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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최후의 만찬 (막 14: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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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님께 헌신 하는 어떤 사람(12-16절)
유월절양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으로 유월절을 잡수시게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물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월절 식사는 예루살렘 성안에서 먹어야 했기 때문에 특별한 장소를 결정해야 했다.
아마 이 사건은 이전에 있었던 예수를 위하여 나귀를 가져왔던 사건과 아주 흡사하게 일이 진행이 되고 있다.
혹자는 이야기 하기를 이미 예수와 어떤 사람과 이야기가 되어 있었고 물한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은 그들사이의 암호라고 해석을 하였다. 물을 가져가는 사람이 본문에는 남자라고 되어있다. 그러므로 유대 사회에서 물을 긷는 일을 대부분 여자가 하는 것을 생각할 때 그 물을 길어 가는 남자노예는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므로 암호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건을 어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건으로 맞추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에 대한 보이지 않는 추종자의 믿음으로 볼 수 있다.
예수는 이미 모든 것을 아시고 말씀하시는 분이다. 어던 사람이 유월절을 준비하고 사람을 기다리고 있으며, 누가 그를 맞이할 것인지 그리하여 제자들에게 되어질 일을 명하여 그대로 이루어 졌다.
오늘 예수께 방을 준비해 주고, 유월절 양을 준비해 준 사람은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우리는 그를 알지 못하지만 그가 어떻게 헌신할 수 있었는가 그가 어떻게 헌신하였는지는 알 수 있다.
그는 분명히 예수를 알고 있었고, 예수를 주님으로, 이스라엘의 메시야로 믿고 있었다. 그리하여 선생님이 쓰시고자하는 유월절 객실이 어디있냐고 하자 바로 그 일을 실행하였다.
물론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가 집을 내주고 양을 잡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그 당시 예루살렘에 살던 사람들이 대부분 순례자를 위해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행한 일은 집과 양을 내어준 것 이상의 일이다. 자기의 목숨을 내어 놓은 일이다. 왜냐하면 이미 산헤드린 공의회에서예수를 죽이려 작정했고, 그런 소문이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를 주님으로 알고 믿는 이에게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바로 이것이 참된 헌신이고, 믿음이다.

2. 배반에 대한 예언(17-21)
예수님은 12제자와 함께 다락에 앉으사 누군가 당신을 팔 것을 예언하셨다. 이미 제자들은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 전지하심을 체험하였다. 분명히 그 자리에 가룟유다도 함께 있었고 그도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들었을 것이다.
막14:18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막14:20 이르시되 열둘 중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막14:21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말슴에 각자가 근심하여 하나씩 “내니이까”물었다. 물론 가롯유다도 물었음이 틀림없다. 양심을 감추고, 양을 탈을 쓴 늑대와 같이 가롯유다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졌지만 그 음성을 무시하였다.
분명한 회개의 기회를 그는 거부하고 말았다.
주님의 우리를 향한 음성이 들려질 때 순종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3. 성만찬 제정(22-26)
① 유월절이 새로운 의미로 변화된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중요한 절기 중에 하나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기념하여 제정해 주신 것이다. 이날 이스라엘 가정의 가장 연장자는 애굽의 노예상태에서 해방되고 구출받은 그 의미를 이야기 한다.
이제 예수는 유월절 만찬을 통하여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는 귀한 날로 선포하시며 지키게 하신다.
이스라엘의 유월절은 인류구원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절기로 변화된다.

② 일상생활의 빵과 포도주가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된다.
떡과 포도주는 당시 사람들이 식사때 흔히 먹는 식품이었다. 예수는 거기에 놀라운 새 의미를 부여한다. 예수는 그것을 향하여 ‘이것은 내몸이다’. ‘이것은 나의 피다’고 하셨다. 그 때 그 떡이나 포도주가 예수의 몸으로 변한 것이 아니다. 캐톨릭은 이것을 주장한다.(화체설) 그러나 제자들이 그것을 먹고 마실 때 여전히 떡이었고, 포도주였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 떡과 포도주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셨다.
그리하여 그 때부터 그것들은 주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 되었다. 구원, 속죄를 기념하고 감사하는 것이 되었다.
그들의 일상식이 떡과 포도주이므로 그들은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의 북으심과 구원을 생각하며 살아가야 했다.
그러므로 성찬의 더 깊은 뜻은 바로 우리가 날마다 먹고 마실 때마다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과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을 향한 참된 헌신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주심을 날마다 기억하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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