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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성을 넘어서 (요 20:2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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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견해, 자기 의견에 대하여 재검토를 가해야 할 시대와 왔으며, 자기 입장만 세우다가는 뒤떨어지는 고물로 전락되고 마는 시대가 왔다고 봅니다.
그것의 한 모퉁이를 그림이나 음악에서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어떻게 보면 아이들의 낙서와도 같은 그림이 전람회에서 특선품이 되며, 팝송이나 재즈 같은 것이 현대인에게 대환영을 받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 곱게 실물을 사진 찍은 것 같이 그린다는 것에 비해 너무도 동떨어진 그림들이 오히려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개성에 따라, 자기 주관적으로 표현한 그림들이 자유스럽게 인정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제주의 시대에는 한 사람의 견해가 전체를 지배하고 그것이 그대로 시행되는 일이 있지만 그런 시대는 벌써 이 땅에서 여러사람을 위한 민주정치의 대적에 불과한 것입니다.
자기 견해, 자기 의견, 자기 주관은 자기 이성에 토대를 둔 것이요, 거기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근대에 와서는 이 인간의 이성을 절대시하는 경향이 강해지면서 인간주의 혹은 인본주의가 머리를 들게 되었으니, 이를 문예부흥 또는 불란서혁명 등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근대는 계시종교의 신, 자신의 이성을 자연의 신으로 대치하였습니다. 근대인은 생각하기를 근대과학의 위대한 발달을 전통적인 종교가 방해하며, 더욱이 기성종교와 인습적인 사회악 사이에는 역사적인 類緣關係(유연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감정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을 至上(지상)의 신으로 생각하는 사상은 합리주의를 낳고, 자연과도 결부되어 근대문화는 종교적 신조를 물리치고 행동의 원리로써 이성의 법칙이니 자연의 법칙이니 하며 구별 없이 그것만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사상은 전통적 종교와 열심 있는 신앙에 대하여 예리한 비평의 메스를 가했으며, 모든 사람이 가진 이성을 통하여 공통교육을 베풀어 그들에게 동일한 도덕을 가르치면 사회는 완전히 하나가 될 것이라고 믿어 왔던 것입니다.
이성주의 즉 인간주의는 그 목적을 실현하는데 완전히 실패하고 미래에 대한 절망적인 오산을 했던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을 본위로 하는 종교는 인간이 그 신조에 도전하기 전에 이미 역사적 현실이라는 심판 앞에 고발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주의가 열성있는 종교에 대하여 반기를 들었을 때 그 자신은 더 방탕한 분파적, 고도의 내적 열광주의에 빠지고 있던 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냉정하고 예리한 것 같으나 그 비평과 배타적 투쟁에 있어 얼마나 열성분자인지 모릅니다.
엘뵈시우스는 그의 저서 『정신론』에 있어 『여러분들은 연약한 여자와 순진한 어린이들의 가슴을 찌르려는 열심 있는 종교 비평의 칼을 사면에서 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성본위의 인간주의야말로 성경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예리성이라고 주장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 10:3을 보세요.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비기독교적 인간주의는 인간의 이성을 하나님으로서 신봉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성을 모든 특수적 가치의 기준이며 모든 도덕의 표준을 수립하는 보편적 가치를 가졌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제 합리주의적 인간주의의 중대한 과오는 이성이라는 것이 순전히 형식적 의의에서만 보편적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논리, 수학은 그 자체로써 보편적이라 할 수 있지만 그러나 논리적 형식이 사회에 있어 사실에 적용되었을 때 그 판단은 결코 보편적인 것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성 본위의 인간주의는 필연적으로 특수 판단을 보편적 판단으로 승인하고 그 부분적이고 유한된 思考推理(사고추리)를 보편적 표준이라고 갖다 맞추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선을 초월적 선, 즉 하나님의 선에 굴복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힘쓰게 하고 있는 것이며, 독단적 종교보다 더 방탕한 자기 본위라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모두 다 각자 각자의 얼굴이 다 다른 것과 같이 각각 그 이성을 통하여 생기는 주관이 각양 각색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이성을 신적 절대라고 믿는 것은 여러 갈래로 충돌하고 분열하고 파멸로 이르게 되고마는 것입니다.
이성지상주의자들은 성경에 『네가 똑똑한 것 같지만 내일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네 생명이 무엇이뇨. 너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야고보서 4:14)하는 말씀을 잘 납득해야 할 것이며,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를 지키리라』(빌립보서 4:7)의 말씀이라든가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이사야 55:8-9)의 말씀들을 잘 음미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보편적 표준은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하는 것이요, 성경의 전체적으로 떠오르는 진리와 교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음으로 의에 이르는 것이요, 자기의 의를 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자유와 예정은 모순되는 것 같지만 이것 때문에 두 유형의 신학이 있는 것이요, 체계있는 신학을 선택하여 자기의 신조를 삼으면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고차원의 세계에 이르러 그 모순된 것 같은 점과 역설적인 것이 다 해명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성을 본위로 하는 그 사람의 터전은 흔들려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31을 보세요.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더라』
기록된 바와 같이 이성 본위로 나가고자 하는 관념부터 흔들려야 하고 깨져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의 본위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열두 제자 중에 가장 이성본위의 인간주의자로 인정할 수 있는 자가 바로 『도마』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누구보다 똑똑한 실증주의자요, 과학적 증거를 토대로 하고야 믿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가 주를 보았다 하니 도마는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하였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본문 27절 이하를 보세요.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고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懷疑心(회의심)이 많은 도마는 겨우 믿게 되었으나 복된 믿음을 가져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데서 멀리 떨어진 상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현실에도 이성주의의 실증주의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져보고, 과학적으로 다루어 보기 전에는 믿지 않겠노라고 하며 믿지 않는 자가 많습니다. 『내세, 천국이 있단 말인가? 내가 죽어서 천국이 있다는 것이 확인되면 믿겠다』고 하는 지성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에 영적인 세계가 있음을 보고, 그 세계에서 깨닫고는 믿으려고 해도 그것은 이미 때가 늦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은 성경의 말씀을 듣고 믿느냐, 믿지 아니 하느냐로서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하는 자를 갈라놓는 것입니다.
골고다 언덕의 거센 바람도 다 사라지고 평화로운 봄동산에서 『마리아야』하는 주님의 따스한 음성을 듣고 주님을 반가와 하는 마리아! 주님과 마리아의 이 만남은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이 약동하는 봄의 찬가를 들읍시다. 평화롭고 보드라운 깃털같은 봄바람이 솔솔 불어오고, 따스한 햇볕이 번져 봉우리 봉우리마다 안개같은 아지랭이로 덮입니다. 남은 추위도 바다 갈매기의 머리 위로 날아가고, 사람들은 한 꺼풀씩 겨울 옷을 벗고, 산뜻한 새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젊은이들의 얼굴들은 훨씬 싱싱해졌습니다.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벗은 나무들도 토실토실한 햇눈을 내밀었습니다. 등걸과 줄거리의 피부로 원형질의 움직임이 시작되어 윤기나는 변화를 일으킵니다. 따스해진 연못 위로는 거위가 푸른 물결을 휘저으며, 양지 바른 둑으로 백조가 올라와 깃을 텁니다. 먼 산골로 가면 곧 뻐꾸기가 울 것이요, 강남 갔던 제비가 날아오는 것도 먼 날은 아닙니다. 어여쁜 풀꽃이 핀 둑이며, 채소밭에 나비가 날고 꽃을 찾는 부산한 벌들이 붕붕거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남해에서 상륙한 꽃소식은 잦은 걸음으로 산맥을 넘어 차츰 북상합니다. 개나리가 피고, 살구꽃, 복사꽃, 진달래꽃으로 분홍빛 물이 들고, 산야에는 온통 피어오르는 꽃구름, 꽃사태가 납니다.
우리는 한겨울과 긴 겨울잠 속에서 얼마나 봄을 기다렸습니까?봄은 생명의 계절입니다. 죽음의 잠을 자던 저 나무들이 새싹으로 살아남을 우리는 기다렸는데 봄과 같이 새싹은 과연 나왔고, 나무들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인생들이여! 겨울을 당한 죽음의 잠을 자는 인생들이 생명으로 깨어나는 그 봄날을 믿고 아는 자들은 복된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의 절망에서 다시 헤어날 수 없는 인생들을 위하여 생명의 출구를 뚫어 열어 놓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생의 최종 종말인 줄을 누구나 다 아는 죽음에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어 우주의 새 생명의 기원을 수립했던 것입니다. 아가서 2:1에서 『나는 샤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라고 하셨던 부활하신 주님께서 아가서 2:10이하에서 『내게 말하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냐.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성을 넘어서 순수한 믿음과 사랑으로 영혼의 봄동산에서 주님과 함께 사랑의 향연과 같은 생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봄이 올 때마다 부활에 대한 신앙과 부활의 주님에 대한 사랑을 더욱 견고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신자가 죽은 장례식에 참석할 때마다 부활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이 부활하시지 않고 저 죽은 사람이 부활하지 않는다면 이 장례식은 얼마나 답답하고 얼마나 슬프고 절망스럽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셨고, 지금도 살아 계시며 우리에게도 부활을 약속해 주셨기에 우리는 죽음 속에서도 답답함이나 절망감을 느끼지 않고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부활하신 주님과 누리는 영광은 너무도 귀하고 복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성을 넘어서 이 신비로운 생명의 靈體(영체)로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사랑의 靈交(영교)를 갖는 신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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