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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을 들으세요 (행 10:4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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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구조를 성경은 두가지로 구분합니다. 그것은 영과 육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우리는 생리학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즉, 육신을 가진 존재를 말합니다. 둘째, 철학적인 존재로서 이성이 있고 판단력과 생각할 수있는 능력이 있다는것입니다. 셋째는, 영적존재로서 하나님을 만나야 하고 하나님과 교제를 가져야 하는 존재라는 것입이다.
이와같이 육, 혼(정신),영이라는 세가지 구조적인 존재를 가지고 하나의 인격체로 살아갑니다.
문제는 어느부분이 주도하는 인생이냐 하는 것이 중요 합니다. 육체의 주도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육욕적이고 동물적인 본능의 삶을 삽니다. 이성주도적인 사람은 비판하고 추리하고 생각하면서 합리적인 사고로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존재는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삶을 삽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그 사랑을 느끼며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신령한 세계에 관심을 기울이며 삽니다.
나아가서 이것은 그 사람이 무엇으로 행복을 찾느냐 하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사람은 육신의 쾌락과 만족으로 행복을 느끼기를 바라며, 이성적인 사람은 생각하고 사고하고 비판하면서 철학적인 삶으로 행복하려고 합니다.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행복하고 참된 평화를 누려갑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바로 이러한 존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세가지 요소는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장하고 올바르게 살수가 있습니다.
몸은 땅에서 나는 식물을 먹어야 삽니다. 혼은 교육을 통해서 지식을 얻어야 합니다. 사람이 계속 공부하지 않고 지혜를 추구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어느새 동물적인 사람이 되고 교양과 인격이 없는 추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영은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 나가셔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때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이 말씀은 사람이 육체적인 존재만이 아니라 영적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 주신 것이며 영적 존재로서 우리가 식물만이 아니라 말씀을 먹어야 온전한 존재가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나악서 이 사실은 우리의 존재가 동물적인 존재가 아닌 값지고 가치있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존재임을 강하게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육신을 위하여 식물을 먹는 것처럼 우리는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사람이 몸에 이상이 생기면 밥맛이 제일 먼저 상실됩니다. 평소에는 맛있게 먹던 것이 병이 생기면 귀찮고 먹기 싫어집니다. 또한 사람이 아무리 건강하다고 하여도 잘 먹지 않으면 그 사람은 결코 건강할수 없으며 병이 나고 잘못하면 죽습니다. 요즈음 소말리아에서는 먹지 못하여 죽어가는 사람이 너무많다고 합니다. 그 모습은 보기에도 너무나 끔찍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존재로서의 우리도 영의 양식인 말씀을 제대로 먹지 못하면 영적인 모습은 병들고 죽어가는 비참한 몰골이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를 보면 영적으로 그런 모습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나아가서 우리가 말슴이 은혜가 되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그러면 영적으로 시험의 단계나 병들어가는 단계임을 의심하여야 합니다. 물론 초신자일 경우는 처음 교회에 오면 목사님의 설교가 무슨 말인지, 성경을 읽어도 무슨 뜻인지를 모를 경우가 있습니다. 저도 맨 처음 교회에 전도받아서 나갔을 때에 설교가 길기만 하고 지겹고 도무지 이해가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은혜라는 것을 받고나니 하나님의 말씀이 꿀송이 같고 설교가 귀에 들어오며 꼭 나에게 하시는 말씀처럼 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생각하며 그것이 나의 영적인 말슴임을 인식하고,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축복된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기쁘과 감사로서 말씀을 받아 먹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발생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말씀을 통하여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왜 내가 믿음이 자라지 않는가 하는 사람은 괜히 염려만 하지 말고 말씀을 가까이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매 시간마다 나와서 들을 때 믿음은 잘 자라가고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고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 듣는 자의 마음을 밭에 비유하신 적이 있는데 그러나 알것은 아무리 좋은 옥토같은 마음이라고 하여도 그 마음에 말씀의 씨가 떨어지지 않으면 열매는 거둘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세상에서 착하고 마음 좋은 사람이라고 하여도 그 사람의 마음에 에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떨어지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아니요 그저 거기서 거기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마음 밭을 옥토로 만들어 착하고 좋은 사람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뿌려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베드로 사도는 벧전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학자들은 오늘 본문에 나타난 말씀을 두고 `제2의 오순절'이라는 별명을 붙입니다. 첫번째 오순절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일어난 에루살렘을 중심으로하여 일어나 사건이며,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건은 가이사랴에서 있었던 사건으로서 전적으로 이방인에게 일어난 사건입니다.
오늘의 사건은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고넬료라는 삶은 로마의 군인입니다. 그러데 그는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는 당시 로마의 장군으로 로마의 신을 섬겨야 합니다. 더구나 그가 믿는 기독교는 자신들의 식민지 국가의 천한 사람 취급받는 사람들의 종교이며, 그에게는 부족한 것이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돈 몇푼 있다고 교만떠는 사람을 봅니다. 사회적인 지위가 조금 있다고 건방떠는 사람을 봅니다. 그래서 어쩌다 인도 받아서 교회 나와보고는 교회가 작다는둥 너저분한 사람만이 나왔다는 둥 별볼일 없는 사람이 모였다는 식으로 안다닌다는 사람을 가끔 봅니다.
거기에 비하면 고넬료라는 인물은 참으로 된 사람입니다. 겸손하고 경건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2절에 보면 온 집으로 더불어 기도하고 구제하고 그리고 많은 사람에게 칭송듣는 사람이었습니다. 구약적으로 보면 거의 완벽하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도 그를 기쁘게 보셔서 천사를 보내어 베드로를 만나도록 하십니다. 베드로를 청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하십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그 집에 청함을 받아 갔을 때에 고넬료의 태도는 정말로 놀랍습니다. 24절 보니 모든 사람을 불러 모아 놓고 기다리다가 베드로가 들어오자 그 발앞에 엎드려 절합니다. 이 사실은 당시 상상도 할 수없는 일입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어부 출신입니다. 초라하고 보잘것 없는 사람입니다. 자신과 세상적으로 비교하면 비교도 되지 않는 천한 노인입니다. 거꾸로 베두로가 자신에게 절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고넬료는 베드로를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오시는 분으로 인정하고 그 앞에 엎드려 절합니다. 여기 절했다 하는 말은 헬라어로 단순한 절을 한 것이 아니라 `경배' 했다는 말입니다.
즉, 외형적으로만 절한 것이 아니라 깊은 존경심과 감사한 마음으로 엎드렸다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심방을 하다보면 그 교인들이 목사를 맞이하는 모습을 보면서 고넬료를 연상할 때가 있습니다. 솔직히 어떤 집은 기분 나쁜집도 있습니다. 목사가 대접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을대하는 그 신자의 인격과 신앙의 상태를 체크하기를 바라며,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얼마나인정하고 있는가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베드로도 너무나 무안해서 일어나라 나도 사람이라고 합니다.

뿐만아니라 고넬료는 말합니다. 33절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앞에 있나이다.'' 너무나 아름다운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하나님앞에 있나이다. 고넬료의 이 자세가 진정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신앙인의 자세가 중요 합니다. 우리의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삶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듣는 자세가 참으로 중요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듣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배시간에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앞에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곳이 계시다. 하나님은 지금 말씀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데살로니가교회가 바울에게 칭찬들은 이유를 아시지요. 2:13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설교를 들을 때든지 성경을 읽을 때에 언제나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 앞에서 듣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자신에게 어떤 유익이되고 역사가 일어나느냐 하는것은 듣는자의 자세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히4:2`그러나 그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이되지 못한것은 듣는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며 믿음으로 받아들 일때에 그 말씀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여 열매를 맺으며 축복된 말씀이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렇게 하지 않고 사람의 말로 받고 아무런 믿음도 없이 들을 때 그 말씀은 오히려 거침돌이 되고 시험의 올무가 될 수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세를 바르게 하여야 합니다.
(흔히 나타는 행위-다리를 꼬고 앉는 행위, 조는 행위, 눈을 감는 행위, 낙서하는 행위, 다른 성경을 읽는다든가 다른 글을 보는 행위, 잡담, 아이와 장난, 두르번 거리며 주위 산만함, 다른 생각등.
적극적인 행위-기쁨으로 받을 것, 열려진 마음으로 받을 것, 아멘으로 받을 것, 순종하는 자세로 받을 것등)

고넬료에게도 그러한 좋은 자세가 있을 때에 제2의 오순절이라고 하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 44절에보면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이 말 할 때에' 라고 되어 있습니다. `한 다음'이 아닙니다. 하는 중입니다. 헬라어 원문대로 `에티'라고 하는 말이 `하는 중에'입니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중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놀라운일입니다. 성령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름다운 자세로 듣고 있을 때에 내려오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신앙의 삶 하나 하나가 다 중요 합니다. 기도 시간은 중요합니다. 찬송시간도 중요합니다. 오늘 보는 말씀의 시간도 중요 합니다. 이 모든 시간마다 온전한 자세로 임하기를 바라며, 정성을 다하고 열심을 다하는 아름다운 자세가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인 우리의 삶에서는 대단히 중요 합니다. 영적인 우리가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 풍성한 인생을 사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중요시 생각하고 그 말씀을 듣는 자세를 더욱 올바르고 아름답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서부교회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다가 성령을 받고 문제의 행결을 받고 힘을 얻고 용기를 얻으며 소밍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찾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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