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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상에 더 머물러 있을 필요가 있다 (출 16:2-15, 빌 01:21-30, 마 20:1-16)

첨부 1


이발을 하면 훨씬 달라져보인다는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지난 주 목요일에 이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발을 마친 후에 이발료를 지불하려고 하니, 함집사가 손을 내저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목사님들에게서 이발료를 받지 않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자수성가(自手成家)한 사람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함집사도 돈을 마다할 사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제가 이곳에 와서 거의 영춘이발관을 이용했지만, 한 번도 돈을 받지 않거나 깎아 준 적이 없습니다. 물론 제가 그것을 바란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예 받지 않겠다고 하니, 마음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생각건대, 새로 오신 전도사님이 함집사에게 권면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렇게 짐작되는 것은, 5년이 넘도록 이발료를 꼬박 꼬박 받아 오다가, 이제 새로운 전도사님이 오시면서 받지 않겠다고 하니, 하는 말입니다.
아무튼 감사한 일입니다. 돈을 안 들이고 이발을 할 수 있게 되어서, 감사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교인이 담임자의 말에 순종하는 모습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적잖은 손해를 감수하면서 담임자의 말에 순종하는, 함집사의 신앙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함집사로 하여금 그런 결단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 전도사님의 지도력이 놀랍습니다.
교인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 교회 담임 목사입니다. 말썽꾸러기 자식일지라도 그 부모는 지극히 사랑하듯이, 담임 목사는 어느 교인을 막론하고 사랑하고 아낍니다. 그래서, 교인이 잘되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바르게 살도록 권면도 하며 좋은 길로 안내도 합니다. 이 때에, 교인이 순종하면 참 좋은 일이 됩니다.
물론 목사라고 해서,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목사가 모든 것을 다 잘 알아서 틀림없이 지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지도하는 것이라면, 열의 여덟 정도는 좋은 결과를 가져오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또한, 꼭 무슨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이전에, 성도를 사랑하는 목사가 교인을 복된 길로 인도하려 애쓰고, 성도는 목사의 그런 마음을 읽고 신뢰하면서 순종한다면, 그것 자체로써 아름다운 일이 아닐까요
저는 그런 목사가 되지 못합니다. 아직 부족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실수도 많고 허물도 많습니다. 교인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할지, 스스로 자신의 목회 능력에 대해서 의심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영적 지도자가 되기에는 너무나 많은 결함을 갖고 있기에, 나 자신이 심히 부끄럽습니다.
오늘 살펴보려고 하는 모세와 바울은 참으로 훌륭한 지도자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백만이 넘는 큰 무리를 이끌고, 사막을 건너서 가나안으로 향하던 모세의 고충이 어떠했겠는지요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능력을 주시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으리라 여겨집니다. 물론 모세가 지도자로 나서기 전 80년 동안, 미디안에서 갈고 닦은 그의 인격이 큰 뒷받침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서는, 그 지도력이 시험받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먹을 걸 내놓으라고 대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그토록 고생하던 일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왜 애굽에서 우리를 이끌어 냈느냐’고 하면서, 모세에게 불평을 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 문제를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해결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메추라기와 만나를 내려 주심으로써, 그들의 삶 한 가운데에 주가 함께 계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말하기를, 지도자인 자기에게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누구냐 너희가 우리에게 불평을 늘어놓는 것은, 여호와께 불평을 늘어놓는 것이나 마찬가지다(출16:8)』
결국 모세의 지도력은,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권능을 가지고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세의 인격과 통솔력에다가, 하나님의 강제적인 힘이 작용함으로써,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지도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메추라기와 만나를 제공하심으로써, 모세의 권위를 세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고라가 반역했을 때에는, 땅이 입을 벌려 고라의 무리를 삼키게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불평을 하며 대들게 되면, 그것이 곧 하나님께 반항한 것이 되어, 죽음을 초래한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한편 바울도, 그 지도력이 여러 번 방해를 받았습니다. 바울이 과연 사도인가 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문장력으로, 그들의 잘못된 논리를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그뿐 아닙니다. 오늘의 말씀인 빌립보서를 보면, 바울은 정말로 뜨거운 사랑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감옥에 갇혀 있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비참한 상황에 놓여 있었건만, 빌립보에 있는 성도들의 신앙 성장을 위하여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세상을 떠나 예수 곁으로 가는 것이 소원(빌1:23)」이라고 하면서도, 「성도들의 믿음이 자라고, 또 그 믿음 안에서 더욱 큰 기쁨을 누리도록 도와야 한다(빌1:25)」고 하면서, 세상에 더 머물러 있을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그리고 얼마나 숭고한 믿음입니까 바울의 이 사랑과 믿음이, 오늘의 기독교가 있게 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는, 사는 것도 주를 일할 기회로 삼고, 죽는 것도 주를 위해 일하는 기회로 삼겠다고, 빌립보서 1장 21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이처럼 모세나 바울같이 훌륭한 지도자는 아닐지라도, 오늘날에도 주님께서 세우신 영적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지도자가 훌륭해도, 뒤에서 밀어 주고 따라 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 지도자는 제 능력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뒤에서 따라가는 사람들이 갖춰야 할 태도를,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①내가 죽더라도, 여러분은 기독교인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라(빌1:27)
②복음을 전하는 한 가지 목표를 위하여, 굳게 연합하라(27).
③박해를 두려워 말고 용기 있게 전하라.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과연 바울이 말한 대로 기독교인답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마음이 하나 되어 있습니까

1.우리는 지금 자기 할 몫을 다하지 못하면서, 존중만 받으려 하고 있습니다

존중하는 사람이 있어야, 존중받는 사람도 있게 마련입니다. 물론 존중받을 수 있도록 살아야, 존중을 받게 되겠지요. 그런데, 다른 사람을 존중하거나 인정해 주려는 생각은 없이, 누가 나를 존중하고 인정해 주기를 바란다면, 그것처럼 모순된 일이 또 어디 있을까요
특히 우리는 기독교인입니다.
①기독교인답게 살지 못하면, 그 누구로부터도 존중과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ㄱ.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아 살고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고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물론 그 능력과 재능까지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기회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ㄴ.지도자는 지도자 나름대로, 회중은 회중 나름대로, 그 본분을 망각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교회와 사회에 대하여 불만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오늘의 말씀을 거울삼기 바랍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 대하여 불만을 갖고 있다면, 나는 과연 얼마나 존중받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존중받는 생활을 하고 있는지, 우리 모두, 스스로를 돌아봐야 합니다.
②우리는 지금 영적 전쟁에서 하나 되어 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군사는 많은데, 훈련되어 있지 않은오합지졸(烏合之卒)입니다. 그리고 훈련을 잘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그 실력을 인정해 달라고 생떼를 쓰고 있습니다.
ㄱ.서로 존중하거나 아끼는 모습을 보기가 힘듭니다.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안다면 상대방의 실수도 용서할 줄 알아야 하는데, 자기는 전혀 실수나 잘못이 없는 사람처럼, 다른 사람을 매도하거나 비난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정말 진실로 잘못된 일입니다.
ㄴ.그러나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불투명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하늘나라에 간다는 것을 확실히 믿어야 하는데, 이 세상 재미에 빠진 나머지, 그 소망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를 위해서 열심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③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우리 생활 중심에 모셔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ㄱ.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ㄴ.그리고는, ‘왜, 나를 부르셨느냐’고 강짜를 부리고 있습니다. ‘세상에 있으면 더 많은 재미를 보며 살다가 죽을텐데, 왜 나를 부르셔서 이 고생을 하게 하느냐’고 하면서 불평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한심하고 딱한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안 믿었으면, 영원한 사망과 함께 말할 수 없는 불행을 겪게 되었을 텐데, 예수 믿게 된 복이 무엇인지를 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모세와 같이 훌륭한 지도자가 다시 나타나도, 마찬가지로 불만과 불평을 털어놓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사랑을 잊어버리게 되면, 그 순간 우리는 죽습니다. 삶의 능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성도의 본분을 망각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자신은 물론이요, 그 가족과 이웃의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해로운 존재가 됩니다. 이 세상에 더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더 머물러 있을 필요가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2.진실로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가 많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에, 오늘의 나와 우리는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비하심을 거두시게 되면, 우리는 지금이라도 당장 그 죗값으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식이 부모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어야 효도하게 되듯이,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만 여호와를 제대로 공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며 사는 것, 이것이 우리 인간의 존재 이유입니다. 또한 살아야 할 이유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①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많은 곡식 중에서 종자를 골라내듯이, 세상 많은 사람들 중에서 우리를 특별히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고 아끼기 때문에, 불러내신 것입니다.
②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일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 인고로 귀중한 일이기도 하거니와, 또한 그 일 자체가 귀중한 일입니다.
품삯은 주께서 정하셨습니다. 내가 요구하는 대로 주시지 않습니다. 주께서 주시면 고맙게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품삯은, 그 가치 기준이 액수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습니다. 주께서 맡겨 주신 일을 진실로 고마워하면서 감당하게 될 때에, 그 순간에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③하나님은, 사람들이 어떤 환경에 있던지 주의 일을 열심히 감당할 때에, 영생을 깨닫게 하시고 하늘의 기쁨도 누리게 해 주십니다.
함집사는 목사님들로부터 이발료를 받을 때보다, 몇 갑절의 상급을 받고 있습니다. 목회자들께 봉사하고 있다는 긍지와 기쁨을, 그는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기쁨을, 돈을 주고 살 수가 있겠습니까
바울은 빌립보서 1장 29절에서 「그리스도를 믿을 특권과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을 특권까지 받았다」고 했습니다. 정말 주를 위하여 고난받는 것까지도 특권이라고 생각하게 될 때에, 하늘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쁨을 아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가 되어야, 하나님의 교회는 복음을 전파하는 진정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기쁨과 이 사명감이 있어야, 우리는 서로 존중할 수가 있고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감옥에서의 생활이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에, 주님 곁으로 가는 것이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도들의 믿음이 자라고, 그 믿음 안에서 더욱 큰 기쁨을 누리도록 도와주기 위하여, 이 세상에 더 머물러 있을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더 머물러 있을 필요가 있단 말입니까

3.겸손히 자기 직분에 충실하는 일입니다

어느 누구로부터 존중을 받고자 해서, 우리가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명예나 재물을 얻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어리석은 생각은 이미 오래 전에 버렸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유는, 바울이 빌립보서 1장 27절에서 밝혔듯이「복음을 전하는 한 가지 목표를 위해서」살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입으로만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기독교인답게 사는 일이 중요합니다. 기독교인답게 산다는 게 무엇을 말하는지, 삶의 준비와 태도, 그리고 삶의 목표로 나누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①삶의 준비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늘 잊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구원보다 더 중요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마16:26)』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구원하신 일은,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것입니다.
ㄱ.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좋은 일을 맡기셨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를 닮아 가면서 사랑을 실천하는 일, 그리고 복음을 널리 전하는 일을 열심히 감당하되, 그 일을 맡기신 주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ㄴ.그러나 우리는 무슨 일을 하던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복을 받고 존중받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생활 중심에는 하나님만이 계셔야 합니다. 그분만이 존중받도록 우리는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②그 다음 삶의 태도에 있어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존중해야 합니다.
ㄱ.지도자는 회중을 진심으로 아끼고 돌보아야 합니다. 회중이 지도자를 존중하고 안하고는, 그들의 자유요, 또한 그 신앙 수준과 인격에 달려 있습니다.
반대급부(反對給付)를 생각하고 회중을 이끌어 가려 하다가는, 참으로 피곤하고 힘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닐 것입니다. 지도자는, 회중이 아닌, 하나님을 바라보고 일해야 합니다.
ㄴ.회중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중은 생업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영적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회중은 따로 성경을 깊이 연구할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때문에, 성경에 대해서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의 지도를 받아야만, 하나님 말씀 따라 인생을 지혜롭게 살 수 있습니다.
③끝으로, 기독교인답게 살기 위한 삶의 목표입니다. 그것은 말할 것 없이,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ㄱ.저 세상에 대한 소망을 굳건히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삶의 목표는 하늘나라입니다. 이 세상은 어디까지나 잠시 머물다가 떠나게 될 여관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겠다는 생각을 가진, 미련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저 세상에 갈 준비를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ㄴ.용기 있게 살아야 합니다. 삶의 목표가 분명한데, 왜 주저하고 머뭇거리겠습니까 목표를 향하여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우물쭈물하다가 큰 코 다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ㄷ.하나 되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지도자의 명령이 떨어지면, 그 즉시로 따를 수 있을 때에, 그 교회는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살아야 나도 살고, 내가 살아야 교회도 살게 됩니다. 물론 교회의 생명이란, 말씀 중심으로 열심히 사는 성도들을 말합니다.
아무쪼록, 세상에 더 머물러 있을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 다 되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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