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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핍박을 받은 자와 받는 자 (마 0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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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의 핍박을 받은 자는 두말할 나위없이 지금까지 살펴온 바대로 5:4-9까지를 다시 요약해 주는 말씀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마 5:3의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는 현재 시제로 이루어짐이 모든 인간의 참된 복임과 그것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것임을 살폈다. 또한 심령이 가난케 되는 길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지, 즉 그것은 사람의 원함이나 의지를 가지고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님을 팔복의 각각의 경우를 묵상해 보면서 여기까지 왔다. 인간의 원함이나 노력에 의해서 하나님 나라가 임할 수 없다는 것은 일반 신학이나 교회에서는 너무나 익히 말해지고 있는 부분들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기독교인들, 아니 종교인들은 그것은 하나의 교리적 개념으로만 갖고 있을 뿐 실제의 모습은 정반대이다. 거기에 비극과 함정이 있는 것이다.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교리가 꽉 박혀 있기 때문에 현재 자신의 신앙생활이 믿음의 행위인줄 알고 있는데에 문제가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의 열심과 열정으로 하나님 나라를 끌어 내리려고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열심히 믿는다 는 말은 믿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믿음에는 열심 이라는 수식어가 필요가 없다.
믿음이면 믿음이고 아니면 아닌 것이지 열심히 믿는다 는 말은 또 무엇인가 그것은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열심이라도 내어보면 믿는 제스추어라도 될까 싶어 그러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 나라의 임하심은 그러한 인간의 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기에 애통이 필요한 것이고 온유와 그리고 목마름과 긍휼함과 마음의 청결, 그리고 화평에 이르므로가 필요한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은 자신이 일구어 놓은 그 모든 열심과 스스로의 의로움으로부터 벗어남이요 비로소 가난함 이요, 천국이 저희 것이기 위한 과정일 따름이다. 그러한 과정, 그러한 용광로를 통하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자기 義라는 도성으로부터 헤어나올 수가 없다. 인간은 義가 없이는 결코 살 수 없는 존재자로 피조되었다. 아무리 보잘것이 없는 인간이라고 자신을 생각하는 사람도 그 보잘것 없다고 하는 義 가 있기 때문에 현재 살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이요, 존재의 의미를, 살만한 이유를 갖는 것이다.
그러한 인간이 종교성이 발현되고 종교와 만나고 나면 자신의 義가 더욱 견고하게 놓아져 간다. 더우기 믿음 을 강조하고 인간의 의가 아닌 신의 의로 살아야 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기독교일찐대 믿음 이라는 개념속에 자기의 의를 살짝 숨겨놓고 열심히 자기 의를, 자기 행위를 기세 당당하게 쌓아가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실상이다. 행위로 구원 받을 수 없다 는 바울의 고발에 대한 지식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이제는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다 는 그러한 지식마저도 자신의 한 행위의 일부로 작용하고 있다.
교리나 지식의 맹점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교리나 지식이 잘못됐다거나 틀린 것이 아니라 그러한 지식과 교리가 자신을 속게하는 요소로 작용할 뿐더러 한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크나큰 義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열심히 행위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그들은 행위로 구원 받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더 잘 알고 있다.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길이 좁고도 협착한 것은 바로 이러한 까닭이다. 자기 義를 가지지 아니하고는 한시라도 살 수 없는 인간이 그러한 자신의 義를 포기하는 데에는 자신의 노력과 의지를 가지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자기 의지와 노력으로 가능하다면 그것은 더 큰 자기의 의일 뿐이다. 그래서 이러한 철옹성으로부터 탈출구가 마련되어 있으니 그것이 곧 복된 소식이요,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요,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복중의 복이요, 하나님 나라의 임하심의 비밀이 담겨져 있는 팔복인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의를 인해서 , 혹은 의 때문에(eneken dikaio-suvnh) 핍박을 받은 자는(oiJ dediwgmevnoi) 인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더우기 그 원문을 살펴 보면서 그 문장의 구성이나 시제 등이 얼마큼 사려깊고 세심하게 되어 있는지는 볼수록 새로우며 감탄할 수 밖에 없다.
5:3의 종속절(oti 이하)의 시제는 현재 시제요, 능동태로 되어있고 4절부터 9절까지의 종속절은 미래시제요, 10절은 또다시 현재시제를 쓰고 있다. 또한 10절의 oiJ dediwgmevnoi는 그 시제가 완료분사이다. 핍박을 받은 자는 인 것이다. 그러한 자들은 현재 시제로 천국이 저희 것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 4-9절을 다시 한번 정리해서 함축한 표현이 의를 인해서 핍박을 받은 자들(oiJ dediwgmevnoi eneken dikaio-suvnh)은 인 것이다. 즉 4-9절이 완료된 자들은 비로소 하나님 나라가 미래시제가 아닌 현재시제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eneken(헤네켄)을-위하여 라고 번역한 것은 오역중에 오역이다. 이쯤되면 아마도 독자들께서는 왜 오역이 될 수 밖에 없고 또 번역자들이 그렇게 번역할 수 밖에 없었는지 짐작이 되실 것이다.
아직도 자신이 무엇인가 의를 위해서 참으로 의롭게 핍박을 받을 수 있고 그러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고가 그렇게 번역하도록 작용했을 것이다.-위하여 가 되기 위해서는 uJpevr(휴페르)라는 전치사가 쓰였어야 하지만 여기서는 엄연히 eneken을 쓰고 있다.
어떻든 10절에서 왜 핍박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다고 하시는지는 더이상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핍박이다. 다른 표현을 해본다면 자기 義 라는 이제까지 안주하고 머무르고 있던 그 집과 농사짓던 전토가 그리고 그 세상의 지배원리이며 하나요 한몸이던 남편이 무너지고 떠나가면서 발악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세상의 가치체계가 박살나면서 겪는 혼돈과 무질서 그리고 고통들이 4-9절까지요, 그것이 완료된 상태가 바로 5:10이니 죄와 사망의 법이 무너지고 생명의 성령의 법이 지배하는 새 예루살렘의 재개발이 이루어지는 장면이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 의 실체가 바로 이것이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인하여) 제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중에 죽기전에 인자가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마 16:24-28)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는 것이 바로 열심으로 나타나는 자기 의요, 그것이 믿음인 줄 알면 곤란하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신앙생활이 내목숨을 구원코자 함이 아닌지 살펴볼 일이다. 자식 잘되고 사업 잘되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행위들은 물론이려니와(사실 그러한 것은 논할 가치도 없지만 오늘날은 지나치게 그러한 것이 팽배해 있고 널려져 있으니 ) 종교적 규례나 금욕의 생활들이 모두 자기 목숨을 구원코자 하는 행위들인 것을 속히 깨닫고 알아야 할 일이다. 그러한 것이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고 거부하는 행위로 작용한다는 사실 등은 왜 알지 못하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해악을 보면서 지적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들의 직무유기 아닌가).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함이다. 잘먹고 잘 살려는 것만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함이 아니요, 신앙생활 잘해보려고 열심 충성, 봉사하는 것도 제 목숨 구원하려는 것이니 성경은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아 보자는 것에 대해서 질타할 뿐만 아니라, 목숨 내걸고() 제 목숨 살려보겠다고 열심내는 그 열심신앙을 질타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 때문에(eneken)가 아니요
자기의 의를 위하여(uJpevr) 하는 신앙생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를 부인(否認)하고 와는 상관이 없는 행위이다. 사실 팔복의 복음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음이 무엇인지와 그 성취과정을 상세히 말하고 있다. 이것이 아들의 믿음이다. 그래서 핍박을 받은 자 는인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부인(否認)되는 과정이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는 일이기 때문이다.

의를 인하여 핍박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5:11-12의 말씀을 살펴보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어떤이들은 10절과 11절을 하나의 복으로 보고 전체를 팔복이라 하기도 하고 11절을 10절과 구분하여 구복으로 보려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구분들과는 상관없이 5:3-10까지가 內的 形象의 하나님의 자녀를 빚어가는 과정이라면 이제 5:11에서 16절까지는 그러한 천국이 저희 것인 사람들의 당연히 나타나고 이룩될 삶의 외적 모습을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외적 현상들은 팔복의 내용들을 역동적으로 강화시켜 주고 확인시켜 준다. 팔복의 내용이 로마서의 내용이라면 5:11-16까지는 야고보서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손바닥과 손등의 관계와 같아서 별개가 아닌 하나이다.
생각해 보시라. 투우사의 격전장과 같은 현실에서 도 를 말하는 것은 적어도 세상의 사고에 젖어 있는 이들의 눈에는 미친놈 으로 보임이 당연하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도 적절치 못한 것은 단순히 미친놈 정도로 치부되고 말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십자가의 도는 적어도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이던(빌 3:5-) 사울에게 있어서는 참을 수 없는 이단 사설이요 그냥 놓아두었다가는 열심이 식어버린 믿음없는 자가 되고 말아버릴 터이니 예수의 도를 전하는 스테반을 돌로 치는데에도 앞장설 뿐더러 그의 죽임당함을 마땅히 여기는 것처럼 그러한 이들에 의해서 욕과 핍박과 악한 말을 듣는 것은 당연하다.
자기에게 유익한 것을 위하여는 무엇이든지 물불 가리지 않고 하는 자들을 향하여 십자가의 도를 전하고도 욕을 안듣고 돌을 안맞으면 잘못 전했든지 대상이 잘못되었을 것이다. 자기에게 유익한 것이라고만 하면 집팔아서 헌금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요, 새벽기도 금식기도는 물론이요, 목숨도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는 기꺼이 바칠 수 있는 순교자를 자처하는 이들에게 그 모든 것들은 당신을 망하게 하는 것들이니 그런 것들로부터 속히 돌아서시오. 그것은 당신의 의일 뿐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고 말하면 그들에게서 날아올 것은 돌밖에 없다. 어떤 돌인가 예루살렘 성전을 쌓고 있는 돌, 율법에 흠이 없이 순종하려고 하는 그 법, 이제까지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자기식 말씀의 자기성 (城) 건축자재인 그 돌들이 날아들지 않는다면 되레 이상한 일이다.
그것은 예전의 내 모습이요, 바울이전의 사울 모습이며 그 싸움은 내 안에서도 얼마나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었던가. 차라리 외적 환경의 압박은 아무것도 아니지 않던가 그 전쟁이 평정되던 날 그리고 자신의 버둥대던 그것이 사라지고 주의 영토요 소유된 백성이요 그의 주권이 지배하던 날, 더 이상 꿈틀거리던 녀석이 죽어버린 날은 어눌한 말 몇마디로 표현이 불가능하리라. 그러기에 능히 돌을 던지는 이들이 무엇을 가지고 돌을 던지는지는 충분히 알고도 남는다. 그것은 이전의 바로 나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러한 일들이 있거든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인 것이다. 왜 하늘에서 너희의 상(misqo;)이 크기(polu;)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그렇게 핍박하였다는 것이다.
여기 상급(misqo;)에 대해서도 이를 말이 참으로 많지만 지면 관계상 간단히 한다.
상급에 대한 잘못된 교리가 가져다 주는 폐해와 그러한 오늘날의 기독교에 대해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당신에게는 무엇이 상급으로 주어졌으면 좋겠는가

나를 인하여(eneken ejmou')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왜 복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 그것은 5:3-10까지의 복이 임한 자에게만 비로소 가능한 외적현상이다. 그것은 억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말 몇마디 실수해서 얻어먹는 욕이 아니라는 말이다. 자기 행위의 실수로 받는 비난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가치체계의 극한적 대립상황에서 생기는 그들의 저항이요 반발이며 자신의 체제 유지를 위한 몸부림에서 생기는 핍박이다. 이 말은 달리 말하면 자신이 그 세상체제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말해줌과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임함의 외적 표징이기도 하기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할 일이며 그것이 곧 상급인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기를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 15:1)

우리의 상급은 결코 하나님 자신 외에 다른 것이 되어서도 안되고 될 수 없다. 그것이 새언약의 성취요 한몸의 원리이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계 21:7)

우리의 진정한 면류관은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계 3:12)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로 지어져서 그의 소유된 백성과 땅이 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큰 상급이다. 신부가 신랑외에 다른 것을 바라는 것은 창기적 속성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다. 창기는 남자외에 금품을 바라는 것이 상례이지만 오늘날은 세상의 결혼 풍속도나 교회안에서의 결혼풍속도가 신랑이나 신부 자신보다도 열쇠고리에 더 관심이 있으니 어찌되려는지 .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도 정결한 처녀를 찾아 예루살렘 거리를 방황()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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