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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책임 (요일 0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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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비애의 시초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반항에 있다고 보지만 이차적인 회복의 좋은 기회를 아담과 하와가 놓쳐 버렸음을 주목해 보게 됩니다.
『왜 선악과를 따먹었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에 아담은 그 죄를 하와에게 돌렸고, 한 걸음 더 나가 『하나님이 주신 그 여자가 그 실과를 내게 주므로 먹었다』고 변명하므로 결국은 하나님의 실책으로 인정하고 싶다는 속마음을 말하고 말았습니다.
하와는 동일한 질문에 대하여 그 책임을 뱀에게 전가시켰던 것이었습니다.
저들이 누가 권했건 『제가 잘못했습니다』하고 자기의 잘못을 솔직히 토로했었더라면 하나님은 긍휼과 용서를 저들을 위해 아끼지 않았을 것이요, 인류의 역사는 한층 더 정결하고도 복되게 엮어졌을 것입니다.
우리 조상의 변명과 책임전가는 인류의 고질적인 병이라 아니할 수 없고, 현대에도 그 근성은 사회부패의 원인으로 만연되고 있습니다.
인생은 누구든지 자기가 한 일과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는 책임의 주체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현대 윤리학에서는 인간을 『책임적인 존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인간일수록 자기 죄에 대하여 예민하고 책임관념이 왕성하여 결국은 양심이 맑은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소인일수록 자기의 죄를 은폐하고, 자기의 과오를 변명하고, 불평과 불만을 털어놓는 것입니다.
다윗의 아들인 압살롬이 자기 아버지를 반역하고 일어났을 때 그 수가 훨씬 우세하였습니다. 다윗은 아들에게 쫓기에 그 부하들과 함께 도망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윗이 베후림을 지나 피해갈 때 시므이라는 자가 나와 다윗을 저주하였습니다. 『이 비루한 자여. 피를 많이 흘린 자여. 저주를 받으라』고 하며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이때 다윗의 부하 아비새가 다윗에게 『저 죽은 개와 같은 자가 어찌 왕을 저주하는 것을 그냥 둘 수 있습니까? 제가 당장에 가서 저자의 목을 베어 가지고 오겠습니다』하고 요청했을 때 다윗은 『그냥 내버려두어라. 지금 내 몸에서 태어난 내 아들도 나를 해하려고 하는 판인데, 저 베냐민 사람이 나를 저주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하나님이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고 시켜서 하는 것이니 내버려두어라』라고 하였습니다.
명령 한마디면 쓰러져 죽임을 당할 죽은 개와 같은 자에게 갖은 모욕을 다 당하면서도 하나님 앞에 자기 잘못을 찾는 다윗의 위대성을 여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최초의 아담은 자기의 죄까지 남에게 둘러 씌웠지만 제이의 아담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 인류의 죄를 자기 책임으로 인정하시고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는 죄인이 죄를 씻기 위하여 받는 예식입니다.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 같으신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죄를 지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으며,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여기에 세계가 저를 추앙하고 숭배하는 이유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6.25사변을 어떻게 볼 것입니까? 물론 북한 공산당의 불법 침입이 그와 같은 비극을 초래했다고 주장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하나의 원인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잘못입니다. 이것을 등한히 하다가는 더 큰 화근이 될 것입니다.
해방의 은혜를 받은 이 민족이 저지른 수라장은 형언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해방 직후 서울의 거리는 곳곳마다 술집과 까페요, 시장과 상가는 사기와 강탈, 그야말로 눈감으면 코베어가는 세상이었으며, 물질만 아는 사람들이 일으키는 난동이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심지어는 교계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많은 불상사들이 일어났습니다. 물론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나 양적인 부흥을 하였으나 파벌 싸움이 치열했던 것입니다. 어느 교단에서는 감독이 취임하는 자리에서 취임에 반대하는 무리들이 배설물을 퍼다가 그 머리에 부은 일도 있습니다.
불행을 당할 때 우리의 잘못, 나의 죄를 깨닫고 반성하고 회개하여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한층 더 나가 타인을 실족케 하고 넘어지게 해서는 안된다는 책임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정치철학가 몬테스큐는 『내가 만일 내 자신에게 유익하나 가족에게 해가되는 무엇을 알았을 때에는 나는 그것을 내 마음에서 몰아내어 버렸다. 내가 만일 내 가족에게는 유익해도 나라를 손해케 하는 일임을 알았을 때 나는 즉시 그것을 잊어버렸다. 내가 만일 내 나라에는 유익할지라도 전 인류에게 치명적이 그 무엇을 알았을 때에는 나는 그것을 범죄로써 간주했다』고 말했습니다. 개인 개인은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고 사회, 국가, 인류라는 보이지 않는 줄로써 매여져 있는 연대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물 한 곳이 터져 있음으로 그물안에 들어 있는 고기 전부를 그곳을 통하여 상실함과도 같고, 릴레이 선수 한사람이 바통을 땅에 떨어뜨리므로 팀전체가 패배하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즉 우리는 나 하나의 사회에 미치는 영향과, 나 하나가 오는 세대에 좋은 것의 전달자로서의 사명이 있다는 것을 책임있게 느껴야 하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師表(사표)가 되는 사도 바울은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즉 적은 문제로써 분명 초식을 주장하는 신도들의 양심을 꺼리끼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고기를 안 먹는 것 정도의 희생은 달게 시행하겠다는 것입니다.
바벨론 나라에서 느브갓네살왕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금으로 신상을 만들어 놓고 절을 할 것을 강요하였습니다. 참 하나님을 신봉하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죽음으로써 그들 앞에 굽히지 않았습니다. 종교심을 갖은 인간들이 참 신을 잃고 석상이나 고목과 같은 곳에 빌기를 잘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그런 의미에서 신앙의 좋은 모본을 보여줬고, 대대로 내려오면서 성경을 보는 자마다 저를 본받아 생명이 있는 신앙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영생의 문제가 되는 신앙은 생명을 거는 것입니다. 아무데나 가서 머리 숙일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자가 상관이 모자를 벗고 절하라고 강요한다고 해서 불상이나 우상에다가 절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주님께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한다』고 하셨으며 『미지근하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상에서 말한 것과 같이 우리는 자기의 잘못과 남에 대하여 책임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신자로서 책임있는 성도가 되려고 하면 먼저 하나님 앞에 진실한 고백으로 출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책망하는 자를 원망하기를 좋아하나 자기 잘못은 인정하기를 싫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들의 수치를 가리우기 시작한 이래, 인간은 자기 죄를 가리우기를 잘하는 습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바래새교인들을 향해 준엄한 책망을 서슴치 않으셨습니다.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 교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그 아름다운 처와 함께 애굽에 우거하려고 내려갈 때, 그 아내의 미모 때문에 자기 생명의 위험을 염려하고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다행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아내를 범하려고 하는 애굽왕에게 큰 재앙을 내려, 저희가 아브라함의 아내임을 알고 돌려보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이런 면이 있다고 할진대는 『회칠한 무덤』이라는 말은 서기관들과 바리새교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들도, 아니 나 자신에게도 해당된다고 봅니다.
요한일서 1:9를 보세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할 것이요』
얼마나 자비로운 말씀입니까? 우리가 할 일은 자백하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저』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목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또 신부를 가리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직접 말할 특권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6:23을 보세요.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우리는 가면의 껍데기를 벗겨 버리고 주님 앞에 남모르는 깊은 죄, 숨은 부끄러움을 털어놓고 사하심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인간은 죄를 자복하기를 꺼리는 마음이 있습니다마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은 것입니다.
이 시간 타인의 잘못을 논할 것이 아니라 나의 책임임을 절실히 깨닫고 하나님 앞에 솔직히 자백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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