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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엘리야에 관한 논의 (막 09: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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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작하는 말

무지와 어설픈 지식에 근거한 자신감과 용감무쌍한 행동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생활상의 무지와 어설픈 지식은 생활을 힘들게 만들고, 사업상의 무지와 어설픈 지식은 사업을 망치고, 환경상의 무지와 어설픈 지식은 환경뿐만 아니라 생명을 파괴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모든 무지와 어설픈 지식을 다 합친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바로 종교상의 무지와 어설픈 지식입니다. 이 종교상의 무지와 어설픈 지식이란 영원한 멸망을 초래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도 성령을 체험하기 전까지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무슨 일을 하러 오신 분인지 올바로 알지 못한 채 따라다녔습니다.

2. 부활 때까지 말해서는 안 될 변화산 사건
엘리야에 관한 논의

나중에 변화산으로 불린 어느 높은 산에서, 예수님의 옷까지 광채가 나며 희게 변하는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 예수님과 말씀을 나누고는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의 변형은, 그의 낮추심과 속죄의 죽음이 영광의 빛을 발하시는 신적 존재임을 증거해 주는 것입니다. 모세는 예수님의 죽음에서 성취될 옛 약속의 대표로 나타난 것이고, 엘리야는 마지막 때에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만물을 회복하는 예언자로서 나타난 것입니다. 즉, 두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과, 예수님과 관련하여 발생하는 사건들의 종말론적 의미인 궁극적 중요성을 확증한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 중 제자라고 하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아직 그 깊은 뜻을 깨달을 만한 영성도 이성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그 놀라운 광경에 취해,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라고 감상적인 간청을 할 뿐이었습니다. 정말로 몰지각하고 몰이해한 이기적 요청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 세 제자들이 본 황홀경을 듣는 사람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라고 경계하신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당신의 영광―죽음과 부활에서 드러나며, 또한 지금 변형으로써 예시된 영광―이 대중 앞에 드러나는 것이 아직은 시기 상조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제자들이 유대교의 한 메시야관을 좇아 당신을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하여 권력으로 다스릴 메시야로 오해하고 있으며, 따라서 당신의 참 메시야성을 제대로 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금령이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까지엘리야에 관한 논의
로 제한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뒤에야 비로소 제자들은 예수님의 변형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고, 그때에 그 본 것을 널리 전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고 유익한 충고나 가르침이라 할지라도, 받아들일 만한 사람이나 받아들일 상황이 아니면 서로에게 유익은커녕 손해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언제든지 주께로부터 비롯되는 충고나 가르침을 받아들일 신앙 인격을 갖추시기 바랍니다.
얼마 전에, 어느 여 집사님이 제가 쓴 주석서인 ‘빌립보서’를 읽으면서, 몸이 뜨거워지면서 뜨거운 눈물이 흐르는 은혜를 체험했다는 말을 해서 하나님께 감사한 적이 있습니다. 또, 설교집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깨닫고, 많은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낯선 교인들의 말을 듣고서 하나님께 감사하기도 했습니다.

3. 예수의 부활 및 엘리야에 대한 질문

제자 중 제자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금령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당시의 대중 신앙의 내용인 세상 끝에 있을 부활은 잘 알고 있었지만, 훨씬 더 중요한 예수님의 부활은 알지 못했습니다. 전에도 예수님에게서 예수님의 부활에 관해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세 제자는 예수님께 “어째서 율법을 잘 아는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합니까”라고 질문했던 것입니다. 이 질문의 의도는, “엘리야가 아직 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예수님이 메시야일 수가 있는가 혹은 메시야는 이미 와 계시는데, 왜 서기관들은 여전히 엘리야가 와야 한다고 하면서 기다리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4. 자신의 고난과 엘리야에 관한 답변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서기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엘리야가 먼저 와서 오실 메시야를 영접할 수 있도록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기관들은 엘리야에 관한 말씀을 암송하듯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 말씀대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엘리야로서 왔던 세례 요한을 알아보지 못했고, 또한 인자 곧 메시야가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할 것이라는 말씀을 간과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메시야란 세계를 정복하고, 온 세상 사람들을 이스라엘의 노예로 삼아 주시고, 권력으로 다스릴 존재라고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약속의 말씀대로 고난의 종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어 만민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아볼 리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약속의 말씀은 알았지만, 약속의 말씀을 따라 엘리야의 역할을 하러 온 세례 요한도, 약속대로 고난의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 서기관들을 비롯한 사람들의 맹목, 영적 무지까지 성경 말씀에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 예수님은,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하였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세례 요한을 배척하였고, 사악한 헤로디아의 간계로 헤롯 안디바는 세례 요한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은 아랑곳없었습니다. 그들의 거역과 사악한 죄는 기고만장한 중에 행해졌으나, 하나님의 섭리를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그 사실을 기록해 놓도록 하셨습니다. 헨드릭슨은 “어떠한 면에서도 인간적인 책임과 죄성을 지워버림이 없이,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깨닫고 그에 따른 생의 역할을 감당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5. 맺음말
원죄

끝으로, 무지와 어설픈 지식으로 인한 자만심과 용감 무쌍한 행동이 빚은 끔찍한 재앙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812년, 호화 여객선 타이타닉호가 여러 나라의 많은 귀족들을 태우고, 영국의 퀸스타운을 출발한 지 사흘만에, 배가 가는 쪽으로 빙산이 흘러오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무전이 왔습니다. 그러나, 무전사는 타이타닉호는 아주 튼튼해서 빙산과 충돌해도 끄떡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무전 내용을 무시했습니다. 한 시간 뒤에 또 무전이 왔지만, 이번에도 무시해 버렸습니다. 세 번째 무전이 왔을 때에야 비로소 무전사는, 무도회에 참석하고 있는 선장에게 보고했습니다. 선장은 절대로 침몰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말라고 하면서 전언지를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습니다. 얼마 뒤에, 캐리포니아호라는 배로부터 빙산이 가까이 가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전언을 들었습니다. 그때 선장은 배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여러분, 이 배 앞으로 지금 빙산이 흘러오고 있으니, 모두 밖에 나가 구경하십시오. 이 배는 절대로 침몰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최고 속도로 달리라고 명했습니다.
밤 11시 30분, 결국 타이타닉호는 거대한 빙산에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절대로 침몰되지 않는다던 배는 순식간에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500개의 구명대를 손 하나 대보지 못하고, 1516명 전원이 수장되는 참사를 빚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 대한 무지와 어설픈 지식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멸망을 당하고,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영생의 길에서 멸망의 길로 떨어집니까 열심히 기도하고, 예배에 참석하고, 말씀을 청종하여 주 예수님을 깊이 알고, 더욱더 주 안에 확고히 거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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