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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눅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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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주기도문’에 대하여 연구하며 은혜를 나누기를 바랍니다. 금번의 주기도문의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앞에 더욱 기도하며 응답과 축복을 받는 기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이 주기도문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는 제자들의 요청에 의하여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제자들이 기도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습관에 따라 하루 세번씩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랍비들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곤하였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18가지 기도의 형식을 매일 반복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기도의 기술을 가르쳐주는 것이었습니다. 기도가 기술이 되는 순간부터 그것은 진정한 기도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도는 기술이 아니라 정신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기도를 기술로 행하였기에 그들의 기도는 외식이 되었으며, 예수님에게 책망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마 6:9이하에서 주기도문을 말씀하시는데 그 이전 5절이하에서 잘못된 기도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들이 생각했던 기도와는 다른 모습을 발견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시는 온전한 기도를 배우고 싶다고 가르쳐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아주 슬픈 일은 우리의 기도가 옛날 바리새인들의 기도와 같은 모양이 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예배당에 들어오면 기도부터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의 형식이 될때가 많습니다. 그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앞에 나온 존재를 확인하고 세상의 흩어졌던 마음을 정리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게를 새롭개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의 형식이 되고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의식처럼 됩니다.

어떤 성가대원이 늦게와서는 자리에 앉아서 머리숙여 기도합니다. 그런데 고개만 숙이고는 맙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물어보니 ‘하나님 안녕’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도 하나의 형식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루터는 ‘주기도문이야 말로 이 시대의 최고의 순교자다’라고 했습니다. ‘주기도문’에서 가운데 ‘기도’라는 단어가 빠졌습니다. 결국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주문’이 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이야 말로 최고의 기도입니다. 기도하지 못하는 자는 이 기도만 하여도 하나님앞에 큰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예)승동교회의 한 목사님-주기도문의 위력을 경험허였다고 합니다.
중공에 성경책을 가지고 들어가는데 주기도문 30번을 했더니 세관원이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더랍니다.

-먼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봅시다.

요한 칼빈은 기도할 때에 두가지 필수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의식하는 것과 그의 무한한 능력을 신뢰하는것이다고 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말씀속에서 우리는 위에서 말한 두가지를 직접 찾을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가장 크게 강조되는 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부른다는 것입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자가 누구며, 그 거룩한 산에 설자가 누군고” 그리고는 그는 말하기를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정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시24:3,4)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대로라면 우리는 절망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부정한 자입니다. 우리는 더러운 손을 가졌으며, 마음이 더럽고 허탄한 가운데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앞에 나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이 죄인이 어떻게 거룩하신 은혜의 보좌앞에 담대히 나아가서 기도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 아버지’라는 권리로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예)한 로마황제가 개선하여 로마시로 입성할 때에 군인들이 양쪽으로 도열하고 있는데 그 곳을 뚫고 한 아이가 호아제에게로 달려 나갑니다. 군인들이 놀라서 그를 제어하자 그 아이는 단 한마디를 하였습니다. “저 분은 내 아버지시다.” 그 말에 아무도 그의 앞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무한한 능력으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천사도 고개를 못들고 날개로 얼굴을 가려야하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그 분앞에 이 죄인이 담대히 나아가서 기도할 수있는 길은 그 분이 나의 ‘아버지’되심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누가 아버지와 자녀인 우리의 사이를 막겠습니까

그러기에 예수님은 “너희가 기도할 때에 ‘아버지’라고 하여라” 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J.R밀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말씀을 기도의 황금문”이라고 했습니다.

진정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우리가 그 분께 기도할 때에 세상의 그 어느것으로 낭가면 안됩니다. 돈으로도 안됩니다. 세상의 권력과 자랑으로 나아가서도 안됩니다. 오직 그 분은 내 아버지시며 나는 그 분의 자녀로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도 하나님을 부르실 때에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산상설교에서 ‘아버지’라는 말씀을 17회 사용하셨습니다.
그의 최초의 기록된 말씀은 “내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이며, 최후의 말씀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입니다.

예)기도를 길게 하는 사람의 이야기-
한 20분 기도하고는 ‘이제 또 무엇이라고 더 말씀드릴까요’라고 하자 한 노인이 하는 말이 ‘아브지라고 부르쇼’라고 했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구원의 역사입니다.
역설 같지만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아버지십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의 아들은 압니다.”

그 분의 아들이 되어 그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만이 가능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3:2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4:6)

여러분이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슬퍼서 제대로 기도하지 못하고 무엇을 말해야 할지도 몰라서 방황할 때에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아버지!’라고 부르기만 하여도 하나님은 비상이 걸립니다.
‘아바 아버지!’ 이 놀라운 축복을 누리십시오. 그 분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기도하면서 누리는 자는 행복한 자입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십니다.
‘하늘에서’라는 단어는 이 짧은 기도에 두번나오는데 한번은 단수로 나오고 한번은 복수로 나옵니다. 즉,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란 귀절의 하늘은 단수로 기록되어 있으며, 오늘의 이 귀절은 복수로서 하나님의 편재성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땅위에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다는 말씀이 아니라, 그 분은 지존하시며, 거룩하시고, 영원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분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이 인생들과는 절대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아버지는 유일하시고 완전하신 분이시며, 전능하시고 그 어느 누구에게도 영향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라는 것 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없는 일들을 그 분은 하실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종종 사랑하는 자식이 병들어 누워있을 때에 그 자식곁에서 인간의 위대한 사랑도 얼마나 무력한가 하는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는 그렇지 않으십니다. 그 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우리의 모든 삶에 축복의 역사를 이루어 낼 수가 있는 분이십니다.

진정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가 하는 사실을 깨닫고 가슴을 펴야 하며, 어떤 중에도 용기를 내고, 소망을 가지고 아버지 앞에 모든 것을 맡기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아버지를 아버지 답게 하는 길을 그에게 기도하여 응답을 통한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예)우리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세가지.

1.찬양을 통하여.

2.말씀을 순종하므로서.

3.기도하므로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 위대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기뻐하며 찬양하고, 더욱 말씀에 순종하고, 기도하면서 영광을 세세토록 돌리는 우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 이십니다.
나의 아버지 만이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 이십니다.

예)사도신경은 “내가”입니다. 그러나 주기도문은 “우리가”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모든 자들은 다 하나님앞에서 한 형제요 자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서로 사랑하여야 합니다.

요일 5: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예)요일 3:12절에서 말씀하시기를 가인같이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자신의 이익과 체면을 위하여서 형제를 죽이는 사람들. 말로 죽이고, 눈으로 죽이고, 인격을 죽이고, 악독으로 죽입니다.

우리는 한 형제끼리 서로 세워주고 살려 주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감싸고 위해 주어야 합니다.

예)77년에 안양에 장마시 불어난 물을 건널 때에 모두가 어깨동무하고 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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