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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수를 버린 사람 (렘 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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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와 현대인의 모습, 그리고 또 하나의 현대인인 나 자신의 지나 온 날들을 생각하면서 이 말씀을 읽을 때 얼마나 절실하고 절박한지 이 를데 없다.

현대인은 두가지 자살행위를 범한 것이다. 한가지는, 오늘의 인류는 생 명수의 근원을 단절시켜 놓고 독자적으로 생존하려고 바둥거려 왔으나 생명 수혈이 막혀서 반신불수의 운명을 자초하게 된 것이다.

또 한가지는 인간이 누적된 성취감과 확증된 가능성으로 창조의 대행자 가 되려는 데까지 이르렀으나 자기가 이루어놓은 거대한 형상 속에 도취 해버린 현대인은 그 밑바닥에 뚫려있는 구멍을 보지못한 채 영양실조로 시들어 말라가고 있는 것이다. 황폐한 웅덩이, 그 속은 텅텅 비어 있는 데도 허위의식으로 풍요해진 현대문명은 죽음에 당면해 가고 있는 자기 의 실상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생수의 근원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 게 된 이유를 조용히 반성해 보게 된다.

첫째는 '나'의 위치 확인에서 잘못이 시작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내 백성'이라고 호칭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나 자신'으로 인식하고 있 다. 아이덴티티의 상실이다. 우리는 여호와를 버리고 스스로 생명수의 근원을 단절해 버린 패역자들이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관 계성은 내 백성의 관계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시는 나의 존재 확인 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관계가 귀찮게 여겨진 것이다. 독립된 인간 실존안에서의 자유자는 휴머니즘의 틀 속에 안주하기를 바라지, 하나님 과의 관계성 속에서 자기의 위치를 확인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그 것은 역겨운 반인간주의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속에 얼마나 이런 생각을 가져왔는가 그것이 으뜸가는 악이요, 죄인것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온 불순종의 자식들이다.

둘째로 이러한 인간존재의 확인이 빗나간데서 우리는 신(신)을 추상화 시킨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인간이 만들어 놓은 문화속에 상징화시키 는 큰악을 범한 것이다. 크리스챤인 나도 학문 속에 추상화된 하나님을 조작해낸 죄를 범한 자이다. 우리는 지금도 얼마나 하나님에 '관해서'믿 고 있는가 현대인은 얼마나 하나님을 떠날 수도 있고 만날 수도 있는 편리한 추상적 신으로 실용화시키고 있는가 그것이 죄인줄을 미처 모르 고 살아온 우리들이다. 현대의 이데올로기화한 기독교, 적당히 유토피아 화시킨 교리, 교화제도, 문화인, 생명없는 크리스챤 대중등 이런 현상들 에서 우리는 역사를 운행하시는 인격적인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고, 생명의 감격도 무디어져 가고 있다.

셋째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의 백성된 나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하고 추상화시킨 신으로 생각하여온 현대인은 '삶'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현대인은 살아 있으나 실은 산자의 삶이 아니다. 생활만 있지 삶의 호흡 은 끊어진 것이다. 현대인의 가치는 전도되어 있다. 현대인의 생활은 삶 자체에서 이미 벗어난 삶의 주위에서 맴돌고 있는 수단적 생활에 머물고 있다. 이것은 자초한 죄의 값이다. 그리하여 가장 유능하다고 현대의 지 성들도 자기가 살아 있는지 죽은 상태인지를 가늠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는 영혼의 물음을 물을 수 있는 가장 상식적인 판단력도 못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나의 삶을 하나님 아버지의 백성으로 관계지을줄 모 르는 현대인은 완전 불구자들이다.

우리는 크리스챤이라고 하면서도 우리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참 생명 을 에누리해 가며 살 때가 얼마나 많은지 곤두박질하는 참회를 할 때가 있다. 나는 죄와 삶의 문제로 대학2학년 때에 큰 고민을 한 경험이 있다.

그때는 정돈되지 않은 남산 깊은 골짝을 헤매이면서 밤을 새우고 미친 듯이 통회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즉각적인 해답을 못 받았다.

그후 오랜 생애의 과정중에서 가장 소중한 믿음과 삶의 비밀을 서서히 보여 주시고, 가르쳐 주시고, 사건 속에서 체험하게 하시는 은혜에 감격 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 생수의 근원되시는 여호와를 버린자의 비참! 나는 겸허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이 말씀을 기도로 자백한다. 이미 구원받은 우리는 이 말씀에 서 졸업하였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그것은 큰 잘못이다. 베드로의 행적에 서 우리는 쓰라린 경험을 뉘우치게 된다.

여호와를 버린 현대인은 스스로 생수를 받아 저장하기 위해 웅덩이를 판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이미 터진 웅덩이인 것을 자각치 못한 우리들 이다. 불순종과 인간자고의 둘째악이다.

현대인은 열심히 웅덩이를 판다. 그리고 그 안팎을 꾸미고 단장하여 극 치의 작품을 이루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은 헛된 장난이다. 헬라인은 신 들을 창조하는데 천재적인 백성들이었다. 마지막에는 이름없는 신전을 꾸며 그 이름모를 신을 두고 섬겼다. 그들의 예술의 극치는 중성(중성) 을 창조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완전조화의 인 간상을 창조하기 위해 중성의 조각걸작품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창조의 원리를 물리치고 인간을 그 창조의 대행자로 올려 놓으려는 시도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행복을 창출해 내기 위해 문명의 첨단을 창조해 간다.

인간능력을 국대화하기 위해 인간공학을 무한대로 발전시켜 가려고 한다 오늘의 문명적 성취는 가히 인간을 예찬할만하고, 그 이루어 놓은 업적 과 작품들은 실로 놀랍다. 그런데 현대인은 인간 에너지에 대한 '믿음' 에서 빗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우상으로 변모되어 가고, 인간이 만들어 놓은 최대 걸작품을은 하나님 없이도 생수의 근원이 될 줄로 믿 고 있다. 그래서 구미에서는 제단을 미술 갤러리로 변질시키고 예배당을 팔아 남기는 일들이 속출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되기를 기피한 현대인 은 허무의 웅덩이 속에서 이글거리는 욕망의 술에 취해 그것을 생수로 거듭 마시고 있다.

허무주의의 우상화된 인간이 파놓은 웅덩이-신(신)-, 그것은 인간의 근 본문제를 해도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2장 2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은 오 늘 우리에게 주시는 무서운 경고의 훈계로 나는 받아들이고 있다.

네가 만든 네 신들이 어디 있느뇨 그들이 너의 환난을 당할 때에 구원 할 수 있으면 일어날 것이니라 유다여 너의 신들이 너의 성읍수와 같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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