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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예루살렘 (계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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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천국이라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본향의 특성 네 가지를 앞 과에서 다루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한 나라, 하 나님의 빛이 충만한 나라,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했던 모든 아 름다움이 그대로 보존되는 나라, 그러나 세상의 모든 죄된 것은 결코 용납되지 않는 나라라는 것이었습니다.

22장에서 사도 요한은 거룩한 나라의 특성을 세 가지 더 첨가해 서 설명합니다.

 생명수의 강이 있는 나라

어떤 성경학자는 생명수의 강(1절)이라는 말을 생명을 주는 강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 강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났다고 했습니다(1절). 이 생명수의 강이 생명을 주는 강이라 면, 이 강의 원천은 다시 말해 생명의 원천인 셈입니다. 이 거 룩한 성의 넉넉한 생명의 원천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신 것입니다.

 길 가운데로 흐르는(2절) 생명수의 강은 넘치도록 풍성한 생 명에 대한 하나의 상징입니다. 천국에 생명수의 강이 있다고 문자 그대로 생각해도 좋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이 생명수의 강이라는 이미지를 통해서 사도 요한이 설명하고 싶어하는 마지막 나라의 모습은 주님의 넘치는 생명이 있는 나라입니다. 생명 수의 강은 생명의 근원인 그리스도이십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생명 이 풍성한 곳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내 가 내 양으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 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던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질적으로 새로 운 생명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이 새 생명을 맛보는 것으 로만 만족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풍성한 생명 가운데 살 것을 기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로 더욱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 십니다.

 천국은 풍성한 생명이 넘치도록 가득한 나라입니다. 어떤 성경학자 는 생수의 강이 풍성한 생명보다는 성령님의 임재를 뜻한다고 했습니다. 풍성한 생명이 바로 성령님 자신의 임재를 말한다는 것 입니다. 그것도 일리는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주님에게서 흘러나 오는 생명을 생수의 강으로 상징하면서 그것을 성령님의 임재로 설 명한 대목이 더러 있기 때문입니다.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 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7:37-39).

주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바로 그 성령님의 임재를 생수의 강이라 한 것입니다. 물론 성령님은 이 땅에서도 임재하시지만 천국에 가면 죄나 어두움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넘치는 강과도 같이 충만하게 임재하실 것입니다. 생 명수의 강이 흐르는 그 나라를 사모합니까?

생명나무가 있는 나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 라(2절).

생명나무는 한 그루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생명나무마다 열두 가지 실과가 맺힙니다. 보통 나무들 에는 한 가지 실과가 맺히지만 이 나무들은 한 나무에서 열두 가 지 실과가 맺힙니다.

저는 이것도 상징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상징이 의미하는 실재( reality)는 이보다 훨씬 더 영광스러울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나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많이 나오는 1 2라는 숫자가 항상 대표 개념을 가지고 있듯이 여기서도 꼭 열두 가지 실과만 맺힌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상상 할 수 없는 온갖 아름다운 열매로 가득 찬 나라입니다.

 그러면 이 생명나무가 보여 주는 진정한 실재는 무엇일까요? 에덴 동산에도 생명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한 후에 생 명나무로 나아가는 길이 차단되었습니다. 천사가 지켜 서서 사람들 이 그리로 나아오는 것을 막았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 인간은 죽음과 부패를 맛보아야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생명나무를 단 순히 나무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죄와 죽음과 부패를 극복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죄 때문에 죽음이 왔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죄가 극복되어 다 시는 죽음이 없습니다. 죽음이 허락될 수 없는 나라입니다. 죽음 의 상징들인 부패나 저주가 허용되지 않는 나라입니다. 생명수의 강이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이 넘쳐나는 상태를 의미한다면, 생 명나무는 소극적으로 생명을 방해하는 세력들인 저주나 부패 같은 것을 막을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나무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2절)고 한 것입니다. 소성이라는 말은 본래 치료한다는 뜻입니다.

저주나 부패를 치료하고 예방하는 능력이 있는 생명나무 때문에 천 국에는 부패와 저주가 없습니다. 천국은 사람들이 온전한 건강함을 누리며 살 수 있는 나라입니다.

 다시는 저주가 없으며(3절).

창세기에 보면 죄가 저주와 부패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 로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생명나무가 이 모든 어두움들을 막아 냅니다. 천국은 생명이 넘쳐 나는 곳일 뿐만 아 니라 생명을 방해하는 모든 세력들의 출입이 차단되는 나라입니다.

다시는 부패할 수 없는, 다시는 저주가 침범할 수 없는 그런 영광스러운 나라가 천국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싶어합니다.

 천국은 창세기의 범죄와 저주가 해결된 나라입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낙원을 잃어버렸지만 결국 낙원을 다시 찾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되찾게 될 그 낙원은 에덴 동산에 있었던 낙원 이상일 것입니다. 우리는 잃었던 낙원을 단순히 회복한 정도가 아니라 에덴의 영광을 뛰어넘는 완성된 나라를 갖게 될 것입니다.

 섬김으로 왕 노릇 하는 나라

첫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수종 들게 될 나라입니다.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 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3절).

천국은 하나님의 종들이 그분을 영원토록 섬기며 그분의 뜻을 부지 런히 수종 드는 나라입니다. 저는 천국에도 노동이 있다고 생각합 니다. 그 노동은 즐거운 노동일 것입니다. 저는 거기에서 하나님 의 심부름을 하면서 영원을 즐길 것입니다.

창세기를 연구해 보면 타락 전에도 노동이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 와는 에덴 동산을 지키고 경작하는 일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타락의 결과로서 노동이 생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노동 은 타락 전에도 있었습니다. 타락 때문에 달라진 것은 즐거워야할 노동이 지겹게 여겨지게 된 것입니다. 일하는 것이 지겹다고 느 껴질 때는 그것을 타락의 결과라고 생각하십시오.

 둘째로, 하나님과 영광스러운 교제를 나눌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4절).

천국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뵙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지상 에서는 누릴 수 없었던 특권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모세도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하고 그분의 등만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영광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영광 중에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 와 완벽한 접촉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날이 오면 우리는 얼굴과 얼굴을 보는 것같이 주님을 볼 것입니다. 특별히 성자 하 나님이신 예수님의 얼굴을 뵙게 될 것입니다. 그분의 심부름을 할 뿐만 아니라 그분과 앉아서 직접 교제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가슴 뛰는 일 아닙니까?

때때로 복음서에 나타난 주님의 제자들이 부럽지 않습니까? 주님과 앉아서 그분에게서 직접 하늘 나라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가 궁 금해 하던 것들의 대답을 듣고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에 게는 신앙에 대한 문제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에게도 풀지 못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주님과 상담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 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 오니(시 84:10)라고 고백했습니다. 얼마나 주님과의 교제가 좋았으면 그런 고백을 했겠습니까?

천국은 하나님과 직접 교제할 수 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에서도 주님과 교제하며 살고 있기는 하지만 그 교제는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교제입니다. 온전하지 못한 교제입니다. 그러나 천국에 서 우리는 그 모든 인간의 불완전성이 극복된 가운데, 주님의 은 혜로 온전케 된 상태로, 영광 중에 계신 주님과 영원히 교제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을 맡아 관리할 나라입니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5절).

 천국은 섬김으로 왕 노릇 하는 나라입니다. 섬기는 사람은 종입니 다. 그런데 우리는 종이면서 왕입니다. 이것은 역설이지만 둘 다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도 섬기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여 전히 왕이십니다. 우리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수종 들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수종 드는 우리에게 왕 노릇 하는 특권을 세세토록 허락하실 것입니다.

당신의 자아상을 바꾸십시오. 이 말씀이 사실이라면, 성경을 하나 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한 날에 왕 노릇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째째하게 삽니까? 왜 축 처져서 삽니까? 아직 등극은 안 했지만 다 왕입니다. 어떻 게 왕 노릇 할지에 대해서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스펄전은 요한계시록을 강해하면서 계속 이렇게 강조합니다.

(천국을) 보여 줄 듯 말 듯 하면서 더 이상 보여 주지 않는 이유는 그날 거기에 도착할 때 그 나라가 진정 우리에게 써프라 이즈 패키지(surprise package, 가 되게 하기 위해 서이다.

우리가 생일 잔치도 서프라이즈 파티(surprise party:주빈에게는 알리지 않고 몰래 준비하여 깜짝 놀라게 하는 파티)를 많이 하지 않습니까? 미리 알려 주면 재미가 없습니다. 어떻게 왕 노릇 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좌우지간 왕 노릇 하리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믿습니까?

그런데 사실 성경에 이에 대한 암시가 조금씩 나와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누가복음 19장의 므나 비유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의 재림과 분명한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므나를 가 지고 열심히 장사해서, 청지기의 역할과 사명을 잘 감당하라는 것 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결과가 어떻습니까?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 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눅 19:17).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한다는 것은 열 개 지역을 관할하는 도지사쯤 됩니다. 물론 비유이긴 하지만 저는 여기에서도 천국의 영광에 대해 시사하는 바를 찾을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천국에는 노동 뿐만 아니라 정치도 있을 것입니다. 왕 노릇이 라는 말 자체가 정치 아닙니까? 주님이 만왕의 왕이고 그분을 섬 기는 우리는 작은 왕들입니다.

이 세상의 정치가 왜 그렇게 치사합니까? 파고들어가면 결국 인간 의 부패성, 그 죄 때문임을 알게 됩니다. 아무리 공명 선거를 해도 인간이 본질적으로 부패했기에 어둠은 여전할 것입니다. 그러 나 인간의 모든 죄가 극복된, 구속이 완성된 영광스러운 그 나라에서 왕 노릇 할 그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가 세 세토록 왕 노릇 할 것입니다. 그 나라의 주인이 될 것을 믿습니 까?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평화가 생명수처럼 흐르는 그 나라에 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소망하기 바랍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은 거룩한 성의 비전을 보여 주면서 그 나라 에 들어오도록 주께서 우리를 초청하시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누 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가 있을까요? 두 종류의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첫째/죄사함 받은 자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14절).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을 다른 말로 바꾸면 죄 사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분의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함을 얻고 자기 두루마기를 빤 사람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운 피조물이 된 사람들, 그들은 천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습니다.

그러나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들은 천국에 절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 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15절).

 둘째/원하는 자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17절).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한 생명을 체험하고 생명수를 마시고자 하는 사람들은 원하기만 하면 됩니다. 사람들이 천국에 가지 못하는 이 유는 간단합니다. 원하지 않아서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않 는 이유도 믿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예수님을 알고 싶습니까? 말씀을 보십시오. 성경이 그리스도를 증 거합니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도다(40절).

사람들은 주님 앞에 오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영생을 얻지 못합 니다. 사람들은 이 땅의 죄악을 즐기기를 원하고, 희망 없는 이 세상에 자신의 모든 소망을 걸기를 원합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 하여 영원하고 거룩한 영광의 나라를 기업으로, 선물로 주시고자 예비해 두셨는데 사람들은 원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천국을 소유할 수 있을까요? 원하기만 하면 됩니다. 사실 우리가 돈 주고 살 수 있는 것은 별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가 장 귀한 것, 가장 고상한 것, 가장 영광스러운 것은 값이 없습 니다. 어머니의 사랑, 친구와의 우정, 고귀한 희생의 가치 같은 것은 다 값없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가장 놀라운 것, 가장 위대한 것, 가장 영광스러운 천국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런데 인 간은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천국의 비전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천당을 믿으면 잘못 믿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 세상 역사에 관심을 갖지 않고 자꾸 타계 신앙을 강 조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합니다. 저는 그 반대로 생각합니다. 진 정한 타계 신앙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가장 힘 있게 강하 게 삽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예비하신 그 영광스러운 천국이 있 는 것을 참으로 믿으면 이 세상에서 치사하게 살 필요가 없습니다 . 욕심 부릴 필요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정직하지 못하고 욕심을 부리며 타협하면서 깨끗하지 못하게 사는 이유가 무 엇인지 압니까? 그것은 천국의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에게 는 천국의 소망이 있습니까? 성경이 보여 주는 마지막 소망, 이 소망이 당신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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