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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믿음을 어디에 두었느냐? (눅 08: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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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시고 갈릴리 호숫가에 나가셨습니다. 날씨가 좋았습니다. 햇빛은 쨍쨍하고 파도는 잠잠하고 조용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다 건너편으로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함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자기이야기, 가족 이야기, 현재 바라는 것, 장래 소망 등 끝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배에 함께 계시다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누구하고도 대화하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무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주무시는 동안도 제자들은 바다를 잘 행해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먹장구름이 덮이며 바람이 불더니만 파도가 치기 시작했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육지보다 600척이 낮기 때문에 헐몬 산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바닷물이 하늘로 끌려 올라갑니다. 그래서 순식간에 온 바다에 거센 파도가 치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생활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인생항로를 저어가지만 우리 자신의 생활, 자녀, 사업 등에 너무 관심이 집중되어 예수님을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더 나아가 주일 예배 드리는 것도 소홀히 하고 하나님 말씀을 읽고 듣는 일에 등한히 할 때도 많습니다. 자기가 중심이 되어 예수 중심에서 떠나버릴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비유컨대 예수님을 주무시게 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무시는 상황 속에서도 당분간은 모든 것이 평안하게 지나가는 것같습니다. 그러나 곧 풍랑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주무시게 하도록 온갖 궤계를 부린 후 일단 주무시게 되면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서슴지 않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이 주무시지 않도록 최대한도로 주님께 관심을 집중시켜야 하겠습니다.

1. 절망의 풍랑을 만난 인류
아담과 하와를 살펴보십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아름다운 에덴 동산을 만드시고 그 안에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좋은 실과를 많이 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하셨습니다. 만일 그들이 늘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과만 교제했다면 절대로 마귀와의 대화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동산에 있는 모든 실과는 다 먹되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너희가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등한히 했고 그 틈을 타 마귀가 그들을 꾄 것입니다.
“너희가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너희도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왜 마귀의 꾀임을 받았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등한히 함으로 마귀가 틈을 타게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범죄한 그들은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자 인류 속에 큰 풍랑이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반역, 에덴에서 쫓겨나 하나님을 떠나자 죄악의 풍랑이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장남이 차남을 돌로 쳐죽이는 비극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에게 미움의 풍랑, 고통과 질병의 풍랑이 다가왔습니다. 이마에 땀을 흘려야만 겨우 먹고 사는 저주와 가난의 풍랑이 다가왔고 결국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의 풍랑이 다가왔습니다. 그들은 이 풍랑을 자기들만 만난 것이 아니라 자손대대 전 인류에게 상속으로 주고 떠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풍랑을 만나자마자 자기들의 지혜와 지식, 총명을 다해 이를 잠잠케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배에 찬 물을 퍼내고 돛을 조정하는 등 안간힘을 썼지만 점점 더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들 뿐이었습니다. 아담 이후로 지금까지 풍랑을 만나 인류는 인간의 힘으로 인류를 풍랑에서 건져 보려고 온갖 애를 다 썼습니다.
인간은 종교를 만들어서 풍랑에 대처해보았습니다. 또 과학과 철학, 정치, 문화를 통해서 풍랑에 대처해 보기도 했습니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해서 인류는 이 풍랑에 대처해 보았지만 절망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허무와 무의미의 절망, 죽음의 절망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인간은 절망적인 존재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처절한 절망에 처하게 되자 비로소 자기들 가운데 예수님이 주무시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가슴을 치며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우리의 죽는 것을 보살펴 주지 않으시나이까”하고 고함을 쳤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절망에 처할 때에야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우리들의 관심사를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우리들의 관심사를 예수님께로 돌리게 되는 일이 많습니다. 지위나 명예, 권세, 돈, 세상의 모든 환락이 다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비로소 예수님께로 관심이 집중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서야 “주여 나를 살려주소서”하고 통회자복하며 철야기도 또는 새벽기도로 부르짖으며 기도원에 가서 금식하며 주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고 찾으면 주님은 발견됩니다. 주를 찾지 않으면 주님은 우리에게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주님은 만나 주십니다.

2.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예수님
제자들이 자신들에게 향한 관심 집중에서 돌이켜 예수님께로 관심을 집중하여 주님을 깨우자 주님은 일어나셔서 바람과 파도를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풍랑은 순식간에 잠잠해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제자들과 같이 인류는 종교, 철학, 과학, 물질문명 등 어느 것을 통해서도 인간의 절망적인 운명을 해결할 수 없었고 그 결과로 인류는 큰 낭패와 고통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2천년 전에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는 말씀 그대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셔서 절망에 처한 인생의 배에 함께 타고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인간의 배에 함께 타기 위해 주님은 인간이라는 육체를 입으셨습니다.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시고 30세에 요단강에서 물로 침례를 받으신 후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셨습니다. 그때로부터 3년 간 주님께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하시며 인류에게 복음을 증거하신 후 갈보리산에 올라가서 마귀와 접전, 마귀를 멸하시고 풍랑에게 잠잠하라는 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이사야는 주님이 오시기 600년 전에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예언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웨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
예수님께서는 갈보리 바다의 풍랑을 향하여 ‘바람아, 파도야 잠잠하라’고 명령하여 잠잠케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그 권세로 이 세상 죄악의 풍랑을 향하여 ‘죄악의 풍랑아 잠잠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미움을 향하여 잠잠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난과 저주를 향하여 ‘너희는 잠잠할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음을 향하여 ‘너의 사망아 잠잠하라’고 말씀합니다.
성도 여러분, 혹시 풍랑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며 헤어날 수 없는 고통 속에 있지는 않으십니까 인간의 모든 노력이 무위로 돌아가 절망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회개하시고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운 제자들 처럼 예수님을 깨우십시오. 지금까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 자랑을 따라 살아온 죄를 회개하십시오. 여러분의 관심을 자기 중심으로 가지고 있고 이기주의적으로 살아온 죄를 회개하고 주님 중심으로 돌아오십시오. 하나님께 돌아오십시오. 그리고 ‘주여, 주여, 내가 죽게 되었사오니 나를 건져 주옵소서!’라고 주님께 부르짖으십시오.
성수주일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십일조를 주님께 드리고 주님을 간절한 마음으로 찾으십시오. 그러면 오늘 주님께서는 여러분의 생애 속에 찾아오셔서 죄악의 바람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너희 죄악의 바람은 잠잠하라’ 죄악의 풍랑은 잠잠해질 것입니다.
주님은 또 ‘너희 질병은 잠잠하라 너희 원수 귀신은 잠잠하라 마귀의 일은 멸함을 받을 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육신의 고통, 마음의 고통과 질병은 잠잠해지고 맙니다. 마귀는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마에 땀을 흘려도 먹고 살지 못하고 가시와 엉겅퀴 속에 허덕인다면 주님은 여러분의 삶 속에 들어오셔서 ‘가난아 물러가라, 너희 모든 저주는 떠나가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예수님은 오늘날도 우리를 환경의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은 영적인 일에만 관심을 가지고 계시지 물질적인 환경의 문제에는 관심을 가지고 계시지 않는다고 합니다.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지 않으신다면 왜 물질적인 세계를 만드셨습니까 왜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영적 존재로 만들어서 이 육신 속에 살게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질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그러므로 염려하며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가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1-32)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9장 9절에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간하게 되심을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으며 그렇기 때문에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 14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난과 저주의 풍랑이 사라지고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되어야 하나님을 위해서 시간 드리고 물질 드리고 몸 드릴 수가 있습니다. 제가 이 산티아고에 오는데 우리 실업인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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