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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밀알이 죽지 아니하면 (요 12: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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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유추해 낼 수 있습니다.
『잘살고자 하면 잘 죽어야 한다. 잘 죽어야 잘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아를 죽인다는 것은 종교의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성경에서도 가장 심오한 심령상태가 바로 이러한 경지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아를 형성케 하는 요소인 情(정)과 欲(욕)까지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성도들의 신앙상태는 바로 여기까지 이르러야 하겠습니다. 신앙심이 없는 인생은 할 수 없거니와 신자는 자아를 알고 자아와 주님과 양자 앞에 설 때 자아를 버리고 주님을 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 한 처녀가 있습니다. 그녀는 감미로운 꿈을 꿉니다.
그 꿈 속에 이상적인 남성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봄날 화원의 꽃과 먼 산의 아지랑이도 가을의 푸른 하늘도 자기의 행복이라는 그림에 색칠을 해줍니다. 그러나 때때로 밀려오는 고독과 뭔가 충족되지 않는 마음으로 감상적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아직 알 수 없는 슬픔이 가슴속 저 밑에 깔려 있습니다. 미래의 소망은 이렇게 불안한 마음을 떨쳐 버리지 못한 채 그래도 뭔가의 행복을 추구하게 됩니다.
여기에 한 미망인이 있습니다. 전심으로 사랑하던 남편은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기의 생명과도 바꿀 수 없었던 남편이었습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므로 모든 것이 공허하기만 합니다.
집안이 쓸쓸하기만 합니다. 거리도, 함께 거닐던 해변도, 산책하던 산길도, 식당도, 극장도, 모든 환경도 다 무의미한 것만 같이 변해 버렸습니다.
사랑도, 대화도, 마음의 머물 곳도 그 대상인 흐뭇한 마음 자리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답답한 마음이 터질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절규합니다. 『여보! 당신은 왜 나만 남겨 놓고 갔습니까? 이 뼈저리고 무서운 고독을 어찌 감당하라고요. 슬픔과 고민만을 주지 말고 차라리 죽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고독은 위협하기만 하지 아주 죽여 버리지는 않습니다. 죽지 못해 사는 인생입니다. 』

인생이면 이상과 같이 모양과 양상은 다르지만 비참과 절망과 고독에 부딪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해결서인 성경은 여기에 대한 열쇠를 줍니다. 고독이 위협만 하고 죽이지 못하는 것을 먼저 죽여 버리는 것! 육적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죽는 것, 즉 자아를 완전히 죽이는 것입니다.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스스로 혼자서 인생의 모든 고뇌를 극복해야 합니다. 즉 자기의 도, 자기의 수행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십자가를 지신 주님 앞에서 자아를 죽이라고 합니다.
『重生(중생)』은 가장 기초적이며 중요한 교리입니다. 거듭나야 합니다. 죄에 대한 자아는 죽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다시 사는 것입니다. 이전까지는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왔으나 이제는 자기는 완전히 죽고, 예수 그리스도를 핵심으로 모든 생활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혼을 해도 예수제일주의로 생활을 시작하십시오. 그곳에 참 행복이 있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져도, 어떤 변화가 찾아와도 그 가정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떤 재난을 만나고, 슬픈 사건을 만나도 중심을 흔드는 비애나 절망은 없습니다. 그 핵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부흥사 무디(D. L. Moody)의 집에 화재가 발생하여 집이 다 타 버렸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찾아와 위로할 때 그는 『집은 다 타 버렸어도 예수님은 타지 않았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라고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고 합니다.
희랍신화에 나오는 미남 청년 나루시소스는 호수위에 비췬 자기 얼굴이 하도 예쁘게 느낀 나머지 그 그림자에 도취된 채 침식을 잃었습니다. 결국 그는 죽어 수선화가 되었다고 합니다.
자기만 잘난 줄 알고 자기에게 도취되어 사는 사람,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 자기 바벨탑을 쌓는 사람, 바벨탑이 무너질 때 어찌되겠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나환자 수용소에는 비참한 일이 많이 있지만, 특히 아기를 낳았을 때 참으로 비참하다고 합니다. 그들도 똑같은 모성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기들을 그곳에서 양육할 수 없어서 띄어 놀 때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웁니다.
그러나 그 슬픔은 내 아들이 건강하고 훌륭한 인물이 되기를 소망하며 견디어 냅니다. 그런데 몇 년 후에 그 아들이 감염이 되어 다시 수용소로 들어오게 될 때, 그 아들을 부둥켜안고 우는 울음은 더욱 큰 슬픔입니다. 그것은 그의 유일한 소망조차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나병보다 더 무서운 영원성이 있는 병은 죄입니다. 지옥에서 만날 때의 비애는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예수를 잘 믿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내 속에 살수록 자아는 죽게 되는 것입니다. 잘 죽는 자는 잘 삽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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