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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혼자 산으로 (요 0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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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시온정권수립』의 신앙은 부동의 태세이며, 경제력과 군사력의 실력을 갖춘 이스라엘 나라는 창세기 27:28-29에 보면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고 한 시온의 영광의 꿈이 실현되리라 하여 더 굳은 신앙으로 나아 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수상 에슈콜이 사망한 후 한 때 이 틈을 타서 아랍나라들이 기회를 잃지 않는 일격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陳頭指揮(진두지휘)한 시온주의 운동의 지도자인 메이어 여사가 수상으로 앉게 되므로, 여자로서 약한 것 같으나 더 강하여 이스라엘이 시온에 정권을 세우고 천하를 통치할 것을 믿고 주변의 적국에 도전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막스 노던의 말과 같이 경제부흥으로 그리고 무력으로 이스라엘의 회복이 올 줄 알며, 이것을 잘 구사하는 『메시야』가 출현할 것을 고대하는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을 우리는 지적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시온주의는 현실세계에서 더 고차원의 단계에서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저들은 모르는 것입니다.
경제부흥과 폭력혁명이 아니요, 희생정신과 영적 혁명으로 말미암아 영적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있으며 이 과정을 거쳐 그 종말에는 구체적으로 지상천국(참 이스라엘의 회복)이 수립됨을 저들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현재 이스라엘은 구약성경의 약속이 더 높은 신약성경으로 성취되고 있음을 모르며, 구약의 촛점이 되는 메시야가 신약의 예수그리스도로 성취된 것을 알지 못하며, 자기들의 완고하고 독선적인 것이 순종과 박애주의 실천에 비해 얼마나 부끄러운 저속급의 사상임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유대민족은 계속해서 메시야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때는 주후 35년경에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으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장정만 오천 명을 먹이시고, 남은 것만도 열두 광주리 가득찬 기적을 일으켜 주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無에서 有를 창조한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주렸던 백성들은 그들에게 음식의 만족을 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그들의 왕으로 삼으려 함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백성들이 구름떼와 같이 자기에게 몰려오는 것을 볼 때, 이 세상에서의 영화를 누린 문이 환하게 열리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허락하기만 하면 왕관과 영예, 그리고 세상의 부귀와 복락이 저에게 굴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혼자 산으로 떠나가셨습니다. 혼자 산으로!! 이 산으로 올라가시는 발걸음은 결국 갈보리산으로 옮겨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영화냐? 십자가의 고난이냐?
종교의 깊은 명맥은 고난을 택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고려시대의 불교와 이조시대의 유교가 국가민족에 여하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다양성이라 할지라도 대국적으로 보아서, 우리나라로 하여금 그후 세계적 수준으로 비추어, 국가 자체로서의 엄밀한 검토를 가해보나, 퇴화의 결과를 초래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조를 예로 고찰해 볼 때, 이조사회는 儒敎(유교)도, 즉 儒生(유생)들이 勢道(세도)를 얻고 향락을 누리고자 급급했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정치의 문을 통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儒學(유학)은 모든 정치 문화 경제 일반의 여왕격이되고 말았으며, 한문으로 글줄이나 쓸 줄 알면 모든 정치를 할 수 있었으니 이 미숙한 정치적 지식의 盜用(도용)은 儒林(유림)들의 세상 榮華(영화)를 享有(향유)함이 그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이조의 정치체제는 유교적인 사고양식으로 채색되었다면, 이 시대의 백성들의 생활양식은 철두철미하게 巫俗思想(무속사상), 즉 샤마니즘적인 것으로 일관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저주의 요소가 숨어있는 것입니다. 이 결과 四色黨爭(사색당쟁)을 낳게 되었고, 결국은 망국의 운명을 초래케 했으며, 倭政(왜정)의 착취와 유린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5:13-15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참 종교인은 그 시대에 있어 그 사회에 먼저 소금이 되어서 명예와 향락을 희생하고 滅死友愛(멸사우애)하는 도의 진수를 밟아 나아가므로, 그리하여 하나님이 높이심으로 다음 단계인 세상의 빛이 되어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입니다.
소금이 먼저 되세요! 끓는 국속에 들어가서 자기는 녹아지고 사라지나 국을 맛있게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즉 사회를 빛내는 존재, 이것이 참 종교인이요, 참 크리스챤이 되는 것입니다.
막스 웨버가 『서구의 여러 나라들이 오늘의 흥왕을 이룩하게 된 것은 그들이 금욕주의적인 신앙생활을 당위한데 근거를 둔다』고 주장한 것을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체의 건강을 해치는 苦行難行(고행난행)은 우리가 피할 것이로되 인간의 盲目意志(맹목의지)와 노력에 대한 허영심을 배제하는 금욕주의는 귀중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자기 목숨을 얻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는 역설적인 진리를 말씀하셨는데, 『자기를 위하여 향락을 구하는 자는 고난을 면치 못할 것이요, 주를 위하여 고난을 구하는 자는 희열을 얻을 것이라』는 哲理(철리)가 여기서 파생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번 고난주일을 맞이하여 고난을 도피하여 일시적인 안일을 취할 것이 아니라 고난의 중심을 향하여 참고 견디며 무시로 나아가므로 인내를 얻고 연단을 나의 것으로 하며 소망과 사랑과 기쁨을 쟁취하는 귀한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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