는 옛 친구였습니다. 천안 경찰서 정보과에 근무하고 있는데, 그 부인과 아들이 함께 동행을 해서, 이 먼 곳까지 찾아온 것입니다.
그는, 저의 고교 때 절친한 친구 세 사람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심하게도 23년 동안이나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오래 전 천안에서 스쳐 지나듯 잠깐 만난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가족과 함께 이곳에서 만나게 되니, 그 반가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반가운 사실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글세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있다지 않습니까 이제까지 들은 바로는, 부인에게 이끌려 억지로 다닌다는 소식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알고 보니, 아주 열심히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믿음이 제대로 서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사실 그 사람은, 세 친구 중 유독 그만이 믿음 생활하기를 거부하던, 가장 완고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두 친구는, 저의 권고로 교회를 다녔고 학습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마이동풍(馬耳東風)이었습니다. 그만큼 그는 세상적이었습니다. 그의 성격이 그러했습니다.
그 친구가 이곳에서 떠날 때에, 부인과 잠깐 대화를 나눌 틈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부인에게 거듭 고맙다는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부인에게 “저 친구, 정말 세상적으로 흐를 염려가 참 많은 사람인데,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달라질 수 있었을까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부인께서 “그럼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세상 속으로 아주 깊이 빠졌던 적이 있었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친구 부인이 지금은 쉽게 대답을 하고 있지만, 부인은 친구가 돌아오기를 10년 동안이나 기도하면서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동안 겪었을 그 마음 고생이란 어떠했겠습니까
이제 그는, 다니는 교회에서 재무부장직까지 맡을 정도로 그 믿음이 자랐고, 그 교회 재정 문제로 인하여 기도하려고 휴가 기간 기도원에 다녀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하는 것으로 보아, 담임 목사를 아주 대단히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친구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①우리는 세상을 멀리하고 주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이루는 첩경입니다.
②그리고 형제의 허물을 지적하는 일보다는, 평화의 소식을 열심히 전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또한 이웃과 좋은 관계를 이루는 지름길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③예수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그분의 뒤를 따르는 것만이 참으로 복된 일이라는 것을, 생활을 통하여 경험하면서 찬양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주의 은혜가 넘치는 믿음 생활을 하시면서, 확실한 구원을 향하여 더욱 열심을 내시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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