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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원한 축복 (요 09: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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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 은혜로 눈 을 뜨게 되자, 예수께서 자신의 눈을 고쳐 주었다고 소문을 내고 다니는 것이었습 니다. 이를 보고 예수님의 일에 대하여 반대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 소경이 었던 자를 붙잡아 그의 부모에게 데려가서 참으로 그가 소경이었는가 하는 것을 물어보았고, 이에 대해 그 부모들은 사건이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채고 직접적인 대답을 회피하자 다시 그 당사자에게 묻는 장면의 내용입니다.

이에 저희가 소경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 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하니까 그 소경이었던 자가 대답하기를 다른 것은 모르지만 내가 소경이었다가 지금은 봅니다.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점은,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는 것과 우리의 경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본래 의도한 것과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흘러갈 소지가 너무도 많아서 기독교 역사 200년 동안에 늘 미혹케 하는 일이 있곤 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한국 교회가 직면한 몇가지 문제점들 중에 아주 정면에서 충돌하며 나오는 문제가 있다 면, 문선명의 통일교나 박태선의 전도관 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구원을 준다고 덤벼드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아직은 이단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단이라고 취급할 수 있을 정도로 촛점이 어긋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맞기는 맞으면서, 또 같은 편으로서 분명히 한국 교회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사실인데, 잘못하면 옆길로 새어 나갈 수 있는 성향이 다분히 있는 몇개의 움직임들이 있습니다.

예수 믿고 난 이후에 가장 큰 축복은 오늘 본문에 나타난 것과같이 자신 스스로가 인식할 수 있었던 범위를 벗어나 있는 영원과 진리와 생명에 대한 것이 있나는 것 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복음 9장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자를 등장시키는 것은 결단코 예수를 믿 으면 이 땅의 인생에 축복이 있다는 것을 얘기하고자 함이 아닌 것입니다. 다시말 해 물질 영역에서의 축복을 논하는 것이 아니요, 답답했던 자가 눈을 떠게 되었다 는 건강에 관한 축복을 이야기 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날 때부터 소경 이었다는 것은 그 자신이 소경이었던 사실을 모른다는 이야기인 것입 니다. 그것이 본인에게는 전혀 불편하지 않고, 익숙되어 있는 상태였던 자였습니다 예수님께 눈을 뜨게 하여 보게 해 달라고 요청한 적도 없었습니다. 전적으로 예수 님의 일방적인 결단이었으며,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날때부터 소경이라서 자신이 소경이라는 사실이 무엇이 불편한지 도무지 불편하지 않고 눈을 떤다는 것 이 무엇인지 조차도 무르는 날때부터 소경된 자를 선택하여 눈을 뜨게 한 이 사건 은 구원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위한 주님의 의도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구원이란 무엇일까요 구원이라는 것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며, 이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는 다른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 다. 그리고 구원이란 하나님 나라에 소속되어 그 나라를 위하여 준비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과 긍휼과 은혜로 간섭하시며 다스리시며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소경이 눈을 떠는 기적 사건은 예수를 믿으면 눈도 떠는 기적 이 일어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을 받으면 신령한 세계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다시말해, 병이 낫고 눈을 떠고 세상에서 당하는 고달픈 인생의 고통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법칙을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과는 전혀 다른 신령한 세계의 출발을 하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부분에 대하여 기독교가 얼마나 많이 헤메고 있는 부분인지 모 릅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뜨게 한 이 사건을 보고서 우리의 관심이 구원 받은 자의 신령한 세계로의 진입이라는 것 보다도 외적인 사건 그 자체에 더 집착하고 나의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문제를 한번 쉽게 풀어 볼려고 발부둥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들이 고수하고 놓치지 않으려 하는 것이 무었입니까 누가 내 병 을 고쳐 줄 것인가 하는 열망을 끝까지 지킵니다. 그러나, 이 병이 안 나아도 좋 사오니,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영광만을 나타내기를 원하나이다 하는 자세는 아예 상상도 엄두도 못내는 처지에 전락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막16:17-18절의 말씀처럼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자에게 아주 놀라운 축복의 말씀이 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 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분명히 이 말씀은 믿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표적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당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과 이익만을 받을 것을 약속하는 말씀은 아닌 것입니다.

만일 이 말씀이 신자들이 세상의 무슨 일에서든지 문제를 해결하며 형통해지는 약 속으로 주신 말씀이었다면,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 중의 하나인 스데반이 왜 돌에 맞아 죽습니까 이 마가복음의 약속대로 라면 분명히 믿는 사람으로서 어떤 해도 받지 않고 형통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스데반을 향하여 돌을 던져 서 맞으면, 맞은 돌이 팅겨 나가서 도리어 던진 사람들이 죽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그 말씀이 제대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스데반은 돌에 맞아 처참하게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가셨습니다. 그렇다면 막16:17-18절의 약속이 잘못 된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왜 이 기적을 선언하고 있는가를 아셔야 합니다. 이 기 적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이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을 보이 시고 모든 문제의 해결자 되시며, 세상의 주관자 되시는 분이 과연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무었을 위해 어떻게 살 아가야 할 것인가를 알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기적은 우리의 신령한 축복을 위한 약속인 것입니다. 그러한 기적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 세상보다 크시며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의 뜻과 약속을 따라 살 아가게 하는 동기를 부여코자 함인 것입니다. 결코 이 세상에서의 만사 형통 그 자 체만을 위한 약속이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병이들었는데 어떤 의사가 와서도 못 고칩니다. 그럴 때에 기도하여 나았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크신 역사의 손길을 체험하고서 이제 주님 만을 따 르고 섬기기로 작정하게 됩니다. 이와같이 신령한 변화를 위한 약속의 말씀인 것입 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어떻게 반응하는 지 아십니까 '기도해서 병이 나았다.

그러니 이젠 의사 따위는 필요없다. 아프면 병원 갈 것이 아니라 기도원으로 가자' 라는 식으로 반응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적을 잘 못 이해한 것 입니다. 그와같은 기적의 체험은 이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신령한 하나님 나라 를 준비하는 자세를 일깨우기 위함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의 소경이 눈을 뜨고 안 뜨는 문제를 영적인 문제라고 뒤에가서 시사 하고 있습니다. 바로 요9:39절부터 나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 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 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말씀의 촛점이 영계를 보는가 못 보는가에 두고 있지 생물학적으로 눈이 떳느냐 안 떳느냐의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언제나 육체적으로 눈을 떠느냐 못 떠느냐는 이 유 혹 앞에서는 속수무책입니다. 워낙 우리의 관심이 이것에 지대하기 때문입니다. 우 리는 가만히 놓아두면 자연히 그 쪽으로 흘러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에는 교회의 복음의 핵심을 흐리게 하는 흐름들이 있습니다. 예 를 들면 어떤 교단에서는 삼박자 구원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이 삼박자 구원은 성경 해석상 전혀 맞지를 않습니다. 성경에는 영혼이 잘 된다는 약속은 많이 있습 니다. 그러나,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 되고 건강해 진다는 약속은 없습니다.

다시말해, 범사가 잘 되고 건강하게 되는 문제는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기원문 이지 약속으로 주신 말씀은 아닌 것입니다. 다시말해 이것을 하나의 법칙으로서 삼 아서 삼박자 축복이라는 약속을 말할 수 있는 성질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그 예로서 우리가 사도 바울만 보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몸에 있는 가시가 떠나 게 해 달라고 주님께 세번이나 기도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그래서, 사도 바울은 기 뻐함으로 자신의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오히려 병에 걸렸기 때문에 예수를 믿은 이가 하나 둘입니까 사업이 망해서 신앙을 가진 이가 하나 둘입니까 잘 먹고 잘 살았으면 이 자리에 나와 앉 았기나 하였겠습니까 만사형통 하였더라면 이 자리에 오지 않았을 사람들이 실패 와 좌절 때문에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들이 그 얼마나 많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사형통을 마치 하나의 약속이고 법칙인양 가르치므로 사람들의 가슴 바탕에 깔려 있는 열화같은 만사 형통하고픈 욕구와 필요에 호응케 하여 바로 거기서 열심을 이 끌어 내고있고 부흥을 이끌어 내고 있지 않나 의문스럽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해는 충분히 갑니다. 인간이란 족속이 자기의 이해관계나 욕구에 와 닿지 않는 설교나 가르침을 아무리 많이 받더라도 좀처럼 기지게를 틀고 땀흘리고 쫓아가려 하지 않 는 족속임을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추구하시고자 하시는 일은 영혼에 관한 싸움이지, 세상에서 누가 더 편안하게 사는가 하는 싸움이 아닌 것입니다. 지금 이 말씀을 들으시면서도 그게 아닌데 하고 갸우뚱 하실 분들이 아마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우리 자신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방식으로서가 아니 라, 나의 방식과 나의 구미와 나의 취향이라는 각도에 맞추어 바라보고 해석하고 있는 고집장이들 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무엇인지 구약의 또 한 예를 보십시다. 창39:1-4절을 통해서 살펴보십시다.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애굽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그를 사니라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 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 주인이 여호와께 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요 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임하니 이 말씀 가운데서 가장 이상한 말이 무었입니까 '형통케 하였다'는 말이 아닙니 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요셉은 날마다 승승장구해 보입니다. 보디발의 집에 갔더니 거기 가서도 형통케 하시고, 감옥에 들어갔는데 거기서도 형통케 하셨다고 했는데, 여기서 요셉의 신분의 변화를 한번 생각하시고 그 형통함을 비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자기의 형제들에게 따돌림을 당해서 노예로 팔리운 것을 형통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까 노예 생활, 죄수 생활을 잘 하게 하시는 것이 과연 형통함이 될 수 있습 니까 19절을 보십시다. 비슷한 내용이 또 나옵니다.

주인이 그 아내가 자기에게 고하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 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주인의 부인이 유혹을 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신앙을 지키 고 거기에 응하지 아니 하였더니 무고해져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창39:19-2 3절을 보십시다.

이에 요셉이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넣으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 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에게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은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 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 셨더라 이 말씀에서도 범사에 형통케 하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아예 옥에 들어가지 않 고록 하시는 것이 형통이 아닙니까 그리고 팔리지 않게 하시는 것이 요셉의 편에 서 볼 때 형통함을 받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분명히 괴로운 일과 억울함과 고통의 연속인데도 형통하더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형통입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만사형통과 지금 성경에서 요셉의 경우를 통해서 말 씀하시는 만사 형통한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그러므로 신앙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쉽게 축복이나 감격 과 희열이란 말을 사용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 입니다. 여기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를 믿는 쪽과 안 믿는 쪽 중에서 어 느 쪽이 더 이 세상에서 편하겠습니까 예수를 안 믿는 쪽이 백배나 더 편합니다.

예수를 믿게 되면 그날부터 고통스럽습니다. 예수 믿는것 같이 귀챦고 힘드는 일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때부터 이제 여러분은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수준까지 안 갈 수 없는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시편 105:16-19절에서 요셉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또 기근을 불러 그 땅에 임하게 하여 그 의뢰하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 다.

요셉이 창 39장에서는 형통케 되었다고 했지만 시편에서는 그 발이 착고에 상하기 도 하고 몸이 쇠사슬에 매여 있는 고통의 세월을 보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함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에게 요구 하시는 수준에 이를 때까지' 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 저 를 단련시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마라톤 왕국이 된 것은 최근 몇년 사이입니다. 옛날에는 아주 기록이 뒤쳐 져 있었는데 근래에는 세계의 10대 마라톤의 기록의 보유자들을 살펴보면 일본 사 람이 몇 사람 끼어 있습니다. 그들은 연습을 어떻게 시켰는지 아십니까 차 뒤에 쇠철망을 만들어서 거기에다 선수들을 집어넣고 차로 끌어 당깁니다. 늦게 뛰면 철 망의 뒷면이 선수를 밀게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다 뾰쪽한 것을 달았다 생각해 보 십시오. 안 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실력을 늘렸다고 합니다.

여러분, 신자란 어떤 사람인 줄 아십니까 그 쇠 철망에다 뾰쪽한 것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때에는 불도 붙고, 그러다 쓸어지면 그 밑은 철교와 같아서 그 밑에는 상어 떼가 배회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다 떨어져 상어의 밥이 되면, 물리는 고통만을 주다가 도로 내뱉어 버립니다. 그러면 신앙을 위한 특수 차가 대 기하고 있다가 또 다시 끌어 올리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뛰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신앙인의 길입니다. 이와같은 훈련과 단련을 다 통과해 내는 것이 만 사형통이라는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말하자면 요셉의 형통함이라는 것은 세상의 인생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 님께서 그의 자녀에게 요구하시는 완성의 아름다운 수준에 이르도록 하기 위하여 그야말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 까지 이끄시고 다루시는 진척 과정 상의 형통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으면 어디에서 평안이 있고 감격이 있는가 하면 신자로서 이 러한 운명론적인 축복의 길을 가고 있다는 차원에서의 감격이 있고 감사가 있고 평 화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결코 하나님 앞에서 포기 될 수 없는 존재구나!' 하는 감격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생각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 내가 예수를 믿었으니 내가 계획하고 투자하는 일에는 번영만이 따른다'는 생각을 마시기 바랍 니다. 성경에는 도무지 그런 약속은 없습니다. 그런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적인 형 통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축복을 이야기 하고, 또한 세상적인 축복도 제시하는 것은 성경 의 축복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일 뿐인 것입니다. 다시말 해 진짜 복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장 관심이 많은 세상적인 복을 등장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족장들을 부자로 만드시고 잘되게 하신 것은 그것이 세상 에서의 신자들이 그렇게 만사형통의 복을 받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기 업의 풍성함과 신령한 축복이 얼마나 대단하고 놀라운가를 세상에서 사람들이 좋아 하는 것들로 멧시지화시키고 표현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그것이 법칙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런 방식으로 그렇게 설명하는 것은 우리를 세상적인 안일 함 이라는 목적지로 이끌고 가기 위함이 아니라, 참으로 가장 중요하고 더 큰 축복 인 신령한 축복으로 우리를 이끄시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잘 묘사한 말씀이 히 11:33-35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히 11장을 믿 음장이라고 해서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명예의 전당 같은 장입니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 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이상의 말씀을 얼핏 보면 세상적으로 축복된 말들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들도 쉽 지마는 않습니다. 사자의 입을 막았다거나, 불의 세력을 막았다는 것은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다니엘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저지 당하고 왕 을 신으로 섬길 것을 강요 받을 때, 이를 거절하자 사자 굴에 던져졌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친히 천사들을 보내어 그 사자들의 입을 막고 다니엘을 보호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우리 인생 속에도 천사들을 보내어 주시사 악한 이들의 입을 막 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당한 일들은 바벨론의 포로 시절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다니엘의 세 친구는 풀무불에 던짐을 받았습니다. 말하자면 제련소의 용광로 같은 곳에 집어 넣음을 당하였는데, 한 천사가 그들과 같이 있어서 그들을 그 불 속에서 타지 않도록 보호해 줍니다. 그러나 어쨌든 용광로 속에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종종 너무도 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사 용광 로 속에서 우리를 지키며 사자의 입에서도 우리를 지키시리라고 생각하며, 그것을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자굴에 왜 넣도록 하십니까 용광로에 왜 넣도록 버려 두시는 것입니까 그 이전에 보호받는 것이 더 큰 축복 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길을 가는 자들이고, 하나님께서 주려 하시는 것 이 세상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렇게 앞뒤가 맞지 않게 보이며, 대조되는 큰 일들이 기적으로서 표현된 것임을 것을 아셔야 합니다.

조금 전에 읽은 히 11장의 믿음장의 구절들이 세상적인 축복들이 아님을 그 뒤에 연결되는 말들로써 알 수 있습니다. 히11:35절 이하를 보시면 (히11:35-38); ..또 어떤 이들이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 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 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 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 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를 믿어서 범사가 잘 되는 사람들이 왜 암혈 속에 가 있어야 합니까 탄광을 개발하여 떼돈을 벌려고 갔습니까 또 광야는 왜 갑니까 예수 믿어서 경제적으로, 명예적으로, 건강으로 좋아진다는 약속은 성경의 그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단지 그렇게 보일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쉽게 생각해서 는 안되는 것입니다. 모든 축복과 이적에 관한 기록은 이 세상과 육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신령한 세계를 위한 징검다리로서 등장시켰을 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교회 안에서는 복음에 관한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활동하는 교 회도 있습니다. 그 한 예가 서울 신길동의 성락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베뢰아 선 교 단체입니다.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의 한 도시인 베뢰아에 도착했을 때, 베뢰아 신자들이 더 신사적이어서 주의 말씀을 날마다 상고하고 그 가르쳐 준 복음이 진짜 인가를 마음 속에 넣고 신앙 생활을 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기록 되어진 곳입니다.

그러나, 성락 교회에서 사용하는 베뢰아는 그 원래의 좋은 모습 과는 전혀 관계없 이 쓰여진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각교회의 김기동 목사의 선교 기관인 이 베뢰 아 선교의 그 중심 교리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생을 구속하여 주셨을 때에 모든 신자들의 영혼 뿐만 아니라, 육체도 함께 구원해 주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신 자가 질병에 걸리는 것은 믿음이 약해졌을 때, 예수를 안 믿고 죽은 자들의 영혼이 귀신이 되어 떠돌아 다니다가 들어와 그 속에 집을 지으므로 병이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암병은 물론 귀신이 들어온 것이고, 감기 걸린 것도, 허리를 다친 것도 귀신이 들 어온 것이라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각종 질병에 걸린 사람들이 거기에 가면 실제로 낫습니다. 그리고 귀신을 좇아 냅니다.

그러나 성경이 다음 말씀들을 덧붙이고 있다는 것을 우리의 주의를 돌려야 합니다 그 때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이르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좇아내고 권능을 행하였나이다 하리니 내가 그때에 저희들에게 밝 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떠나가라 하리라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모르는데도 불구하도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낸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쉽게 흑백논리를 적용시켜서 이단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오늘날 대부분의 건전한 교단에서 이단으로 구분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단으로 구분되었느냐 하면 바로 우리가 지금 살피고 있는 구원의 문제에 관한 잘못된 이해 때문인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구원에 있어서의 최고의 확신은 내가 '믿었다' '기뻣다' '울 었다'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 대한 감각이 있느냐 없느냐'로 구분하는 것입니 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소경의 '다른 것은 모르겠는데 보인다'는 말 처럼, 우리 가 경험하고 인식한 것으로 신앙의 내용을 삼으려 하지 말아라는 얘기인 것입니다.

그 경 험과 인식은 단지, 원래 내용의 부수적인 산물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을 아셔 야 합니다. 훨씬 더 깊은 내용이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부수적인 경험으로 성경 전체를 피익하려고 할때에 실수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경험은 징검다리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징검다리로 개천을 건넜으나 그 징검다리의 사이가 허공이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다시말해, 우리가 경험한 것으로 신앙이 진전해 나아가지만 성경은 우리의 경험과 경험의 징검다리 사이를 설명해 주소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아직도 경험하지 못한 무궁한 말씀의 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도 모르고 자기가 경험한 것들만을 엮어서 이 런 식으로 떳떳한듯 외치지 말아야 합니다.

'난 다른 것은 몰라요. 난 어느 교파가 어떤지는 몰라요. 나는 장로교가 왜 싸우 는지도 몰라요. 내가 아는 것은 하나 있어요. 예수님은 절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너무 쉽게 이야기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베뢰아 선교 원의 원장인 김기동 목사님과 함께 쌍두마차격인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함만형교 수님이시라고 서울대 국악과 교수이십니다.

함교수님은 한때 암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김기동 목사님을 통하 여 암을 치료받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 분에게는 신앙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 던 것입니다. 그 때부터 하나님 앞에서 열심을 품은 것은 좋은데, 그 다음부터 신 앙의 정리를 꺼꾸로 하기 시작했습니다.

김기동 목사님에게로 가서 마귀론을 배웠습니다. 그 다음부터 여기저기 다니면서 포교 활동을 하면서 수 많은 병자들을 고쳐냈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사실이라고 해서 전부 진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귀와 귀신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베뢰아에서 말하는 불신자의 사후 영혼이 귀신이라는 주장이 진리입니까 아닙니다. 저들은 처음부터 거짓말한 자요, 살인한 자요, 하나님을 반역하고 있는 무리들입니다. 우리에게 지금 눈 앞에 보이는 이익 들이 진리가 아니며 영원한 상급이 아닌 것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단 것을 너무 많이 먹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중. 고등학교 시절에 공부하지 않고 땡땡이치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이익이 아닙 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꼭 해결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함만형 교수는 국악과 교수였기 때문에 여름방학 때 우리나라의 전래되는 민속을 채집하러 전국을 돌아다녔습니다.

무당을 찾아가서 그들에게서 우리나라 고래의 춤과 노래들을 수록, 채집나는 것입 니다. 그런데 무당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신이 들려서 무당이 된 강신 무당이 있고, 또 하나는 부모로부터 보고 배워 세습적으로 된 세습무당이 있 다는 것입니다. 이 둘 중에 누가 더 용할 것같습니까 용하기는 강신 무당이 용하고, 잘하기는 세습무당이 훨씬 잘한다고 합니다. 그렇 게 춤도 잘 추고 노래를 잘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 어디를 지나가시다가 한 무당을 만납습니다. 하도 춤도 못추고 노래도 못하길래 강신 무당이구나 척 알아보았습니다. 만났으니 인터뷰를 하는데 이름을 대어 주질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리 저리 꼬여서 나중에 물어 보았 더니 정 에스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깜짝 놀라 묻기를 '아니, 당신은 천주교인이 아닙니까' 그래 맞다 하길래, '어떻게 해서 무당이 되었습니까' 물었더니 긴 한 숨과 함께 자초지종을 말하더랍니다.

처녀 시절에 병을 앓았는데, 백약이 무효하고 의사들이 진단을 제대로 못 내렸던 것입니다. 무슨 병인지도 모르는데,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보통 고통스러웠던데 아 니었다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마음 속에서 자꾸 이런 생각이 들더랍니다. 물 한 그릇을 떠 놓고 절을 하면 나을 것 같더랍니다. 너무나 허튼 생각이라고 여겨져서 많이 자제를 했답니다. 그러나 자제하면 할수록 자꾸만 그 생각이 커지고, 고통은 더욱 심해만 갔습니다. 할 수 없어서 어머니께 요청을 했습니다. '어머니, 제가 물 한 그릇만 떠 놓고 절을 하면 나을 것 같은데 한 번 해 봅시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펄쩍 뛰었습니다. '너, 그게 무슨 생각이냐' 그러나 아무래도 낫지를 않고 고통은 점점 더 심해지자 할 수 없이 물을 떠놓고 절을 하자 신에 접하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 꼼짝없이 무당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강신 무당들은 자신이 하고 싶어서 하는 무당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이 이야기를 예수 믿는 자도 귀신이 와서 빼앗아 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비화시키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만일 그런 자가 있다면, 그건 제가 보기 엔 처음부터 그는 신자가 아니었던 자임이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처음부터 성령이 와 계시기 때문에 그 누구도 침범하지 못 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가 놀라야 할 것은 이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부분입니다. 우 리 인간은 결국 신앙의 내용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었에 관심 이 있느냐 하면 무었을 내가 붙잡으면 내게 이익이 있을 것인가 하는 것에 만 관 심이 있을 뿐입니다. 다시말해 누가 날 낫게 해 줄 것이냐 누가 내게 이익을 가져 다 줄 것이냐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주여, 내가 낫지 않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을 결코 놓지 않겠나이다!'하는 신앙고백은 참으로 어색한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심각한 대목입니다. 우리가 히브리서 11장에 본 죽 음과 유리함과 환난과 핍박을 받아야 할 이유가 도대체 무었입니까 예수를 믿어서 잘 된다면 성경이 왜 순교를 강조해야 되고, 유리함과 굶고 헐벗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칭피 당해야 된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을 확인해야 됩니다. 우리는 적어도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는 자요, 영원에 대해서 준비하는 자요, 하나님이 계심을 알게 된 자 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여러분에게 무었을 준비하고 싶어하시는 지를 확인하셔 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지금 준비 시키고자 하시는 것은 이 세상의 안락이 아닙니 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표현하고 싶어하시며 여러분 자신을 최고의 목적을 심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수단과 목적으 로 동원 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 을 드러내시고자 하시는 것은 바로 여러분이 궁극적인 목표가 되며 다른 것들은 부 수적인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왜 그토록 많은 순교와 즉음과 인내를 말하고 있는 지를 이제는 분명히 확인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존재들입니다. 왜 우리가 이토록 어렵게 훈련을 받고 이 세상에서 준비해야 되는 지를 아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바로 하나님의 자 녀라는 신분을 가졌기 때문이요, 그 자녀답게 되기위해 어려운 과정들을 통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이 세상의 것에 목표를 둔 자들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과 마음이 얼마나 세상으로 자꾸 돌아가는지 모릅니다.

옛날에 서울의 남산 길에는 길을 따라 점쟁이들이 쭈욱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그 런데 어느 교회의 집사님이 한 군데를 갔더니 너무도 용한 것입니다. 얼마나 용했 던가 하면, 그 집에 들어서자마자 보고서 하는 말이 '당신과 나는 길이 다른 사람 인데 왜 오셨습니까 당신 속에는 너무 귀한 분이 계셔서 제가 감히 뭐라고 할 수 가 없습니다. 제발 나가 주십시오.'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집사님은 기쁨에 넘쳐서 교회에 가서 뽐내신 것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다음날 모두들 갔습니다. 확인을 해야 될 것 아닙니까 정말 들어가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같이 그 곳에 갔다가 집에 돌아 오신 한 집사님은 너무 기뻐서 사흘 간을 잠도 제대로 못주무셨습니다. 아니, 우리는 왜 그런 식으로 확인을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까 어떻게 귀신이 확인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까 천하에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믿는 것을 귀신이 아니면 돈이 확인해 주어야 하는 존 재들이 되어버렸습니다. '난 진짜인가봐. 예수 믿고 난 이후부터는 돈이 마구 들어 오는거 있지요'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다가 이런식으로 전락되 어 버렸습니까 성경에는 분명히 '예수를 믿다가 죽어도 좋다. 가죽을 벗기든지 입히든지 맘대로 해라!'였는데, 우리는 꺼꾸로 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세대는 심각한 위기에 처 해 있는지도 모릅니다. 기독교의 핵심과 기독교의 능력과 그 영광이 점점 퇴색되어 가고 있지 않는가 하는 걱정을 해야 될 때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세에 믿는자 를 보겠느냐는 우려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드디어 영계에 초대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이 세상만을 잡 고 싸우는 자들과 같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긴 안목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 귀다툼하는 그 자들과 이 세태를 보고서 웃음이 나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신자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진 것은 그 누구도 빼았을 수 없는 우리의 평화요, 우리의 소망이 요, 우리의 자랑입니다. 너무나 풍성한 것이기에 나 혼자 갖고 있을 것이 아니라, 나누어 주고 싶은 것이요, 세상이 우리를 할퀴고 몰아부치더라도 여유있게 웃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시옵소서! 저들이 자기 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며 기도하는 자들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알고 있 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풍성함과 그 높이와 그 깊이가 우리에게는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 그것이 없어졌습니다. 저 사람들과 꼭 갗이 싸워댑니다. 똑같이 돈을 놓고 돈 먹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누가 더 돈을 많이 긁어 모아 가지느냐는 싸움을 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싸움은 영계의 싸움이요, 영원을 준비하는 싸움이요, 세상이 우리를 할퀴는 데도 초연할 수 있을 것이냐 하는 싸움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같은 특권과 축복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절대로 타협 하지 마시고, 유혹에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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