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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높은 보금자리 (요 03:2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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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일예배는 세 가지를 겸하여 드리고 있습니다. 첫째는 어머니주일이요 둘째는 야외예배로 드리며 셋째는 환영예배로 드리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육체는 교회당 내에 있지만 마음은 聖山(성산)에 오른 기분으로 이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산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핫틴산』에서는 산상수훈의 말씀을 베푸시고, 『헬몬산』에서는 놀랍게 변화된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부활의 영광을 보여주시고, 『겟세마네동산』에는 종종 가셔서 기도하셨으며 체포되기 전날밤에 간절히 기도하시던 산이었고, 『갈보리산』에서는 인류의 죄를 홀로 담당하셔서 십자가를 통해 인류구속의 사역을 완성하시고, 『감람산』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는데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능력있는 어느 부흥사가 말하기를 예수를 믿는 신자에게 있어서 뒷동산은 유일의 은혜받을 수 있는 보금자리라고 했습니다. 산에 올라간다는 것은 俗世(속세)를 탈피할 수 있고, 고상한 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독수리는 높은 공중으로 비상할 수 있고, 뾰족한 바위끝이나 험준한데 거합니다. 즉 深山幽谷(심산유곡)에 보금자리를 만듭니다.

인생도 그 마음이 지극히 높은 보좌에 계신 주님과 함께 있을 때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평안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1) 이 땅에서 도덕, 윤리, 계명이나 인간이 만든 종교를 가지고는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 밑바닥에 죄가 잠재해 있기에 심각한 고뇌와 절망에서 탈출구를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본주의적 제도와 律理(율리)의 권위자인 제사장과 율법사는 결국 사회를 구원한다는 것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습니다.
2) 현대의 데카다니즘이나 허무주의나 비트족과 같은 것은 다 이상의 형식윤리나 假面的(가면적) 종교의 外飾(외식)을 깨뜨려 버리고 껍질을 벗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컨대는 이중간첩 이수근의 가발을 벗기고 『假(가)』字의 冠(관)을 벗기는 것 같이 말입니다.
알버트 까뮈의 저서 『轉落(전락)』은 노벨 수상작인데 주인공이 자기 생활의 이면까지 낱낱이 고백하는 것으로 始終(시종)하고 있습니다.
이런 실존주의자들은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인이 되면 되는 것 같이 여기는데 무인도에서 성장한 인간은 더 악하게 되는 현실을 관찰할 때, 원죄의 씨가 인류의 조상 아담에게 깃들이고 유전하여 핏줄기를 타고 내려왔기 때문에 이것으로도 할 수 없는 비극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땅에는 이 평면상에는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평안히 쉬일 곳 아주 없네』의 찬송 그대로입니다. 그러므로 눈을 들라고 하였습니다. 평면상에 없음을 알았으면 찾을 곳은 수직상으로 저 높은 곳을 앙망할 것뿐입니다. 독수리처럼 우리 마음이 올라가야 합니다. 높은 산 꼭대기로 저 고차원의 좌표로 나아가야 합니다.
골로새서 3:1-2를 보세요.
『너는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 거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고차원의 성령이 육신이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 영적인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의 문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거듭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 문 외에는 영적인 생명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렘브란트가 1630년에 그린 『선지자 예레미야』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에 보면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시위대 뜰에 갇혀 고개를 한 손으로 고이고 앉아 있습니다. 절망의 그림자는 점점 짙어가는 것 같으나 드디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밝은 빛이 비쳐 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영적인 빛을 잘 나타낸 그림이라고 봅니다. 그 그림 속에는 한편으로는 무서운 절망이 나타나지만 또 한편으로는 무한한 생명의 빛이 깃들이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보금자리』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새의 보금자리는 어미새 없이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어미새는 보금자리인 둥지를 마련하고 그곳에 알을 까고 새끼를 키우는 것입니다. 인생은 이 땅의 보금자리로 『가정』을 가졌으며, 영적인 보금자리로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는 『교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5월 둘째 주일로 『어머니 주일』입니다. 미국의 서부에 있는 버지니아주의 안나라는 소녀가 주일학교 교사로 26년간 근속한 어머니의 돌아가신 추도일에 해당하는 주일에 교회의 어머니 신자들에게 카네이션을 달아 드린 것이 그 유래가 되었습니다.
그 후 1914년 미국의 국회에서 『어머니 주일』을 제정하게 되었습니다.
현대에 있어 조국은 무엇보다도 훌륭한 어머니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힐티는 『진실하고 뜻이 높은 어머니가 없이는 아무리 훌륭한 어린이 교육에 대한 프로그램을 가진다고 해도 구멍이 날 수 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곡선적인 온화하고도 우아한 미를 가졌으며, 장미 꽃밭에 놀던 아이로 자기도 모르게 잠들게 하는 고요한 선율의 자장가를 불러 주며, 달고도 부드러운 감각을 느끼게 하는가 하면, 얼어붙은 시내를 어느덧 녹아 흐르게 하는 봄바람 같은 暖風(난풍)을 가지고 있습니다.
5월은 미스코리아를 뽑는 등 여성미를 구가하는 달이요, 우리 교회에서도 『여전도의 달』입니다. 치마바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그리 좋은 의미로 쓰여진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왕에 치마바람을 불게 할 바에는 전도의 치마바람을 아주 세게, 보람있게 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왜 어머니주일은 있는데 아버지주일은 없느냐고 섭섭해 하시는 아버지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섭섭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어머니주일을 뺀 나머지 주일은 다 아버지주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전도는 연하고 친절해서 효과가 100%입니다. 여성의 온유와 겸손은 성경에 나타난 자랑할 만한 특징입니다. 이것을 상실치 않도록 하십시오.
마태복음 11:28에서 예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義(의)에 대해서는 아주 엄격한 면이 있지만 일면 母格(모격)인 온유한 면이 있음을 망각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12:19-20을 보십시오.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어린이가 어머니의 따뜻하고 풍만한 가슴을 귀한 온상으로 삼고 자라나는 것 같이 인간의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에서 어린이가 젖을 취하는 것과 같이 말씀의 젖을 듣고 나의 것으로 하며, 어머니에게 말을 배우는 것과 같이 주님 앞에 기도를 하게 되며, 부모님의 정신을 이어받는 것과 같이 주님의 보혈을 믿음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자라면 걷고, 쉬운 일도 하는 것 같이 신자도 스스로 성경에서 진리를 깨닫고 전도도 하는 것입니다.
챨스 크라우가 『자신과 자립의 정신이 강한 위인의 배후에는 그를 밀어주고 인도해 준 어머니들이 있었다』고 한 말과 같이 굳게 믿음 위에 선 성도들의 배후에는 보이지 않는 주님의 인도하는 손이 있어서 붙들어 준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16에 보면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라고 하였고, 20절에 보면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즉 주님은 일곱 교회(이것은 모든 교회를 의미함)에 다니시며 그 교회에 있는 주의 종들을 그의 손에 붙들고 계십니다.
엄밀히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혜사 성령님의 오른손입니다.
『보혜사』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라크레토스』인데 이 말은 『옆에 계셔서 항상 같이하여 주시고 돌봐 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 성령님이야말로 항상 같이하시고 우리 속에 계셔서 우리를 돌보시는 이 땅의 어머니 이상으로 잘 돌봐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해 주시고, 우리의 머리카락도 헤아리시며 걱정과 근심의 큰 것이나 작은 것에 대해서도 세심히 상담자가 되어 주시며, 집에 있을 때나 밖에 나갈 때나 버스에서나 직장에서나 집안에서나 산에서나 들에서나 화장실에까지도 같이 하여 주시고 돌보아 주십니다. 정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신 주님은 보혜사 성령, 즉 어머니 이상의 파라크레토스를 보내어 주셨습니다.
R. A. 토레이 목사님이 부흥회를 인도할 때 세 자녀를 둔 한 과부가 상담을 요청해 왔습니다.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어린 세 자녀를 둔 이 여인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토레이 목사님은 그 여인에게 『당신 남편은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분을 당신에게 소개하겠습니다. 』하면서 그녀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했다고 합니다.
『예수를 잘 믿는 자에게 보내주시는 남편 이상의, 어머니 이상의 보혜사 성령님을 마음의 중심에 잘 모시고, 그분에게 맡기고, 그가 인도하는 대로 은혜롭게 착실하게 신앙생활을 잘하십시오』
수년 후에 토레이 목사님은 다시 그 도시에 대부흥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곳에서 아주 옷을 단정히 입고 얼굴에 평화가 넘치는 정숙한 부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로 수년 전에 탄식하며 상담을 요청해 왔던 그 부인이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를 묻자 목사님의 말씀대로 보혜사 성령님을 믿고, 성령님과 함께 동행하게 된 이후로 자신의 삶이 놀랍게 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본문 30절에 보면 『그 새끼들도 피를 빠나니 살륙당한 자 있는 곳에는 그것도 거기 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살륙당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고 사는 성도들을 『그 새끼』로 비유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께서는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품음과 같이 품어 주시고, 독수리가 그 새끼들을 지키듯이 우리와 함께 하고 돌봐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어머니주일을 맞이하여 고차원의 영계에 예수 그리스도의 문을 통하여 들어가 이 땅에서 해결할 수 없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참 어머니 중에서도 완전한 어머니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의 품속에 깊이 안기고 그 인격을 의심없이 믿고 새롭고 더 은혜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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