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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상의 소금 (마 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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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작하는 말

오늘은 우리 감리교회가 열여섯 번째 맞이하는 ‘평신도 주일’입니다. 평신도 주일을 제정하게 된 것은, 감리교인 모두가 구원의 기쁨에 감사하고, 소속한 교회의 성장과 발전에 기여하도록 할 뿐만 아니라 사회 성화와 복음 선교의 일익을 담당하도록 하자는 데 있습니다. 이번 1994년도에 맞이하게 된 평신도 주일의 주제는 ‘회심과 사회 구원’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하며 고심하는 중에 마태복음 5:13을 택하여 설교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 까닭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첫 마디는 믿는 사람의 본질과 특성, 위치와 사명 등을 단적으로 나타내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소금의 유용성

예수님은 우리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름다움을 뽐내는 공작이나, 위용을 자랑하는 사자나, 고급 향수나, 오색영롱한 보석이나, 그 밖의 값비싼 것들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모양도 향기도 없고, 값비싼 것도 아닌 소금에다가 비유하셨겠습니까 여기에 대단히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세상의 소금

구약성경이나 고대의 저술 등에 보면, 가장 유용한 것을 가리킬 때에 소금으로 비유했습니다. 플리니는 “소금과 태양보다 더 유용한 것은 없다.”라고 했고, 그러한 표현들을 근거로 성경 주석가인 벵겔은 “소금과 빛은 자연물이고, 본질적인 것이고,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소금의 유용성으로 썩는 것을 막는 역할, 정결케 하는 역할, 음식에 맛을 내는 역할, 해독제의 역할, 생명을 유지시키는 양분 역할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소금의 유용성 때문에, “소금 한 자루는 인간의 생명 만큼이나 중요하다.”라는 격언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처럼 소금이 유용하고 중요했으므로,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로 사용되었고, 언약의 표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또, 소금은 최고의 경의를 나타내는 표였고, 따라서 왕이 주는 소금을 먹는 것은 두터운 신임을 받는다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소금과 떡을 같이 먹는 것은 동맹의 표시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 주님은 당신의 영을 모신 우리를 가리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모든 분야에서 각양각색의 인생을 사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소금과 같이 유용하고도 중요한 존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소금이라면, 우리 주님은 소금을 소금 되게 하는 짠 맛이라 할 수 있습니다. 힘써 기도하고, 말씀을 읽거나 듣고, 순종하여 나날이 주님의 영이신 성령님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3. 소금의 소금 됨

소금이 그토록 유용하고 중요하다 할지라도, 소금 그대로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는 속담이 원죄
있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존재인 사람도 사람 구실을 못하면, “저것도 사람이냐”라는 비난을 듣습니다. 하물며, 세상 사람들의 소금인 우리가, 그들의 올바른 삶과 영생을 위해 유용하고 중요한 역할과 사명을 감당하지 않고 그대로 있다면, 정말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걸리버 여행기」를 써서 유명해진 조나단 스위프트에게 한 중년 부인이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저는 매일 아침마다 거울을 들여다보고는 제 아름다운 모습에 황홀한 느낌을 갖는답니다. 이렇게 제 자신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도 혹시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까” 이 부인의 물음에 대해 그는 분명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부인, 천만에요! 그것은 죄가 아니라 오해일 것입니다.”
여러분, 소금 맛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자체, 즉 주님의 영을 모시고 있고, 온갖 신령한 은사와 능력이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불신자들과 다른 대단한 존재인 양 자랑하는 것은 죄는 아니나, 분명히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대하고 아름다운 성전 건물과 많은 헌금과 수많은 교인 수만을 자랑하는 것도 죄는 아니나,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소금 그 자체는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모양도 화려함도 향기도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주님이 우리 믿는 자들을 가리켜, 소금에 비유하신 뜻이 있는 겁니다. 즉,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아닌게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믿은 것도, 구원을 받은 것도, 주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모신 것도, 은사와 능력과 복을 받은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그리스도인 됨이란, 소금의 소금 됨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소금의 소금 됨이란 반드시 그 자체가 아닌 다른 것 속에 들어감으로써만 가능한 것입니다. 소금이란 반드시 다른 것과 섞여질 때에만 소금의 의미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단순히 ‘너희는 소금’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주님께서 죄와 불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 대해 지극히 큰 관심을 가지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주님의 뜻을 따라 교회는 물론, 세상을 위한 소금의 역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세상 모든 분야에 뛰어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소금처럼, 주님의 능력으로 부패를 막고, 내주하신 성령님을 좇아 성결케 하고,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살맛나게 해 주고, 죽음의 길을 가는 세상 사람들을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해야만 합니다.
소금이 소금 되기 위해서는, 소금이 소금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것을 위해 스스로 녹아 없어져야만 합니다. 소금은 그 자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위해서만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금의 최고의 영광이란 다른 것을 위해 녹아 없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교인 또는 교회의 존재 이유와 존재 가치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뭡니까 주님 자신을 위한 것입니까 죄악을 범했기 때문에 마땅히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모든 인간을 위한 속죄 제물이요, 화목 제물이 아닙니까 영원한 생명을 선물한 죽음이 아닙니까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주님을 다시 살리시고 당신의 우편에 앉히신 것이 아닙니까
1994년 2월 20일에, 장 아무개 선교사가 미국 몬타나 인디안 지역에 파송되었다가 놀라운 실적을 거두고 1년 만에 일시 귀국하여, 파송한 교회에서 선교 보고한 내용을 읽었습니다. 백인들에게 땅과 상권마저 빼앗기고 좌절한 채, 혼음과 마약, 알콜 중독과 증오심에 젖어 있던 미국 원주민 보호 구역 인디안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길을 지나노라면, 인디안들이 칼을 갈거나 총을 겨누면서 위협하곤 했고, 자동차가 뒤집히는 등 여러 번 교통 사고가 났지만, 하나님은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게 지켜 주셨습니다.
어느 날, 오전 10경에는, 교회 앞을 청소하려고 문을 열었는데, 수많은 인디안 악령들이 몰려와 선교사를 둘러 진치고 주문을 외우고 노래했습니다. 너무 놀라 혹시 착시 현상이 아닐까 의심했지만, 그것은 분명히 눈에 보이는 현상이었습니다. 소름이 끼쳐 문을 닫고 그 악령들과 식음을 전폐한 채, 기도로 싸우기를 일주일이나 계속했습니다. 결국 기진하여, “차라리 악령들에게 죽을 바에는 하나님이 죽여 주십시오.”라고 단상을 잡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교회 천장이 열리면서 하늘에서 하나님의 군대가 천둥과 번개처럼 내려와 교회 곳곳을 지키고 자신을 호위하며, “우리가 너를 지키러 왔다. 저것을 봐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보니까 주님의 천사들이 날아 다니며 악령들을 모두 물리쳐 버렸습니다.

4. 맺음말

여러분! 결코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은 교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 가정과 교회, 직장과 세계에서 주님 안에서 소금과 같은 교인으로서의 존재 이유를 인식하고, 소금과 같은 존재 가치를 발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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