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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룩 (레 11:4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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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은 구약성경 레위기에 130회가 나오고 관련 구절이 185곳이나 있다. 그만큼 하나님께 드려는 삶에서 중요한 말이다.

최근들어 교회가 세상에서 나쁜 평반을 받고 있다. 예전에는 적어도 불신자들에게는 “교회나 신자는 정직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욕을 먹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교인들이 더 독해”라는 말도 들려온다. 그만큼 성도들의 생활과 교회의 도덕성이 세상이 보기에 거룩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거룩함을 보여줄 수 있을까

먼저 거룩함의 뜻을 바로 깨달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거룩하다’는 것을 교양있는 살고, 다른 사람들에게 선행의 모범을 보여주며 사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담배를 아피고, 술을 안먹고, 도박을 하지 않고, 영화관에 안 가는 것이 거룩한 생활이라고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거룩’이란 이런 표면적인 것이 절대아니다. 본래 거룩함이란 히브리어는 ‘코데스’라는 말이고, 헬라어는 ‘하기오수네’라는 말이다. “분리하다. 갈라놓다”는 뜻이다.

이 거룩함은 원래 하나님의 속성이다. 오직 하나님 한 분외에는 거룩한 사람이 없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속성인 거룩함을 인간에게 주셨다. 바로 하나님의 형상인 것이다. 문제는 이 거룩함이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다 상실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타락해도 동물과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인간만이 타락하고 인간만이 거룩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네 개가 타락해서 아무데나 똥싸고, 오줌을 누고, 아무데서나 암내를 내고 다닌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 말을 있을 수가 없다. 원래 개는 속성이 그런 것이지 타락해서 그런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그런 행동을 하면 타락해서 그러는 것이고 그럴때만 ‘타락’이라는 말을 쓴다.

 보통 거룩함이란 두가지 다른 뜻으로 우리에게 전해진다.

① 일반적인 뜻으로 (윤리적 개념) 예를 들어 공자, 석가, 소크라테스 같은 분을 성자라고 부른다. 현대에는 슈바이처, 테레사수녀 같은 분이 성자라고 불리운다. 이 때 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윤리적으로 위대한 삶을 살아간 사람이라는 것이다. 누구나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만 아무나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 개념을 우리는 소홀히 여겨서는 안된다.

 ② 성경에서 말하는 뜻으로(종교적) ‘거룩하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자는 것이다.

요17:16-17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즉 성도는 윤리적으로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오늘 성도된 우리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성도는 ‘세상에서 구별된 하나님의 자녀’이다.

 교회는 거룩해야 한다.

예배드리는 곳을 성전이라고 하는 이유는 교회가 예배드리는 장소로 세상과 구별되었다는 말이다. 요즈음 교회가 거룩하지 않다는 말을 듣는다. 그것은 바로 교회의 모든 구성요소가 거룩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가장 중요한 구성자인 ‘성도’가 거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교회는 거룩하지 않다. 그래서 성도 자신의 세속적이고, 추악한 모습을 발견하고 본래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

교회가 거룩하지 않다는 말속에는 교회에 세상의 방법들과 세상의 사상이 들어와서 세상과 구별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특별히 교회의 물질주의가 만연해지고 있다. 더이산 교회는 사명을 감당하지 아니하고 5B에만 관심이 있다. 5B는 building(건물확장), budget(예산확장), baptism (교인숫자증가), bus(교회차량), burial place(교회묘지)를 말한다.

또 세상의 변덕스러운 유행에 너무 민감하게 움직이고 있다. 예배의 의식이니 행사들이 하나님 없이 자기들끼리만 하는 경향이 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이기주의가 교회에 팽배해져가고 있다. 그것은 ‘무관심’으로 나타난다. 죽어가는 영혼에 대한 무관심, 가난한 자에 대한 무관심, 자앵자에 대한 무관심,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에 대한 무관심이 교회안에까지 들어왔다.

 성도들이 거룩해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매와 독수리의 전문 연구가인 부로프 박사가 아주 이색적인 말을 했다.

“매와 독수리가 하늘을 날고 있을 때 때때로 까마귀와 딱새의 공격을 받는 경우가 있다. 물론 매와 독수리는 그런 새들의 공격에 반격할 충분한 힘을 지니고 있어서 반격하여 물리칠 수 있다. 그러나 매와 독수리는 그렇지 않고 한차원 더 높이 올라간다. 점점 원을 크게 그리며 높이 높이 올라간다. 그러면 까마귀와 닥새들은 더 이상 매와 독수리를 괴롭히지 못하고 제풀에 지쳐서 떨어져 물러간다” 이것이 성도들의 영적인 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오늘 우리의 시대를 관찰해보자. 교회 주위에 얼마나 많은 참새들이 날아들고 있는가 그 참새들이 조잘거리며, 짹짹거릴 때, 우리 성도들은 참새와 같지 않기 위하여 매처럼 하늘 높이 올라가야 한다.

우리 속담에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는 시조가 있다. 까마귀 노는 것에 가면 백로가 더러워지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신자가 구별돼애하는 이유다.

레11장은 음식에 관한 법을 말하고 있는데 11:44-45에서 왜 거룩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찌니라“(레11:45) “너희는 내게 거룩할 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만민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레20:26)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소유로 구별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의 조건(자격)은 바로 거룩이다. 세상과 구별되는 것이다.

신약의 레위기라 불리는 히브리서 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느니라” 바로 이것이 신자가 거룩해야 할 이유다.

 어떻게 거룩해 지는가 물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거룩해질 수 있다. 예수의 구속의 보혈을 믿고 의지하는 자는 누구든지 깨끗함을 입는다. 여기에서는 십자가의 보혈을 믿고 거룩한 성도가 어떤 거룩한 삶을 살것인가 생각하고자 한다.

① 세례와 주일성수를 통하여 거룩해질 수 있다.-시간을 거룩하게 구약시대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구별되기 위해서 난지 8만에 할례를 받았다. 할례는 거룩한 백성이라는 육체의 표식인 것이다.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때에는 유대인들을 구별하여 잡기 위하여 남자들의 옷을 벗겨 할례를 행하였는지 확인하고 유대인들을 구별하였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와서는 할례대신 세례로 기독교인을 구별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셨으며,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정식으로 기독교 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었다. 세례는 이제부터 나는 죽고 예수가 내 주인으로 산다는 믿음의 고백이다.

 다음으로 유대인들이 선민으로 구별된 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날을 쉬신 이후로 유대인들은 지금까지 안식일을 철저히 쉬고 있다. 어느 나라에 있던지 무슨 일을 하든지 전통적인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철저히 지킨다.

신약시대는 주일을 지키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이날은 단순히 예배드리는 것 이상으로 세상과 구별하여 지켜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산으로 들로 놀러 다닐 때, 열심히 땀흘려 일할 때 신자들은 성전에 모여 예배드림으로 자신을 세상과 구별하였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로 성도가 세상과 구별되는 것이다. 주일성수는 성도의 기본적인 의무이다.

 ② 윤리적 정결을 통하여 거룩하여 질 수 있다.-삶을 거룩하게 구약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음식에 대한 규례를 찾아볼 수 있다. 레11장은 짐승들에 대하여 아주 자세하게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세김질을 하고 굽이 갈라진 동물만 먹으라고 하였다. 그래서 새김질하지 않는 돼지고기는 먹어서는 안된다. 또 물고기는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어야 먹을 수 있다. 그러므로 뱀장어, 가재, 새우, 족류는 먹어서는 안된다.

이런 규정을 통하여 의식적정결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넘어가면 의식적 정결이 아니라 윤리적 정결을 강조하고 있다. 행15:20에 보면 세가지를 피하고 다 먹어도 된다고 한다. 우상의 재물, 피, 목메인것 외에는 다 먹어도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구적인 규정이 아니고 잠정적인 규정으로 구우너에 절대 필요한 진리가 아니라 성도로서의 삶을 구별되게 살으라는 것이다.

 교통위반 밥먹듯이, 남을 속이기를 밥먹듯이 다른 사람 흉보는데 가장 신나하는 사람들.

부정비리에 포함된 많은 기독교인들

③ 방종한 식욕을 버림으로써 거룩해 질 수 있다.-몸을 거룩하게 성경에는 먹는 것과 죄가 연결될 수 있음을 여러차례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의 최초의 범죄는 선악과를 따먹는데서 시작되었다. 노아의 시대의 타락상을 성경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라고 하였다(눅17:27). 즉 식욕의 방종이 정욕의 방종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경고하실 때 눅 17:28-29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유황이 비 오듯 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어리석은 부자의 말에도 눅12: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이와같이 식욕은 우리를 죄로 이끌 수 있는 육체의 정욕이다.

벧전 2: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내 몸을 쳐 복종케한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죄를 짓지 않기 위한 바울의 몸부림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방종한 식욕을 버려야 합니다. 방종한 식욕은 감각을 마비시키고, 두뇌를 둔하게 하고, 생활을 무기력하게 하고, 영력을 약화하여 진리 앞에 잠자게 만듭니다.

과식을 하지말것, 단순한 식사, 절제있는 식사, 규칙적인 식사를 해야 합니다.

④ 물질로 구별되어야 한다. 물질을 거룩하게 성도의 거룩한 삶은 물질과 연관이 있다. 예수님은 그의 생애에서 끊임없이 성도와 물질과의 바른 관계를 맺을 것을 말씀하셨다. 세상의 사람들은 물질의 종이 되어 살아가지만 성도는 물질을 다스리는 청지기로서 살아가야 한다.

 물질로 구별된다는 것은 십일조의 삶을 말한다.

십일조는 우리의 소득은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전부를 요구하지 않으시고 1/10을 요구하셨다. 이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삶이다. 내가 수고하고 내가 땀흘려서 된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자세가 다른 것이다.

 뿐만아니라 내가 가진 물질로 다른 사람을 도우므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

우리가 잘알고 있는 동방박사이야기에 더하여서 전해지는 전설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카스팔, 멜키오르, 발더자르라는 세명의 박사외에 또 하나의 박사가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이름은 아르타반인데 사실은 이 네명이 함께 아기 예수를 만나러가려고 약속을 했는데 아르타반이 늦는 바람에 만나지 못서 세병만 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아르타반이 오는 길에 매에 맞아 죽어가는 사람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준비한 사파이어를 팔아 치료해 주느라고 늦었다. 뒤늦게 아기 예수를 찾아 나섰지만 베들레헴에 같을 때는 이미 요셉과 마리아와 아기 예수는 애굽으로 피신한 뒤였다.

그때는 마침 베들레헴에 헤롯의 군대에 의하여 아이들이 죽임을 당하고 있었을 때였다. 한 어린아이를 죽이려는 군인에게 자기가 준비한 두번째 선물인 루비를 뇌물로 주고 아이를 살려주었다.

그는 계속하여 주님을 찾아다녔다. 어찌된 일인지 주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가면 매번 주님은 떠나고 헛탕만 치고 말았다. 그렇게 33년을 헤메던 어느날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된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리로 달려가던 중에 어린 소년이 노예로 붙들려가면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아르타반은 자기손에 마지막 남아 있는 진주를 주고 소년을 사서 자유를 주었다. 바로 그 순간 지진이 나면서 아르타반은 정신을 잃고 말았다. 아르타반은 그 와중에 기도하기를 ‘저는 주님께 선물을 드리기 위해 33년을 헤멧지만 아무것도 드리지 못하고 이렇게 빈손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저 멀리에서 속삭이듯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아니다. 너는 나에게서 가장 큰 선물을 하였느니라. 여기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 . 나는 너에게서 가장 큰 선물을 받았느니라’ 는 음성이었다.

성도의 가장 거룩한 삶의 비결은 가장 귀한 것을 남을 위해 쓰는 것이다.

주는 것만큼 주님은 기뻐하신다.

 성도는 하나님게 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거룩해야 한다. 구별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불신자들과 분명히 구별되어야 하는데 시간을 구별하고, 삶을 구별하고, 몸을 구별하고, 물질을 구별하여 (주일성수에서 부터 시작하여, 윤리적으로 정결하며, 정욕을 이기고, 나의 것을 나누어주므로 구별되어지고) 날마다 말씀을 상고하고, 기도에 힘써서 주님과 동행하므로 구별된 생활을 할 수 있다. 물론 성령충만 해야 이 모든 일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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