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신부 (요 03:27-30)

첨부 1


實存主義(실존주의)시대도 사라져 가고, 지금은 構造主義(구조주의)시대라고 말을 합니다. 구조주의란 내부요소를 상징화(symbolization)하고 조직(system)의 變異關係(변이관계)를 중요시한다는 다소 해석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思潮(사조)입니다. 직관적으로 볼 때 건설적이고 협력적인 관계를 통해 인간의 삶이 발전해 나간다는 맛을 풍깁니다.
象形文字(상형문자)인 한자의 『人』자를 보면 둘이서 서로 받쳐 주고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은 남녀가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돕고 살게 『結婚制度(결혼제도)』를 설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설립해 주신 제도이기에 신랑 신부는 희망적이며 희열이 넘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신랑과 신부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이에 세워진 여러가지의 관계를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5:22-25에 보면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것 같이하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신랑과 신부의 관계를 서로의 비유를 통하여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사야서 62:5에 보면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세례 요한을 좇던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좇게 되자 심기가 불편해져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라고 불만을 털어놓습니다. 여기에 대한 세례 요한의 답변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신부로, 그리고 자기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신랑을 만날 때에 기뻐하듯이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에 기뻐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신랑 되신 우리 주님께서도 우리를 보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1. 신랑과 신부의 관계는 깊은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먼저 아담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보시기에 좋지 않아서 그를 돕는 배필로 하와를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하와를 지으실 때 하나님께서는 아담으로 하여금 깊이 잠들게 하신 후에 그에게서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하와를 지으셨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아담은 하와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배필로 지어주신 신부 하와와 자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관계임을 선언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 원리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부부들이 이 원리를 무시하고 자기들 멋대로 떼었다 붙었다 하는 것을 볼 때, 매우 한탄스럽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랑과 신부는 인위적으로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신자들의 관계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옆구리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영적으로 깊은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여 신랑과 친구와의 관계는 신랑과 신부와의 관계와 비교할 때 비교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령 세 남녀가 서로 친구로서 사귀고 있었고 생각해 봅시다. 그런데 그 중에 한 남녀가 서로 사랑하게 되고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또 한 사람의 남자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결혼한 그들을 기쁨으로 축하해 주고 신부와의 관계를 조금은 멀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겠습니다. 친구가 결혼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신랑을 제쳐놓고 신부와 사귀려고 한다면 서로가 불행해 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신랑과 신부 사이에는 그 어떤 사람도 개입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가장 깊은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끔 이것을 바로 알지 못해서 시행착오를 범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봅니다.
세례 요한은 이것을 바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를 따르던 많은 무리들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제자들까지도 다 양보하고도 그의 마음 속에는 기쁨이 넘쳤던 것입니다.
본문 29-30절을 보십시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신랑과 신부의 사이가 이렇게 깊듯이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사이는 깊은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보혈의 피로 맺어진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피는 우정보다 깊습니다. 세례 요한과 무리들과의 관계는 우정의 관계이나 그리스도와 무리의 관계는 피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더 깊은 관계를 인정하고 그리스도께 무리들을 양보한 세례 요한의 처사는 너무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마태복음 11:11에서 주님은 세례 요한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여기 『천국에 있는 자』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귀하고 아름다운 관계가 많지만 그 어떤 관계도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와 비교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그리스도와 깊은 관계를 맺은 그리스도의 신부임을 명심하기를 바랍니다.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不可分離(불가분리)의 유기체적 관계임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2. 신부는 신랑을 중심으로 생활해야 합니다.
신부가 신랑을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시집 온 신부가 친정 생각만 하고 있고, 결혼 전에 사귀던 남자 친구를 만난다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신부는 두 가지 면에서 신랑을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1) 마음의 촛점이 신랑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이 남자도 생각할 수 있고, 저 남자도 생각할 수 있지만 일단 결혼한 다음에는 신랑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3:2에 보면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신부가 신랑만을 깊이 생각하듯이 예수 그리스도만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생활이 행복해집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는 돈 많은 부자가 아닙니다. 여러가지 명성을 날리며 명예를 얻은 자가 아닙니다. 많은 땅을 정복한 영웅도, 많은 권력을 거머쥔 권세가도 아닙니다. 그리고 누리고 싶은 쾌락과 향락을 마음껏 누리는 자도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은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은 이 세상에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는 사망을 이기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과 천국을 허락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며 사랑하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고 사랑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깊으신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주님을 깊이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신부는 신랑에 대한 정절이 있어야 합니다.
신부가 신랑에 대해서 가장 중요하게 간직할 것 중의 하나가 정절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가질 가장 중요한 자세도 정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4:4를 보면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결혼을 정죄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 혹은 『성도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인하여 구속함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은 끝까지 신앙의 정절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정절을 가장 잘 지킨 사람들은 순교자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가슴에 있기에 어떤 위협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배반할 수가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루마니아가 공산화될 때 어느 마을에 공산군들이 들어와 마을주민들을 모두 교회당에 몰아넣었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문만 열어 놓고 문 아래에는 예수님의 모습이 그려진 초상화를 놓고 순서대로 그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밟고 지나가도록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은 자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총부리를 들이댄 채 위협하였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발로 밟고 지나갑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대한 송구스런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소녀가 주님의 초상화를 집어들고 팔꿈치의 옷자락으로 침과 발자국을 얼룩진 주님의 얼굴을 깨끗이 닦았습니다. 그리고 그 초상화를 가슴에 끌어안은 채 공산군들의 총탄에 맞아 순교했다고 합니다.
초대교회의 위대한 교부였던 폴리갑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시 너무도 훌륭한 스승이었기에 그에게 사형을 집행하는 자 조차도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선생님, 딱 한번만 주님을 부인하십시오. 일단 사셔야 더욱 주님을 위해 일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하면서 한번만 주님을 부인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때 폴리갑은 『내가 팔십 평생을 살아오는 동안 주님은 한번도 나를 떠나지 아니 하셨고, 한번도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지 않으셨소. 그런데 이 늙은 것이 얼마나 더 살겠다고 주님을 부인할 수 있겠소』하면서 사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도 일제 당시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어떤 분은 『일단 살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살아서 더욱 주님을 위해 일해야지』하는 생각에서 딱 한번 눈을 감고 신사참배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해방 후에 옥에 갇혔던 분들이 나와서 교회를 재건하고 교회의 부흥운동에 힘쓸 때 그 목사님은 더 이상 양심에 걸려서 강단에 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사임하고 나환자촌에 들어가 속죄하는 마음으로 나환자들을 돌보며 그들에게 전도하며 살았는데도 죽는 순간까지도 주님에 대한 정절을 온전히 지키지 못한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에 대해 정절을 지키는 것은 이렇게 귀한 것입니다. 신부가 신랑에 대해 정절을 지키는 것이 가장 귀한 일이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랑되신 그리스도께 대한 가장 귀한 것은 신앙의 정절을 지키는 것임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