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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끝까지 (요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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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현재에 살고 있습니다. 과거는 그에게 있어 지나간 생애 속에 속하는 것이요, 과격하게 말하면 죽은 생애라 볼 수 있습니다. 인생은 과거의 끝에서 살고 있습니다. 계속 살아온 그 끝은 현재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현재에 살고 있습니다.
아직 미래에는 발을 디뎌 놓지 아니했습니다. 미래는 아직 그의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은 현재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 생애의 끝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보면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과거에도 계속 사랑해 왔고 그의 생애 끝, 즉 이 땅에서 최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현재까지 변함없이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사랑으로 일관한 것입니다. 죄는 미워하셨지만 죄인은 사랑하셨습니다. 간음죄로 돌에 맞아 죽게 된 여인을 구출해 주셨고, 일곱 사귀가 들린 막달라 마리아를 성도로 재생시키셨고, 세번씩이나 자기를 배반하고 은혜를 모르고 저주하다시피 한 베드로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사랑의 물음으로 죽음을 넘는 대사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마귀가 벌써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그 마음에 넣은 가룟 유다까지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말하는 사랑은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사랑이 아닙니다. 동물도 사랑하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情(정)과 慾(욕)에 속한 것입니다. 정욕은 될지언정 예수님의 사랑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주님의 사랑은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복을 비는 것입니다. 『너는 나를 연고없이 미워하나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에게 사랑이 없습니다. 신앙의 뿌리는 있는 것 같으나 가장 중요한 사랑의 열매를 맺지 못한 상태입니다.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와 같습니다. 주님은 잎만 무성한 열매맺지 못한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 존재 가치를 인정할 수 없어서 저주하심으로 말라 없어지게 하셨습니다. 우리 신자들도 이 사랑의 열매를 맺지 못할 때 신자로서의 존재 가치를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는 似而非(사이비)한 사랑이 많습니다. 사랑인 것처럼 보이나 참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처음에는 사랑했습니다. 과거에는 그가 주님을 사랑했으나 그의 마지막인 현재에는 주님을 파는 것입니다. 그의 사랑은 과거의 죽은 사랑이었습니다. 한 상에서 먹는 자가 발뒤꿈치로 차는 것에 대하여 주님의 가슴은 견딜 수 없이 아프셨습니다. 처음은 사랑하나 끝에 가서 변질하는 사랑 아닌 사랑입니다. 뒤집지 못한 떡이요, 독소를 품은 甘酒(감주)와 같은 것입니다.
사이비한 사랑은 세상적 사랑입니다. 인간 실존은 불안이요, 고독이요, 절망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사랑의 갈증이 심합니다. 사랑은 인생을 좌우합니다. 사랑의 태양이 넘어가 버리면 인생은 허무한 대지와 같습니다. 사랑은 인생의 중심이요, 支柱(지주)와 같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사랑에 실패했을 때 모욕을 느낍니다. 쓸쓸합니다. 서운합니다. 쓰라립니다. 견딜 수 없습니다. 분합니다. 번민합니다. 자살합니다. 원한을 품습니다. 원수와 같이 봅니다. 멸망시켜야 속이 시원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까? 이것은 자기를 위한 정욕이요, 끝까지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은 자기를 사랑하는 욕심이 아닙니다. 사랑은 남을 위한 것입니다.
계모가 남편의 전처의 자식인 세 살된 딸을 내 딸처럼 사랑합니다. 그러나 자기 몸에서 딸을 낳았을 때 상황은 달라집니다. 자기 아이에 대한 사랑이 뜨거워지면서 의붓 자식은 미워집니다. 이쪽을 사랑하면 할수록 저쪽은 미워집니다. 이것이 세상적 사랑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심리요, 죄인의 마음입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고 정욕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마음은 씻어 내야 합니다. 예수께서 대야에 물을 떠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과 같이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우리의 더러워진 마음을 씻어 내야 합니다.
가룟 유다도 끝까지 사랑하신 피로!!
십자가에 못박는 자를 위하여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신 예수의 피로!!

제가 잘 아는 어느 여성도는 어느 청년과 열렬히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생리적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었습니다. 더구나 그 사랑하는 청년은 삼대 독자였습니다. 그래도 그녀는 그와 결혼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수 없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의 감정보다 이성이 앞서게 되고, 그녀의 욕심을 단호히 물리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국 사랑하는 그 청년은 다른 여자와 결혼하게 되었을 때, 그녀는 그 가정의 행복을 빌기 위해 결혼식장에서 결혼 행진곡을 쳐주게 되었습니다. 이때 그녀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녀의 가슴속에서는 남모르는 눈물이 흐르고 또 흘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못자국난 손이 그녀의 눈물을 씻어 주시는 것입니다.
당신은 마지막까지 과거를 걸어오고 믿어 왔지만 그 끝인 현재에 예수를 잘 믿으며 진정으로 사랑하십니까? 과거의 잘 믿은 것이 다 오늘 이 시간을 위하여 쌓아 온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은 최후를 보는 것입니다.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를 한 얘기는 새삼스런 얘기는 아닙니다. 토끼처럼 처음에는 잘하다가 잠을 자서는 안됩니다. 거북이처럼 끝까지 꾸준하게 걸어가는 자가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햄릿』은 부왕을 죽인 숙부 클로우디어스를 살해한 왕자였습니다. 숙부가 왕이 되었을 때 햄릿은 숙부를 죽일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숙부가 회개할 때 그는 죽이려고 하다가 중지하고 말았습니다.
『아! 나의 몹쓸 죄상, 그 악취가 하늘을 찌르는구나! 기도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심정을 어디에다 쏟을 것인가? 그러나 죄의 결과를 보존하면서 죄에서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 아! 처참한 이 꼴, 나의 가슴은 죽음처럼 꺼멓구나. 오! 천사들이여, 나를 도와주소서. 힘을 주소서. 이 완고한 무릎아 꾸부러 지려무나!』 비로소 자신의 죄상을 뉘우치듯 왕은 마루바닥에 엎드려 기도를 올렸다.
이때! 어머니의 방으로 건너가려던 햄릿은 왕의 뒷모습을 발견하자 제자리에 멈칫 섰다. 그리고는 단도를 손에 쥐며 한발 두발 가까이 갔다.
『기회는 바로 이때다. 지금은 손쉽게 해치울 수 있어. 하지만 그것도 생각할 문제로다. 저렇게 기도함으로써 영혼을 말갛게 씻은 지금 복수가 될 수 없다. 아니다! 칼이여 네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리고 좀더 무서운 기회를 기다리자. 』
죄악 가운데 살아왔던 숙부였지만 햄릿이 죽이려는 순간 그의 참회의 기도는 잠시 죽을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현재를 잘 믿어야 합니다. 과거에 아무리 잘 믿어도 현재 잘못 믿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잘 믿는다는 것은 사랑의 열매가 있는 신앙입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끝까지 사랑할 수 있도록 십자가에서 흐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나의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 정욕을 씻어 내는 이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베드로는 자신의 더러운 발을 주님이 씻게 할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씻지 아니하면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날마다 더럽혀진 몸과 마음을 주님 앞에 내놓고 씻음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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